영화 '동주'의 배경, 왕곡마을
밥 짓는 굴뚝엔 연기가 피어오르고, 어릴 적 시골집에서 자주 맡던 장작 타는 냄새가 풍겨왔다. 누렁이가 짖기 시작하고, 노랗게 익은 벼가 바람에 흔들렸다. 때는 풍경을 더욱 노오랗게 물들이는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가을날 저녁이었다.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 윤동주, ‘소년’ (1939)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왕곡마을은 영화 '동주'의 배경이 되었다. 추석 연휴 끝 무렵 강릉에 가볼까 하다가 우연히 왕곡마을의 존재를 알게 되어, 조금 더 북쪽으로 향했다.
우리 남매들이 태어난 명동 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었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 밖에는 30주가량의 살구와 자두의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 윤일주 '윤동주의 생애' 중
영화에서 윤동주 시인의 집으로 등장하는 큰상나말집도 시인의 동생 윤일주 교수가 묘사한 집처럼 앞에 우물을 하나 두고 있었다. 이곳에서 동주(강하늘 분)와 몽규(박정민 분)가 등목을 하는 장면이 촬영되었고, 영화가 끝난 후 스크린에 그 모습을 담은 영상이 흐른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 ‘자화상’ (1939.9)
영화 '동주'는 시인 윤동주(1917.12.30 - 1945.2.16)와 그보다 3개월 전 같은 집에서 태어난 사촌 송몽규(1917.9.28 - 1945.3.10)의 삶을 담았다. 둘의 고등학생 시절부터 연희전문 재학시기, 일본 유학,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이 사실에 기반하여 세세히 담겨 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영화를 볼 때만 해도 당연 여전히 흔적이 남아있는 중국 지린성 룽징의 윤동주 생가에서 촬영을 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촬영지가 고성의 왕곡마을이었음을 알게 되곤, 비교적 쉽게 가볼 수 있는 곳임에 아쉬움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왕곡마을이 영화의 배경이 된 이유는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마을에 가보니 느낄 수 있었다. 마을은 옛 모습을 굉장히 잘 간직하고 있었다. 이곳의 건축에는 우리나라 북방지역 가옥의 특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한다. 우선 지붕의 경사가 급하여 눈이 지붕에 많이 쌓이지 않고 떨어진다. 대문을 만들지 않고 개방된 마당을 두었다. 따뜻한 햇볕을 많이 들이기 위함이고, 눈이 많이 쌓였을 때 고립되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 집집마다 둥글게 놓인 항아리 굴뚝은 집안으로 따뜻한 열기를 다시 보내준다고 한다. 이러한 지혜는 고성보다 더욱 추웠을 북간도에서도 이어졌으리라.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내굴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 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 윤동주, ‘굴뚝’ (1936. 가을)
안동 하회마을이나 전주 한옥마을처럼 잘 알려진 마을보다 관광객이 많지 않아 고즈넉하니 좋았다. 경로당 앞에 놓인 커다란 지도엔 각각의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쓰여 있었는데, 여전히 많은 가구가 생활을 하고 있는 듯해서 조심히 걸었다.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 윤동주, ‘해바라기 얼굴’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성씨를 보니 대부분이 함씨. 그 이유는 마을의 유래 안에 있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지지했던 함부열은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다 이곳에 은거하게 되었는데, 그의 손자 함영근이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마을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후 강릉 최씨도 함께 살아 집성촌을 이루었다.
영화 초반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는 왕곡마을의 정미소. 이곳에서 몽규는 동주에게 시집을 선물하기도 하고, 시에 대한 견해 차이로 말다툼을 하기도 하고, 몽규의 신촌 문예 당선 소식을 듣기도 하고, 중국으로 몽규를 떠나보낸다. (영화 속 이야기다.)
정미소의 기계는 여전히 작동 가능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공간이 영화 속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어두컴컴하여 흑백으로 칠해진 영화 속 동주와 몽규가 당장이라도 먼지를 털고 일어나 나올 것 같다.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에 진학하게 된 윤동주와 송몽규는 고향을 떠나 경성으로 향한다. 그 장면에 마을의 전경이 아름답게 담겨 있다. 기대에 찬 두 청년의 마음을 잡아두는 안정감 있는 배경은 어디에 둘러 있는 것일까. 마을 밖으로 나오니 보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잠시 차를 댈 수 있는 공간을 만났다. 바로 그곳이 고향을 떠나 새로운 길을 떠나는 둘의 모습을 프레임 안에 가둔 곳이었다.
황금들녘에 황혼이 눈부셨다.
햇살은 미닫이 틈으로
길죽한 일자를 쓰고......지우고......
까마귀 떼 지붕 위로
둘, 둘, 셋, 넷, 자꾸 날아지난다.
쑥쑥, 꿈틀꿈틀 북쪽 하늘로,
내사 ………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 싶다.
- 윤동주, ‘황혼’ (1936.3.25 평양서)
내년은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나는 올해 그가 세상을 떠난 나이가 되어 있다. 서늘한 사람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보듬어주는 시를 세상에 남기고 떠난 그를 떠올리니 참으로 부끄러운 나이다.
INFORMATION
고성 왕곡마을
주소 :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홈페이지 : http://www.wanggok.kr/
함께한 작품
- 영화 '동주' (이준익 감독)
-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지음)
- 도서 '윤동주 평전' (송우혜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