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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May 30. 2017

싱그러운 한낮의 기억,당진 필경사

소설 <상록수>의 마을을 다녀오다

날 나는 얼음이든 주스를 마시며 동네 책방에서 사 온 <상록수>를 읽고 있었다. 창밖엔 초록빛이 싱그러웠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유리잔에 물방울이 맺혔다. 그날 신선했던 공기와 소설이 잘 어울렸던 탓인지 어린 나는 <상록수>에 흠뻑 빠졌다. 다 읽고 나니 아쉬워져서 비슷한 책을 더 사러 나갔다. 이광수의 <흙>, 강경애의 <인간문제> 등을 이어서 읽었지만, 처음 읽은 <상록수>만큼 산뜻한 느낌을 받진 못했다.


소설 <상록수>에는 1930년대 농촌계몽운동을 하는 박동혁과 채영신이라는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둘은 모 신문사에서 주최한 학생 농촌계몽운동에 다녀와서 감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그 후 영신은 청석골에서 교회 건물을 빌려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동혁은 한곡리에서 농우회를 조직하고 경작사업에 힘쓴다.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가지만 영신은 몸이 약하고, 동혁은 동생의 잘못을 대신하여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상록수>를 읽은 날 만큼이나 맑았던 5월의 한낮. 당진으로 출발했다. 당진에는 심훈이 <상록수>를 집필한 필경사가 남아있다. 1932년 심훈은 서울 생활을 접고, 아버지가 살던 당진 부곡리로 내려가 집필활동을 하기로 한다. 우린 황금연휴에 출발한 탓에 목적지까지 얼마 남겨두지 않고 
아산호, 삽교호 부근 도로에서 한참을 갇혀 있었다.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오래도록 맞다가 늦은 오후에나 필경사가 있는 부곡리에 들어섰다. 마을에 들어서니 질박한 농촌 풍경이 이어졌다. 표지판이 제대로 없어 길을 잘 못 들어선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소설의 묘사와 마을이 매우 닮아 있어 차를 돌릴 필요는 없었다. 


<상록수>의 두 주인공은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다. 박동혁은 심훈의 조카이기도 한 심재영 선생, 채영신은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서 농촌운동을 한 최용신 선생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다. 박동혁이 땀 흘려 일하는 농촌 ‘한곡리’란 지명도 심훈이 머문 ‘부곡리’와 바로 옆에 있는 마을 ‘한진리’를 합한 것이다. 부곡리는 산촌마을이지만 아산만을 곁에 두고 있어 가까이에 ‘한진 포구’가 있다. 채영신은 건강이 안 좋아져 요양을 할 겸 동혁이 있는 부곡리를 찾아간다. 영신이 내린 ‘한곡 부두’는 현재의 한진포구가 모델이었을 것이다.




이윽고 파아란 뺑키칠을 한 똑딱이가 선체를 들까불며 들어온다. 갑판 위에서 손수건을 흔드는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가 보인다. 동혁은 손을 높직이 들며 허공을 저었다. 조그만 거루는 선객과 짐을 받아 식도 선창으로 들어와 닿았다. 동혁은 반가운 웃음을 얼굴 가득히 담고 영신의 손을 잡아 뭍으로 끌어올렸다.

“이번 비, 참 잘 왔죠”
한마디가 첫밗에 하는 영신의 인사였다.

“잘 오구말구요. 그래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을 허셨에요”
하며 동혁은 영신의 얼굴빛을 살핀다.


- <상록수> 중에서



필경사에 도착했다. 심훈이 직접 설계한 필경사(筆耕舍)는 붓 “필”에 밭 갈 “경” 자를 써서 ‘붓으로 논밭을 일군다’는 뜻이 담긴 집이다. 초가지붕이 소담하게 올라가 있는 목조 집이 마을과 잘 어우러져 있었다. 들어가 볼 순 없어서 들여다보니 오랜 흔적이 남아있었다. 마당엔 다정한 모습을 한 심훈 선생이 한 손에 책을 펼쳐 들고 앉아 있었다. 뒤에는 ‘그날, 쇠가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오라’고 적힌 나무 모양의 조형물이 하나 서있는데, 조형물의 그림자 자리엔 잔디가 돋아 있었다. 동혁과 영신의 모습도 보인다. 




곁에 심훈기념관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모든 자료를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는 크기의 기념관. 소설가로만 알았던 심훈은 굉장히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신문기자로 일했고, 영화에 관심이 많아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영화 <장한가>의 연기자로도 활동했다. 잊고 있었지만 그는 교과서에서도 만난 시 <그날이 오면>을 쓴 시인이기도 했고,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다양한 얼굴의 심훈을 만났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상록수>란 아름다운 소설을 낳은 소설가로 오래 기억할 것 같다. 물론 다시 <상록수>를 펼쳐보아도 어린 날 느꼈던 싱그러운 기분을 온전히 되살릴 순 없었다. 그때 나는 동혁과 영신의 애틋한 사랑에 마음이 끌리기도 했겠지만, 아마 소설에 자세히 담긴 농촌 풍경이 좋았던 것 같다. 난 막 걷기 시작했을 때 시골 외할머니 댁에 맡겨졌는데, 그때 기억 덕분에 시골마을을 좋아한다. 소설을 읽었을 땐 시골에서 지냈을 때의 기억이 지금보다 더욱 생생했던 날이었을 테니. 더욱 그 소설 속 풍경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싱그러운 날에 상록수의 마을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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