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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Jun 04. 2017

장미를 보니 떠오른
그날의 희미한 기억은

일본 가마쿠라 문학관

신록에 빙 둘러싸인 길을 오르면 커다란 돌로 만든 별장의 문이 나타난다. 
(중략) 지금의 후작이 일본식과 서양식을 절충시켜 12개의 객실이 있는 저택을 세우고, 테라스부터 남쪽에 펼쳐진 정원 전체를 서양식으로 바꾸었다. 남쪽으로 향한 테라스에서는 정면에 오오시마가 멀리 보이고...

- 미시마 유키오, ‘봄의 눈’ 중에서


青葉に包まれた迂路を登りつくしたところに、別荘の大きな石組みの門があらわれる。
(中略)現侯爵はただちにそのあとへ和洋折衷の、十二の客室のある邸を建て、テラスから南へひらく庭全体を西洋風の庭園に改めた。南面するテラスからは、正面に大島がはるかに見え…」
-「春の雪」より (新潮社)


꽃 정기구독으로 오로라 장미가 배송되어 오고, 거리에도 장미가 슬슬 보이기 시작하니 몇 해 전 일본에서 만난 장미의 기억이 떠올랐다. ‘장미를 보러’ 간 곳이 아니어서 갑자기 만나버린 장미 더미가 놀랍기도 하고 굉장히 반가웠던 기억. 그 해 장미는 여느 해보다 일찍 꽃을 피운 탓인지 인적이 드물었다. 운이 좋았다. 홀로 장미밭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장미를 만난 곳은 가마쿠라 문학관 鎌倉文学館. 가마쿠라는 일본 작가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온 마을로, 문학관은 가마쿠라와 연이 깊은 작가들의 이야기로 꾸며 있었다. 이곳은 1890년 무렵 마에다 후작의 별장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원래 초가로 지은 집이었는데 1910년에 불에 타 없어졌고, 서양식으로 다시 세워졌다. 한때 일본의 전 총리 사토 에이사쿠 佐藤栄作 가 빌려 별장으로 썼다고도 한다. 그 시기에 미시마 유키오 三島由紀  사토 총리 부인의 친구였던 어머니를 따라 이곳에 방문했고, 크게 매료된 듯하다.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장편소설 ‘풍요의 바다 豊饒の海 의 1권, 봄의 눈 春の雪 에 이곳을 등장시켰다. 



한국어 번역본이 아직 없고, 해외배송으로 책을 받아본 뒤에 사전을 찾으며 읽다간 장미가 시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2005년에 개봉한 영화를 통해 줄거리를 만났다. 주인공은 츠마부키 사토시가 연기한 마츠에다 후작 가문 松枝候爵家 의 후계자 키요아키 清顕 와 다케우치 유코가 연기한 아야쿠라 백작 가문 綾倉伯爵家 의 딸 사토코 聡子 다. 키요아키와 사토코는 어린 시절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성인이 된 둘은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사토코의 사소한 장난이 키요야키의 자존심을 크게 상처 입힌다. 키요아키는 사토코에게 냉랭한 태도를 일관하고, 사토코는 황족 집안과 결혼이 약속되어 버린다. 그때부터 둘의 사랑은 무한히 깊어만 가고… 사토코는 키요아키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결국 사토코는 집안과 키요야키의 미래를 생각하여 아이를 지운 후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간다. 사토코를 만나고 싶어서 절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키요아키는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다. 


가마쿠라 문학관은 키요아키 집안의 별장 건물로 등장하지만, 아쉽게도 영화는 다른 장소에서 촬영된 듯했다.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갈 듯한 초록빛 터널을 통과하니 앙증맞은 색감의 건물이 보였다. 키요아키의 별장이었구나! 뒤로는 산이 둘러있고, 주변은 녹음만이 우거져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건물 앞에 잔디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그 앞에는 장미들이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나는 문학관 구경을 잊고 장미밭으로 달려갔다. 노랑, 분홍, 빨간색 장미가 무리 지어 피어있었다. 별장 건물은 장미들에 파묻혀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정원 앞으론 멀리 바다가 펼쳐져 있는 듯했지만 건물의 노후화로 테라스에 올라가 볼 순 없다고 했다. 내부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관람을 해야 했는데, 나무로 된 마룻바닥에서 삐그덕 삐그덕 좋은 소리가 났다. 

글을 쓰다가 우리 집 책장을 보니, 해외배송으로 주문하려고 했던 미시마 유키오의 '봄의 눈’이 떡하니 꼽혀 있었다.


‘어찌 된 일이지?’


갑자기 한 아주머니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가마쿠라 문학관 출구 곁에 있는 기념품샵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였다.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아주머니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보아서 예의상 뭐라도 물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혹시 가마쿠라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책도 이곳에 있나요?"


일본인 특유에 친절과 근면을 무장하고 열심히 찾기 시작한 아주머니는 몇 가지 책을 추천해주었고, 나는 그 중 제목이 마음에 든 책을 골라 들었다. 그 책이 바로 ‘봄의 눈’이었던 것이다. 늘 여행에서 호기롭게 원서를 사서 돌아오지만 그 호기는 집에 돌아온 순간 사라져 버려 나의 책장 두 세칸은 한 장도 펼쳐지지 않은 책들이 채우고 있다. ‘봄의 눈’ 역시 누가 쓴 소설인지, 가마쿠라가 어떻게 담겨있는지, 또 이토록 센스 있는 추천이었는지 모른 채 책장에 서 있던 것이다. 장미를 보며 떠오른 그날의 희미한 기억은 ‘봄의 눈’의 발견으로 더욱 선명해졌다. 


별장에서 나왔을 땐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학관 구경보다 장미밭을 먼저 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더욱 짙어진 나무 냄새를 내던 초록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INFORMATION

가마쿠라 문학관은 에노덴전차 유이가하마 역 由比ヶ浜駅 에서 도보로 7분 정도 소요된다. 정원에 피어 있는 봄의 장미는 5월 중순에서 6월 하순까지, 가을 장미는 10월 중순에서 11월 하순까지 볼 만하다고 한다. 

홈페이지 http://kamakurabungak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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