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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Aug 30. 2017

갑자기 뛰쳐나가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사 온 날

책 속에 감초, 직접 그린 손그림

아주 조금 아픈 이야기를 시작한다.
물론 지금은 괜찮다. 아프지 않다.



힘겨운 월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회의실 가장 끄트머리에 앉아 수첩에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고 있다. 매주 있는 월요일 주간회의인데, 그날은 유독 숨이 막혔다. 빨리 나가고 싶었다.


입사를 하고 처음 일 년 동안은 긴장한 탓에 아픈 줄도 모르고 출근길에 올랐다. 1년 정도 지나자 극심한 위장 통에 시달렸다. 지하철 안에서 위장이 뒤틀려 몇 번이고 쓰러졌다. 목적지가 아닌 역 안 벤치에 신세를 지다가 꾸역꾸역 출근을 했다. 3년 차에 들어서자 위장 통은 잠잠해지고 피부가 뒤집어졌다. 내장에 머물러 있던 억눌림이 얼굴로 다 올라가버린 것일까. 성인 여드름으로 불긋불긋한 얼굴은 더 큰 스트레스로 돌아와 피부과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사람들을 만나기가 꺼려졌다. 그리고 3년이 지나자 피부는 조금 진정이 되었지만, 열이 머리까지 치민 듯했다. 만성두통에 시달렸다. 때때로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 되곤 했다. 나는 대한민국의 사회 초년생이었다.


3년 동안 회사를 다니며 하루 종일, 거의 24시간 내내 회사원으로만 살았다. 회사에서 힘들었던 일, 내가 실수한 일, 사람들에게 실망한 일을 퇴근길에 남자 친구에게 이야기했고, 집에 가서는 가족들에게 말했다. 잠들기 전에는 혼자 떠올렸다. 그날의 상황을 머릿속에서 계속 재현시키면서…. 그래도 감정 정리가 되지 않으면 그것을 일기장에 적기까지 했다. 당시 썼던 일기장에는 갖은 나쁜 감정들이 쌓여있다. 잠에 들어서도 끝내지 못하고 온 일을 처리하거나, 상사와 불편한 커뮤니케이션을 지속하는 꿈을 꾸곤 했다. 업무와 인간관계 스트레스로부터 24시간 내내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다.


그리고 숨이 탁탁 막히던 어느 월요일 아침. 회의실에서 나왔다. 숨이 정상적으로 쉬어지지 않았다.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 없어 밖으로 나갔다. 회사 건너편에 있는 화방에 가서 충동적으로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샀다. 지금도 그때 왜 하필이면 화구를 샀을까? 문득 궁금해지곤 한다. 그날 저녁 회사 동기들을 만나 맥주를 한 잔 했다. 집에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날 먹은 맥주와 안주를 그렸다. 결혼을 앞둔 동기의 얼굴도 그려 보았다. 집중해서 그리다 보니… 회사에서 잘 풀리지 않았던 일,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혼난 일, 신경 쓰이는 사소한 말실수 등을 떠올리지 않고 밤을 보내고 있었다! 방금 그린 그림 속 스팸 초밥을 먹을 때만 해도 나는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다’며 동기들에게 투덜대고 있었는데.



그날 이후부터 누군가에게 힘들었던 하루를 이야기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 시간에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릴 때는 손을 바삐 움직여야 하고, 눈과 머리는 오로지 그림에 집중을 해야 한다.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전혀 없다. 회사 생각을 완전히 내려 놓을수있는 유일한 시간이자, 굉장한 치료제였다.


부정적인 감정은 누군가에게 말한다고 덜어지지 않는다. 듣고 있는 사람도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해서 감정이 증폭될 뿐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3년 내내 내뱉어왔다. 하소연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혼나야 하는 일은 혼나야 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상사의 언행을 바꿀 순 없다. 처리하지 못한 일은 내일 출근해서 처리하면 된다. 회사 일을 집에 와서 떠올리지 않아도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회사를 떠올릴 시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늘 예민해 있던 나는 마음에 여유가 조금씩 생겨났다. 놀랍게도 각종 질환들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근무 중에 ‘오늘 퇴근해서 뭐 그려볼까’ 떠올리는 일만으로도 신이 났다. 처음엔 일상을 그렸지만, 일상은 아무래도 일과 연결고리가 있으니 회사를 다시 떠올리게 될 수 있다. 다른 소재를 찾았다. 휴가 때 다녀온 곳을 그려보기로 했다. 그렇게 여행을 그림으로도 기억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림을 통해 행복한 기억을 더욱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회사원인 나의 여행은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기 어렵다. 물론 핀란드의 호수를 보고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어져서 현지에서 스케치북을 덜컥 산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정말 그리고 싶은 것들은 퇴근 후의 시간을 위해 남겨 둔다.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시작된 고난한 하루를 마치고, 행복했던 기억을 그려낸 손그림들이 한 장, 두 장 쌓이기 시작했다.

 

지면에 한계로 <다정한 여행의 배경>에는 수록되지 못한 많은 손그림들!



이렇게 차곡차곡 모인 손그림들이 <다정한 여행의 배경>에도 담겨 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표지 역시 저의 손으로 그린 오타루의 기억입니다.



(<다정한 여행의 배경> 예약판매 기간 중에 책을 구매하시면 에코백을 드린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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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증폭제.

여행, 손그림으로

다시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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