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여행의 배경>에 담긴 사진 이야기
반나절 동안 찍고 나와 카메라 화면에 찍힌 숫자를 확인했다.
4,231장.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단 한 장도 들어 있지 않은 빈 SD카드였다.
말이 되냐고?
내가 봐도 거짓말 같은 숫자였다.
이렇게 많은 사진을 찍을 데가 어디 있나?
모터쇼에 가서 찍었다.
이 정도로 단시간에 무리해서 사진을 찍으면 발생하는 현상. 계단을 오르내릴 때 지옥을 경험한다. 일주일 동안.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은 다행이지만, 문제는 지하철이다. 역 안에서 지상으로 올라올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계단. 다리를 한 번 들어 올리기도 벅찬데, 정확히 특정 부위가 아픈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약을 쓸 수가 없다. 파스도 애매하다. 시간이 치유해주길 기다릴 뿐.
첫 직장은 이토록 많은 사진을 찍어야 하는 곳이었다. 내가 카메라를 본격적으로 만지기 시작한 것은 백과사전 회사에 입사하고부터다. 그전까지는 디지털카메라를 갖고 있긴 했지만, 풍경 속에 들어간 내 모습을 담아두는 정도였다. 옛날에 찍은 사진을 찾아보면 작품이 따로 없다.
회사에 들어가서 DSLR 카메라라는 것을 처음으로 들어보았다. 매우 무거웠다. 물론 나의 주요 업무는 백과사전에 수록할 표제어를 선정하고, 프로젝트를 꾸리고, 집필자를 섭외하고, 원고를 받아 편집하는 일이었지만. 사진을 담당하는 직원은 따로 있었지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입사 때 ‘무얼 잘 해서’ 들어왔는지, 나는 '무엇을 담당'하는 사람인지. 크게 중요하지 않단 사실. 뭐든 다 해야 하고 하게 된다. 심오한 작품사진을 찍던 나도 백과사전에 수록할 사진을 찍어야 했다.
‘백과 百科’라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 백과사전에 담길 수 있는 정보의 범위는 굉장히 넓다. 인물이든, 사물이든, 사건이든, 현상이든, 개념이든 무언가를 ‘정의 내릴 수 있다’ 면 일단은 백과사전에 수록될만한 후보가 된다. 물론 여러 제약조건이 있으므로 먼저 수록되어야 할 대상이 선정되고, 차례차례 등재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백과사전에 수록될 잠재력을 갖고 있으니 자료는 모을 수 있을 만큼 모아두는 것이 좋다. 책을 사고, 어디 가면 팸플릿을 챙기고, 안내문, 설명서를 읽고. 사진은 무조건 많이 찍어둘수록 좋다. 생물, 물건, 명소, 풍경 등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다각도에서 찍어두어야 나중에 사전에 등재할 때 정의 내리고, 설명하기 쉽다.
나의 사진은 무 無에서 시작되었다. 노출이고, ISO이고, 셔터스피드고… 매번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되고, 막상 찍을 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그냥 무조건 많이 찍었다. 믿을 것이라곤 튼튼한 두 팔뿐. 한두 장 찍은 후 카메라 화면을 보고 아주 하얗거나 어둡지만 않으면, 그때부턴 조리개를 열고 닫고, 셔터스피드를 느리게 빠르게 조정할 것도 없이. 대부분 자동으로 조정되게 둔 후 버튼이라곤 무조건 동그란 셔터만 눌러댔다. (물론 요즘에는 조리개와 셔터스피드에 대한 지식이 아주 조금 생겨서 버튼 세 개 정도는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백과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이 모터쇼에서 찍는 사진은 으리으리한 수억 대의 슈퍼카가 아니라, 가슴을 한껏 모아 올린 레이싱 모델이 아니라, 주로 이런 사진이다. 사이드미러, 헤드라이트, 타이어, 휠, 범퍼, 손잡이, 주유구, 와이퍼 등등. 이들은 모두 백과사전 표제어가 될 가능성이 있고, 또 이미 등재되어 있다. 게다가 이러한 개념들은 텍스트로 설명하는 것보다 사진 한 장이 명료하다. 그렇게 차 한 대 당 30,40장은 기본으로, 또 전시된 자동차 관련 부품들을 다각도에서 찍었다.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4천여 장이 될 때까지.
이런 습관은 당연 여행으로까지 이어져 나는 여행을 다니면서도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찍는다. 친구들로부터 '여행을 좀 즐기라'는 핀잔도 많이 듣지만, 습관적으로 셔터를 계속 눌러댔다. 요즘엔 체력도 좀 떨어졌고, 의욕도 꺾여서 신입사원 때만큼은 못 찍지만 그래도 많이 찍는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와 친구들과 찍어온 사진을 교환하다 보면, 나의 사진이 유독 튄다는 느낌을 받았다. 잘 찍어서 튀는 것이 아니라(당연),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다. 조금 지루해 보이기도 했다.
얼마 전 회사에서 진달래 사진이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찍어둔 사진을 내보인 적이 있다. 그때 한 동료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와 정말 백과사전 사진 같네요.”
'동네 산책하다 찍은 사진인데…'
드디어 답을 찾은 듯하다. 왜 내 사진이 친구들의 사진과 달라 보였는지.
내가 찍은 사진은 백과사전 같구나!
[덧붙임] 백과사전 사진이라고 크게 특별할 것은 없지만, 가장 큰 특징은 아름다운 모습만을 부각하지 않는 것일 듯합니다. 그리고 아름답게 보정하지 않습니다. 주관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코스모스를 찍는다고 하면 위의 두 장의 사진처럼 줌을 당겨서 꽃만 찍는 게 훨씬 더 화려하고 보기에 좋습니다. 노출을 높이거나, 색을 보정하면 더욱 예쁘죠.
그러나 백과사전 사진은 한 장의 사진 안에 최대한 많은 설명이 담겨 있을수록 좋습니다. 식물이라면 꽃, 잎, 줄기의 모양, 전체적인 크기, 꽃이 차지하는 비중, 서식지를 알 수 있는 주변 풍경 등이 포함되어 있으면 좋죠. 최대한 많은 정보가 포함된 사진은 대표 사진이 됩니다. 꽃잎의 색도 식물의 종을 구분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므로 육안으로 본 색과 가까운 색을 남깁니다. (물론 이론상 그렇습니다만,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예쁜 사진에 마음이 끌리기 마련입니다. 실천은 꽤 어렵습니다.)
이러한 미묘한 특징은 <다정한 여행의 배경> 속 여행사진에도 담겨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정한 여행의 배경> 속 사진은 화려하거나 근사하진 않지만 편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