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과학 정보통신 분야의 발전만 보면 인류는 역사 이래 가장 아름다운 세상에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21세기가 되면서 서점이나 극장에서는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 세상을 더 많이 접하게 됩니다.
조지 오웰의 "1984"는 2차대전 후인 1949년에 나온 책입니다. 이 책은 1984년에 다시 한 번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제게는 빅 브라더라는 설정이 허황되게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빅 브라더는 공산주의의 폐해를 상징하는 거라는 신문사설이 그럴듯하게 들렸습니다. 그러나 온갖 종류의 카메라가 일상이 된 2010년 후에 다시 읽어보니 조지 오웰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미래가 이미 와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1932년에 나온 책입니다. 멋진 신세계의 배경은 2540년입니다. 가난, 기아, 질병, 실업, 전쟁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배경만 보면 유토피아처럼 보이는 이 세계가 끔찍한 이유는 인간성이 통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의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에 의해 만들어져 엄마의 뱃속에서 자라는 게 아니라, 유전자 조작에 의해 만들어져 실험실의 병속에서 자라납니다. 기계적을 대량생산된 아이들은 몇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져 각자의 계급에 맞게 양육됩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장면은 낮은 계급 영유아들의 지적 정서적 능력을 퇴화시키기 위해 가해지는 가학적인 행위들입니다. 육체노동을 담당할 낮은 계급의 아이들은 책과 꽃을 미워하게 만들어서 효율성 높은 인간으로 키워집니다. 20세기의 학교교육이 사실은 산업혁명 이후에 말 잘 듣는 시민을 양산하기 만들어진 방법으로 개성과 창의성을 말살하는 시스템이라는 주장을 하던 교육학자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21세기 아이들의 교육수준은 부모의 사회경제적인 지위에 의해 결정됩니다. 헉슬리가 그린 신세계가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최근 몇 년간 디스토피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많이 상영되었습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어두운 미래에 처합니다. 핵전쟁이나 지구 온난화로 인한 환경변화, 생화학 무기로 인한 대량살상, 에볼라나 메르스 같은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한 인류 대부분의 사망 등 이유와 결과는 다양하지만 인류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디스토피아 작품에 등장하는 사회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과학이 발전할 수록 인간의 자유가 통제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제공된 정보나 지식에 의해 조정당합니다. 그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이나 독재자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주어진 정보를 맹신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이 요구됩니다. 검색엔진이 보여주는 결과를 맹신하거나 무차별적으로 뿌려지는 소셜미디어에 좌지우지되는 대중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사람이 주장하는 사실에 "왜?"라고 질문하는 모습이 디스토피아 작품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그 사회에 침몰되지 않는 사람은 그 사회가 주장하는 바에 반문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디스토피아 세계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은 대다수의 구성원이 경험하지 않는 시련을 통과함으로 훈련되는 모습입니다. 순응하지 않는 사람은 시련을 당할 확율이 높아집니다. 주인공들은 그 시련을 통해 훈련되고 성장합니다. 모두가 회피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기에 실패하지만, 모두가 경험하지 못하는 특별한 경험을 합니다. 바로 실패를 극복하는 경험입니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어서, 그 속도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세상이 되었습니다. 엄마는 우리 아이가 옆집 아이에게 뒤쳐지지 않고 앞서 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가 자라면서 배워야 할 것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기꺼이 갈 수 있는 호기심과 용기입니다. 줄세기우 사회에서 앞자리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아이로 자라도록 응원해야 합니다.
아이가 걷기보다 주로 뛰는 이유는 마음이 이미 저 앞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