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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스 Mar 19. 2022

내가 돼지고기를 못 먹게 된 이유

 “왜 돼지고기를 안 먹어?”

누군가 그렇게 묻는 일이 없도록, 그런 질문을 받는 난처함에 빠지지 않도록 나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특히 삼겹살처럼 식사자리에서 자주 먹는 메뉴를 못 먹는다는 것은 정말 몹시 불편한 일이다. 식사자리를 피해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자리들도 있었다. 반복된 경험 속에서 나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 특히 여럿이 작은 불 판 위의 고기를 먹어야 하는 치열한 순간에는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자유가 임했다. 굳이 사람들과 식사를 피할 이유를 찾거나, 질문 유발자가 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묻지 않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음으로  자유를 얻었다. 


내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게 된 건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 때문이다.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아직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전이었다. 나는 내게 일어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고, 나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6-7세 무렵인 듯하다. 내가 살았던 곳은 버스가 자주 없는 시골이었다. 초등학생들은 꽤 먼 거리의 학교를 걸어서 다녔고, 토요일 하굣길에 가끔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을 정도로 친환경적인 삶을 살았다. 오래전이지만, 그런 시절이 있기는 했다. 추수가 끝나는 가을부터 우리들의 놀이터는 마을 회관 앞에 쌓아 놓은 볏짚단 더미였다. 벼를 탈곡한 후에 쌓아 둔 짚단은 푹신하고 높아서 아이들이 놀기에 최상의 공간이었다. 놀거리가 마땅지 않았던 아이들은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참견할 거리를 찾아다녔다.


그날도 나는 동네 언니 오빠들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어디선가 기괴한 소리가 났다. 우리들은 소리를 따라갔다. 어느 집 앞마당에서 어른들은 돼지 한 마리를 기둥에 묶고 있었다. 우리가 나타나자 아저씨들은 “애들은 가”라고 우리를 내쫓았지만, 호기심 많은 우리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담벼락 뒤에 숨어서, 숨죽이며 어른들의 행동을 살폈다. 


 그날 내가 목격한 장면은 돼지 도축 과정이었다. 시골에서는 가축을 직접 잡는 일이 종 종 있었던 것 같다.  날카로운 도끼날이 번쩍이며 돼지의 목덜미를 내려쳤다. 돼지는 울음소리 같은 비명을 질러 댔다.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흘러내렸다. 이 과정이 몇 번 반복되었고 돼지의 울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돼지는 살아있는 생명체에서 고기가 되었다. 왜 어른들은 그렇게 비참한 방법으로 돼지를 도살해야 했을까. 그런 고통을 목도한 것이 그날 이후 내게 크게 각인된 것 같다. 


어느 날 밥상에서 김치찌개를 먹다가 문득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이 고기 무슨 고기야?” 엄마는 ‘돼지고기’라고 답해주었다. 나는 먹던 음식을 그 자리에서 다 뱉었다. 엄마에게 혼이 났지만, 그 후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돼지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만 있었다.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가족들의 핍박을 견디면서도 나는 내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무엇이 내게 돼지고기를 거부케 한 걸까? 어른이 되고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알게 되고 나서 나는 내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게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이가 좀 더 들면서 심각하게 이런 식습관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결혼한 배우자가 고기를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요리를 자주 해야 하는데, 간을 볼 수 없다는 게 참 불편했다. 바짝 구운 삼겹살로 몇 번 도전해보기도 했다. 막상 입안에 들어간 돼지고기는 내 몸에 두드러기라든가  이상반응을 전혀 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돼지고기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무척 불편했다. 결국 나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삶을 계속하기로 했다. 돼지고기는 여전히 우리 집 식탁에 자주 올라온다. 그런 날이면 나는 달걀이나 두부 같은 반찬을 따로 준비한다. 


 고기 안 먹는 삶을 그럭저럭 살아가고는 있는데 정말 난감한 상황과 시즌이 있다. 난감한 상황들은 거절하기 어려운 인간관계의 식사 장소에서 혹은 오랜만에 만난 어른들이 사주시는 식사자리에서 돼지고기를 만날 때다. 맛난 거 사 주신다고 간 곳이 돼지갈빗집일 때, 나는 잠시 머릿속이 아득 해진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는 쉬운 방법은 내가 고기 굽는 집게를 선점하는 것이다. 그러면 굽는 행위에 숨어 안 먹는 일이 가능하다. 다만 인정 많은 어르신들, 불편해서 못 먹을까 봐 직접 구워 주시면서 고기를 일일이 덜어주시는 분들이 있다. 그럴 때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기가 어려워진다.


 나를 난감하게 하는 일 년 중 한 시즌이 있는데 바로 김장시즌이다. 왜 하필 김장의 짝꿍은 보쌈이 되었을까. 나이가 들다 보니, 김장 담그는데 일손을 도우러 가기도 하고, 김장했다고 집으로 초대해주시는 경우도 있다. 가보면 반찬은 어김없이 김장김치와 보쌈뿐이다. 나의 젓가락은 또다시 갈 곳을 잃는다. 특히 김장 담그는 일에 동원돼 저질 체력을 방전해가며 노동을 한 뒤 먹는 점심이 맨밥과 김치뿐이라는 사실은 정말 맥 빠지는 일이다.


지금도 돼지는 우리의 밥상에 오르기 위해 평생을 비좁은 공간에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동물보호를 위해 채식을 권하거나, 동물복지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랜 시절 관습처럼 행해졌던 도축과정으로 인해 한 아이는 평생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 삼겹살을 먹는 즐거움, 곱창을 먹거나, 보쌈을 먹는 평범한 즐거움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돼지고기를 못 먹는다고 말하면 경악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삼겹살, 목살, 수육, 족발, 소시지처럼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음식을 나는 먹지 못한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고기를 즐기는 육식의 별 지구에서, 고기를 맛나게 먹을 줄 알아야 배운 사람 소리를 듣는 이 시대에 나는 ‘고기 못 먹는 이상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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