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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놀이

by 쓰는 사람

작년 여름, 함양에 피사리를 하러 갔다. 피사리는 모를 심어둔 논에서 모 사이사이를 걸어다니며 피 뽑는 일을 말한다. 나는 농사와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마을에 어울려 살다보니 가끔 논에 들어갈 일이 생긴다. 이곳에 살면서 가끔 나 혼자였다면 하지 않았을 이런저런 일에 함께하게 되는데, 나는 이런 경험을 반기는 편이다. 나는 일정한 생활반경안에서 비슷한 생활을 반복한다. 집과 직장을 오가고 반찬가게에서는 늘 먹던 반찬을 산다. 그래서 새로운 일감과 관계와 충격(?)을 안겨주는 마을살이가 정신에 건강한 자극을 주는 것 같다. 이런 경험이 나를 조금 더 유연하게 해주는 것 같다.

온배움터 실무진들이 참여자들을 위해 마련한 강좌에 참여하는 대신 식당에서 저녁준비를 돕기로 했다. 식사준비를 도운 것도 이것이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아서였다. 내가 언제 50명분의 식사를 마련하는 일에 동참해보겠는가? 여기 모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니면 모 사이에 난 피를 뽑겠다고 몇 시간 차를 달려 오지 않을 것이다. 저녁준비팀은 서두르지 않고 서로 재촉하지 않고 담담하게 식사준비를 한다. 나는 행주로 식탁을 닦고, 식판을 씻고, 수저를 놓았다.

저녁밥은 직접 말아먹는 채식김밥이었다. 김이 눅눅해지지 않게 그릇의 물기를 싹싹 닦았다. 나는 새로운 경험을 주도적으로 만드는 편은 아니지만, 그것을 소중히 여기려 한다. 새로운 경험에는 나를 조금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줄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다.(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건 현재의 내가 뭔가 모자라다고 느껴서인가, 아니면 성장하는 게 기뻐서인가? 전자라면 나는 아무리 상황이 좋아져도 늘 결핍감에 쩔쩔맬 것이다.)

저녁을 먹고 '비밀놀이'를 했다. 진행요원들은 학교 터 곳곳에 별밭, 도깨비터, 어둠의집 등의 놀이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아이들과 어른으로 구성된 몇 팀이 차례로 놀이터를 방문했다.

나는 <웃음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 연구소 소장인 H왕자는 이십년전 그의 빼어난 미모를 질투했던 마녀의 저주에 걸려 웃음을 잃었고, 이후로 한 차례도 웃은 적이 없었다. 웃음연구소를 방문한 사람들은 H왕자를 웃겨서 그의 저주를 풀어야 다음 놀이터로 떠날 수 있다. 나는 새로 온 팀을 맞이하고, 놀이가 끝나면 다음 공간으로 안내해주는 역할을 맡았는데, 다음 놀이터에서 아직 준비가 안됐으면 질질 시간을 끌기도 해야했다.

H씨는 자기가 왕자이고, 잘생겨서 마녀의 저주를 받았다는 얘기를 천연덕스럽게 했다. 새로운 조가 방문할 때마다 똑같은 연기를 되풀이했는데, 매 연기가 조금씩 달랐고, 점점 연기가 느는 것 같기도 했다. 연극배우가 하루에 같은 공연을 수차례 되풀이하는 걸 지켜보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웃겨야 한다는 과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10분 넘게 작전회의만 하는 조도 있고, 적극적으로 웃겨보려는 이들도 있다. 갓 열살을 넘긴 여자애 두명은 대본까지 만들어 상황극을 했고, 남자애 한 명은 조약돌을 던지듯 썰렁한 개그 세 네개를 퐁당퐁당 던졌다. 웃지 않으려는 자와 웃기려는 자들의 대결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잘 버티던 H씨가 흔들린 순간은 우리 마을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였다. 그들은 H왕자가 잘생겨서 저주에 걸린 이야기를 할 때부터 말도 안된다며 딴지를 걸고, 조금만 표정이 바뀌어도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웃었어!'하며 몰아붙였다. 초보배우가 견뎌내기엔 버거운 상황처럼 보여 나는 권투시합을 중재하는 심판처럼 둘 사이를 갈라 왕자를 코너로 데려갔다. "우리 연구소가 요즘 어려워요. 좀 잘해봅시다. 숨을 크게 쉬어볼까요?" 겨우 진정시켰음에도 마을 어른 한 분이 갑자기 게다리춤을 추니 H씨는 견디지 못하고 곧장 무너졌다.

캄캄한 여름밤, 휴대폰 불빛을 켜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보니 숨이 차고 땀이 난다. 심장이 콩콩 뛰는 게 느껴진다. 논다는 건 참 기분좋은 일이구나. 아이, 어른이 어울려 이렇게 착하게 놀 수 있는 장은 요즘세상에 흔치 않다. 아이들이 재밌어하니 나도 뿌듯하다. 아이들에게 추억을 남겨주기 위한 비밀놀이가 어른들에게도 재미난 추억으로 남았다.

밤에는 학교도서관의 2층 나무다락방에서 잠을 잤다. 자리에 누우니 머리맡의 커다란 통유리창으로 반달과 별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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