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씨는 상대를 규정하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규정하고 판단하지 않나요? 평가랑 판단없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대하나요? 기존의 관계에서 쌓은 판단없이 어떻게 매번 사람을 새롭게 봐요?
나무씨가 규정한 제 생각이 실제 제 생각이랑 다를 때, 매번 해명하는 게 피곤해요. 평가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업무를 처리할 때는 도움이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별 문제를 겪지 않았을수도 있지만 저는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단체 간사님의 말을 듣고 의아했다. 내가 평가하고 판단한다고?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자주 돌이켜보고, 자기객관화를 위해 노력하는 내가? 아니다, 평가하고 판단했을 수 있지. 대체로 타인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단 걸 알아채지 못하니까.
간사님의 말을 단서삼아 삶을 돌이켜보자 평가하고 판단했던 일들이 이것저것 떠올랐다. 누군가의 지적 수준을 내 잣대로 가늠한 일, 친구의 인생살이에 훈수를 둔 일, 몇 번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의 성격을 멋대로 단정한 일 등등. 평가가 얼추 맞을 때도 있었지만 내가 규정한 상대와 실제의 상대가 다른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마음에 쌓아둔 선입견을 상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허둥지둥댔다. 나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미리 설정한 생각의 틀에 넣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마을에 있는 대안중학교에서 격주 일요일마다 공부모임이 열린다. 90년대 초에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산전수전 겪으며 이끌어오신 선생님이 강원도 홍천에서 양산까지 내려와 공부를 이끌어 주신다. 처음 뵀을 때 선생님에게 느껴지는 안정적인 기운에 감탄한 일이 있다. 내면이 넓은 호수처럼 잔잔한 분 같았다. 한 사람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과 수십명 앞에서 강의를 하는 모습에 별 차이가 없었다. 공부모임에서는 동서양 경전의 내용부터 일상의 갈등에 대처해나가는 법까지 마을에서 어울려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를 배운다. 개인적인 질문이 가능한 수업이라 선생님께 질문을 했다.
단체 간사님께 평가,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면이 있는 것 같고, 실제로 주변 사람들 기분을 상하게도 한 것 같아요. 이걸 고치려면 제게 이런 속성이 있단 걸 자각하고, 선입견에 상대를 끼워넣지 말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면 될까요?
평가와 판단은 가치중립적인 것이지, 그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에요. 평가와 판단이 부정적인 기운과 결부되면 내용적으로 틀리지 않더라도 관계에서 문제로 나타납니다. 나무형제가 2년 전쯤에 제출한 과제를 읽고 글을 잘쓴다고 생각했어요. 강의내용을 녹취했는데 그대로 옮겨 적지 않고 본인이 중요하다 여긴 주제를 중심으로 잘 엮었거든요. 최근에 쓴 글은 그때 글 쓴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화자의 취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요.
사람이 총기를 잃으면 듣지 않게되고, 판단과 분별이 흐려져요. 판단이 흐려지면 틀린 판단을 하게 돼요. 2년 전의 나무형제가 긴 아픔에서 막 벗어나 생명의 약동을 시작하려는 과정에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책 낸 사람 본인 말고 없죠? 일전에 어떤 청년이 우석형제 책냈다고 알은 체 하는 걸 봤어요. 주변에서 작가라고 알아주는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죠? 복잡할 거 없어요. 마음이 높아져서 일어난 일이에요. 고시공부 할 때의 나랑 변호사 되고난 후의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책을 내지 않은 나와 책을 낸 내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그래서 강의하고 책쓰는 사람들은 내 삶의 현장이 책 한권, 두권 냈을 때보다 진보가 없다면 세 번째 책을 내면 안돼요. 일상의 공허함을 메우려 책을 내서 현실과 관념의 간극이 더 벌어지는 거예요. 어딜 가든 왕년의 업적을 떠벌리는 어른들이 많아요. 젊은이들 중에도 이런 경우가 있어요. 나이에 상관없이 관념이 자기 삶에 실제적으로 뿌리내려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섬뜩할 정도로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책을 냄으로써 작으나마 사회적 상징자본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영향을 줘 마음이 높아진 거예요. 요즘들어 평가하고 조언하는 습성이 문제로 부각된 건 곁가지고, 근본적으로는 마음이 들떠서 이해력,판단력이 떨어졌을 수 있어요. 이럴 때일수록 말을 줄이고 중요한 판단은 유보하는 게 바람직해요. 본인은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기질이 있거든요. 아프고 힘든 과정을 안겪었다면 그런 기질이 더 커져있었을 거예요. 나무형제같은 사람일수록 경전에 스스로를 비춰보며 기도하는 게 중요합니다.
답변을 들은 이후 며칠간 마음이 혼란스럽고 괴로웠다. 문제를 워낙 정확히 짚어주셔서 아니라고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스스로의 마음을 자주 살펴보는 편이다. 나는 마음이 심하게 병들어 있던 사람이었고,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려 과거와 현재의 내 모습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던 때가 있다. 아픈 마음이 얼마간 나은 뒤에도 마음 살피는 일은 계속 이어갔다. 내게 자기관찰은 암환자가 완치판정을 받은 뒤에도 유지하는 식습관같은 것이었다.
여지껏 해왔던 자기관찰은 늘 혼자하는 작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비겁하거나 치졸한 내 모습을 발견하더라도 그걸 아는 건 나뿐이었다. 마을사람들과 함께 있는 곳에서 미처 몰랐던 어두운 내면을 들키니 마음이 요동쳤다. 혼자서 스스로를 볼 때보다 충격이 다섯 배는 컸다. 쥐구멍이든 책상밑이든 가리지 않고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올해 상반기에 책을 낸 후 과분한 주목과 칭찬을 받았다. 마을사람들은 마주칠 때마다 ‘작가님’이라고 불러주었고 마을책방을 운영하시는 L님은 북토크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부산의 한 주민센터에서 책과 연관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지인 중 몇몇은 책을 여러 권 구입해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읽는 내내 몇 번이나 울었다며 SNS에 감상평을 남기는 독자분도 있었다. ‘작가님’이라고 불릴때마다 손사레를 치면서도 한편으론 은근히 기뻤다.
매일같이 온라인 서점에 접속해 내 책 판매지수를 확인하고 포털사이트에 책 제목을 검색했다. 괜시리 연락도 안하던 지인에게 전화해 책 냈단 소식을 알리는 상상을 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내가 작가란 걸 알리고픈 속마음이 일었다. 누군가가 고자세로 나올 때면 ‘내가 책도 냈는데’ 하며 저항심이 일었다. 사람들이 나를 이전보다 특별하게 대해주길 바랐다. 책을 냈으니 이전보다 더 잘난 존재가 됐다고 은연중에 생각했다. 나는 이전의 삶에서 변변한 능력도, 사회적 기반도 없던 스스로를 열등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책을 낸 후에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니거든! 난 책까지 낸 수준높은 사람이거든!’
쓴 글을 혼자만 간직한 나와 그 글을 묶어 출판한 나는 정신적, 지적으로 다르지 않다. 책 냈다고 더 지혜롭거나 아량이 넓어진 것도 아니다. 책 한권이 서점에 진열된 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닌데, 마음은 왜 책을 내기 이전과 딴판이 된 것일까. 사리분별 잘하고 소신 뚜렷하던 인물들이 고위직에 오른 후 타락하는 경우를 숱하게 보았다. 일진 고등학생처럼 거들먹거리며 주변사람들을 괴롭히는 고위공직자들을 볼 때면 구역질이 일었다. 네 거만한 언행이 네 텅 빈 속을 보여주는구나. 높은 자리에 앉은 것이지, 너라는 사람이 높아진 게 아냐. 그렇게 자명한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 있지?
나도 어쩔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름대로 스스로가 소탈하고,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고, 분수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욕하던 국회의원들의 모습은 내 안에도 있었다. 스스로의 가치를 신뢰하는 자신(自信)과 스스로를 실제보다 대단하게 여기는 자만(自慢)을 구분하지 못했다. 나는 자만해지길 원해서 자만해진 게 아니었다. ‘작가님’이라 불리고 주변에서 알아주다보니 나도 모르는 새 변한 것이다. 인간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사회적 위치가 바뀌면 자기인식도 변한다. 책 한권 낸 걸로도 마음이 이렇게 들뜨는데, 도지사, 당대표, 십만유튜버, 회장님들은 오죽할까. 유명인사들 또한 거만해지고 싶어서 거만해진 게 결코 아닐 것이다. 주변에서 상전모시듯 떠받들면 스스로를 상전으로 착각하지 않기가 어렵다. 높은 자리에 앉고서 변하는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니라 한결같은 사람이 별종인 것이다. 명성과 재물을 얻은 뒤에도 변하지 않으려면 고도의 자기성찰능력이 필요하다.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람은 이름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오래된 경구에는 인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담겨 있다. 사람은 이름이 알려질수록 이전의 자신을 조금씩 잃게 된다.
이번 일로 내 안에 또아리 튼 자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5년 후, 10년 후의 나는 어떻게 됐을까? 책을 한두 권 더 내고,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고, 2쇄정도는 찍는 작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님’소리도 더 자주 듣고 운이 좋다면 지역신문에 ‘정나무의 시선’같은 글을 연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알려진 만큼 스스로가 훌륭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판매부수만큼, 인터뷰한 매체의 영향력만큼, SNS의 좋아요 개수만큼 스스로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대단치않은 유명세를 잃을까 무서워 판매부수에, 인터뷰에, SNS상의 인기에, 더욱 집착했을 것이다.
그렇게 자아가 부풀어갈수록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었을 것이다. 긴 투병생활에 지쳐 설거지를 하다 엉엉 울던 인간이 나였음을 잊을 것이다. 평생 병자로 살더라도 살게만 해달라고 간절하게 빌던 절박했던 시절을 잊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예전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주변 사람들의 크고 작은 애정으로 이날까지 생명을 이어왔음을,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불완전한 인간임을 잊을 것이다. 그리고 글쓰기의 벽에 부딪쳤을 것이다. 글은 ‘내’가 써가는 것인데, ‘나’를 잃어버렸기에 스스로도 믿지 않는 공허한 글을 쓰게 될지도 몰랐다.
마음에는 누군가가 밝은 눈으로 비춰주지 않으면 파악할 수 없는 캄캄한 공간이 있다. 아무리 보려해도 볼 수 없는 내 모습이 있다. 이번에 선생님이 짚어주지 않았다면 바람든 마음으로 오랜 시간을 살아갔을 것이다. 부끄러운 자신을 마주하는 게 아팠지만 아픔보다 감사함이 훨씬 컸다. 선생님은 조언하기 전에 내 글 수십편을 일일이 읽었고 내 일상을 유심히 관찰했다. 누군가가 나보다 더 큰 정성으로 내 인생을 살필 수 있다는 게 충격과 감동을 함께 안겨주었다. 함부로 살면 안될 것 같고, 스스로를 귀히 여겨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주변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추해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이번에 배웠다. 살다보면 남이 알아준다는 느낌에 취해 다시 건방져질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는 새 내가 경멸하던 어른들을 닮아갈지도 모른다. 일생동안 마음을 지키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일을 혼자 힘으로는 해낼 자신이 없다. 내게는 내 모습을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는, 내게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언제나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