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의 정원에는 10평 남짓한 나무원두막 <블랙하우스>가 있다. 텃밭일하러 온 사람들이 둘러 앉아 이야기나누고, 도시락을 먹고, 일하다 지치면 쉬기도 하는 곳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모르고 있겠지만 블랙하우스란 이름은 미국의 백악관을 겨냥해서 지은 것이다. 더 큰 권력과 더 많은 돈을 욕망하는 엘리트들의 공간인 백악관과 달리 주변의 이웃과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텃밭에서 생명을 가꿔가자는 뜻에서 블랙하우스라고 이름붙였다. 지금은 텃밭에 오가는 이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곳이지만 2년 전만해도 원두막이 있던 장소는 듬성듬성 잡초가 자라던 텅 빈 땅이었다.
2017년 정호상병 부부가 이사온 모래들길 2층 전셋집 앞에는 1000평, 850평 규모의 논과 밭이 놀고 있었다. 상병씨는 땅주인에게 논과 밭을 임차했다. 논에는 모를 심고 밭은 수십 구획으로 나눠 텃밭농사를 지으려는 마을 사람들에게 분양했다. 잡초만 무성하던 대지에 마을사람들이 키우는 파와 감자와 토마토가 자라났다. 아이들은 논둑과 풀밭을 지치지도 않고 뛰어다녔다.
텃밭농사 짓는 사람들이 마땅한 쉴 곳이 없는 게 안타까웠던 상병씨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원두막을 짓고 싶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임대한 땅에 굳이 품을 들여 남의 소유가 될 시설물을 짓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윤과 손실 이외의 방식으로 사안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그는 원두막을 소유하기보다 사람들이 원두막에서 밥먹고 얘기나누고 낮잠 자는 풍경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시공업체에 의뢰하면 인건비와 자재비가 못해도 천만원은 들어갈 일이었다. 돈이 없는 그는 다른 방안을 모색했다. 어디선가 안쓰는 원두막을 철거한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1.5톤 트럭을 빌려 수차례에 걸쳐 철거한 자재들을 모모의 정원으로 실어날라왔다. 본인이 직접 일한다면 인건비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젊은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많던 나는 엉겁결에 원두막 짓기의 폭풍에 휘말리게 됐다.
아무리 작은 건축물이라도 자기 손으로 지으려는 사람은 설계부터 시공까지 모든 걸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 한다. 밀림을 농지로 개간해야하는 개척민처럼 맨땅에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야 한다. 자유란 어찌보면 무섭고 막막한 것이다. 텅 빈 시공간을 맨손과 상상력으로 채워야 하는 사람은 때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것만 같은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이 공터는 어떻게든 근로시간만 채우면 월급을 받는 직장과는 다르다. 이곳에서 저절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작업은 오로지 자신이 실행한 만큼만 진전된다. 상병씨는 지붕작업을 위해 각목을 잘라 사다리까지 직접 만들어야 했다. 건축시공에 대해 따로 배운 적이 없는 그는 일하는 과정에서 변수가 생길 때마다 고민하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건축시공업을 하는 장인어른께 묻기도 하며 대처해나갔다.
우선 공사대지를 평평하게 만들어야 했다. 우리는 각삽으로 높은 곳의 흙을 깍아 낮은 곳을 매웠다. 상병씨는 땅을 평탄하게 하려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나무판때기 날로 땅을 벅벅 밀었다. 원두막을 세울 자리에 사각형 형태로 빙 둘러서 기반이 될 보루꾸 벽돌을 깔았다. 수평계로 벽돌의 수평을 확인하며 비뚤어진 부분의 높낮이를 바로잡았다. 보루꾸 벽돌 위에 목재를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널빤지는 수십개인데 기존 원두막을 분해할 때 매직으로 간략하게 표시해놨을 뿐이라 어느 자리에 어떤 널빤지가 쓰이는 지 파악하는 데 애를 먹었다. 목재 하나 깔고, 전동드릴로 구멍뚫고, 나사못 박고, 다시 목재 하나 깔고...
작업은 상병씨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상병씨는 모모의 정원에 있는 창고, 닭장과 산양우리, 생태화장실을 시설을 지어본 적이 있어서 이런 작업에 다소 익숙했다. 나는 구조물을 짓는 게 처음이고 작업공구를 다루는 게 서툴러서 그의 옆에서 작업을 거들었다. 나는 니드선으로 전기를 끌어와 전동드릴을 충전하고, 사다리 위에 있는 그에게 자재를 건네고, 때때로 직접 작업을 하기도 했다. 전동드릴로 구멍을 뚫을 때는 드릴을 잡지 않은 손으로 뒤를 받쳐줘야 한다는 것, 목재의 두께와 용도에 따라 사용하는 볼트와 너트가 다르다는 것, 절단기로 나무를 잘라낼 때는 절단기 칼날이 돌아가는 상태에서 나무를 갖다대야하다는 걸 배웠다. 목재 하나하나를 쌓고 연결해 그럴듯한 구조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고되면서도 즐거웠다.
상병샘은 논둑을 치고, 마늘밭에 생선액비를 뿌리고, 아이들을 등하교시키고, 소호 마을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청년들에게 인문학도 가르쳐야 했다. 그 와중에 원두막까지 지어야 하는 상병씨는 늘 바빴다. 거뭇거뭇하게 자란 수염과 바지 무릎팍에 묻은 흙먼지와 어중간하게 풀린 신발끈은 그의 쉴틈없는 일상을 반영하는 듯 했다. 그는 신발이든 옷이든 일주일만에 헌것처럼 추레하게 만드는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 다른 일이 하도 많아서 원두막지을 시간이 별로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게임중독에 빠진 청소년처럼 도무지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 저녁, 해가 떨어져 사위가 어둑어둑한데도 절단기를 붙들고 각목과 씨름하는 그를 본 적이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일당 15만원은 받는 인부인 줄 알았을 것이다.
원두막 공사는 몇 달에 걸쳐 천천히 이루어졌다. 내가 산양 두 마리에게 젖을 짜기 시작하고부터는 작업을 거들지 못할 때가 많아 대부분의 작업을 상병씨 혼자서 했다. 텃밭농사 지으러 오신 분들이 도와줄 때도 있었고 상병씨 혼자 작업할 때도 많았다. 바닥에서 하는 작업과 달리 사다리를 타고올라가 지붕을 설치하는 작업은 번거롭고 난이도가 높았다. 계속 고개를 쳐들고 일해야 해서 목도 아팠다. 빗물을 막기 위해 지붕위에 플라스틱 판넬을 설치하는 작업은 원두막 작업의 절정이었다. 다른 작업은 서까래 아래의 사다리에서 할 수 있었지만 판넬을 각목에 고정시키려면 지붕위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상병씨는 73kg의 통통한 몸을 이끌고 지붕위로 올라갔다. 전쟁터에서 포복자세로 기어가는 군인처럼 지붕에 납작 엎드려 피스를 하나하나 박아나갔다. 변변한 보호장구 하나 없어서 떨어지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자기것도 아닌 원두막을, 돈 한푼 되지 않는 원두막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지어가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나중에 들어보니 상병씨는 지붕에 올라가기전에 작업을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한다.
상병씨는 그날따라 유독 바빴다. 농업기술센터에서 트랙터를 빌려와 천평 논을 갈아놓아야 했고, 소호마을 청년들에게 논농사에 대해 알려줘야 했고, 원두막 바닥에 널빤지도 깔아야 했다. 트랙터 대여비용이 하루 13만원이라 저녁에 꼭 반납해야해서 해떠있는 동안 작업을 마무리하려면 시간이 얼마 없었다. 닭장에 뚫린 구멍을 노끈으로 보수하고 있을 때 저 멀리 논에서 누군가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논에 가서 살펴보니 볏짚을 가져다쓰는 문제로 상병씨와 은아씨가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원두막 작업을 하는 상병씨는 그날따라 표정이 어둡고, 초췌하고, 정신도 없어 보였다. 하루안에 너무 많은 일을 해야한다는 중압감에 사람들과의 갈등까지 겹쳐 과부하가 걸린 것 같았다. ‘상병씨는 언제나 중심을 잘 잡은 채로 맡은 일을 척척 해나가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사람도 흔들릴 때가 있구나. 안되겠다, 나라도 정신 차리자. 상병씨는 늘 애쓰고 있었으니까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정신 바싹 차리고 부담을 덜어줘야지.’
나는 상병씨에게 원두막 마루 작업은 내가 할테니 걱정말고 딴 일을 보라고 했다. 나는 소호청년 태광씨와 함께 평행을 맞춰가며 마루널빤지를 깔고 볼트를 박았다. 일머리 좋은 소호청년 민준씨는 상병씨에게 잠깐 조작법을 배우더니 금새 트랙터 운전에 능숙해졌다. 육중한 트랙터를 거침없이 밀고다니며 오후 4시도 되기 전에 논을 다 갈아버렸다. 상병씨는 우리들 덕에 일이 수월히 풀렸다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늘 믿음직하고 안정적으로 보이던 상병씨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인생 대부분을 직업이 없는채로 보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서른을 훌쩍 넘겨서까지 부모님집에 얹혀 살았다. 투병생활중이라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사실 건강했더라도 취업 할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사회에서 서른 넘은 사람이 직업없이 살아간다는 건 이마에 죄수낙인을 찍고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그가 아무리 성실하고 사려깊다해도 직업이 없다면 평균에 못미치는 열등한 인간에 불과하다.
서른을 넘긴 무직자는 은행창구에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출근하는 아버지의 눈빛에서 그가 비정상이며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걸 시시각각으로 확인하게 된다. 동호회에 나가면 ‘나이가 서른인데 직장이 없어요?’란 말을 듣는다.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가면 ‘나이도 있는 것 같은데 제대로 된 직장에 다녀야지?’란 인생훈수를 듣는다. 세상에는 모든 사람이 일반적인 경로를 따라 살 수 없다는 걸, 저마다 복잡한 사정을 떠안고 살아간단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내 인생을 함부로 평가한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했던 게 단순히 그들 탓만은 아니었다. 그런 말을 듣기 전부터 이미 나는 직장 없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나는 사회적 지위와 재산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세태가 지나치게 폭력적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뒤틀린 가치기준을 깊숙이 내면화하고 있었다.
사람은 구체적인 활동을 통해 존재감을 획득한다. 취업할 수 없었던 나는 무언가를 해볼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당시의 내가 스스로를 쓸모있는 사람으로 여길 수 없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아픈동안 동네를 하릴없이 걷다보면 이따금씩 나처럼 남루한 옷차림에 한 손에는 늘 판타지 소설책을 들고 다니는 삼십대 중반의 사내 한명과 스쳐 지나갈 때가 있었다. 낯빛이 유난히 어두웠던 그를 투병기간동안 거리에서, 구립도서관에서, 전철 안에서 열 번 넘게 마주쳤다. 그의 존재가 눈에 띠었던 건 그에게서 나와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도 얘기나눠본 적은 없지만 그 또한 나와 비슷한 열패감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또한 내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도시는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를 양산한다. 내가 살던 도시에는 나처럼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서 하루하루 숨만 쉬며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수만명은 있었을 것이다.
마을에 이사온 뒤에도 뚜렷한 직장이 없는 건 여전했지만 할 일은 언제나 넘쳤다. 감자밭에는 언제나 뽑아야 할 잡초들이 무럭무럭 자랐다. 상병씨의 찌그러진 프라이드 승용차를 타고 정미소에 가서 닭장 바닥에 깔 쌀겨를 얻어왔다. 토종닭이 낳은 작은 달걀을 가져다 집들이 온 친구들에게 삶아주었다. 야생딸기에 설탕을 넣고 끌여 딸기콩포트를 만들었다. 사람들과 점심으로 미역국 라면을 끓여먹으며 그 오묘한 맛을 품평했다. 우리를 탈출해 텃밭작물을 뜯어먹는 꽃순이를 ‘이쇄끼마! 죽을라고!’ 혼내며 다시 집어넣었다. 산양우리 중간에 울타리를 설치하고 공구리를 쳤다. 하루종일 작업을 하고 밤 11시까지 다음날 청년들과 공부할 <도올의 논술과 철학이야기>를 읽었다. 해도해도 끝날 것 같지 않은 원두막 작업은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니드선으로 전기를 끌어오고 각목을 자르고 피스를 박아넣고 상병샘이 올라간 사다리를 붙잡고 있고, 구멍 세 개 난 커다란 보루꾸 벽돌을 실어나르고, 상상력이 풍부하단 말을 듣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졸고, 깔깔대고, 빈둥거리고, 피곤해하고, 고민하면서 나는 조금씩 스스로를 쓸모있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게 된 것 같다. 마을에 이사와 몇 달을 복작복작 보내는 동안 나도 모르는 새 투병과 경쟁에 지쳤던 심신이 천천히 치유돼간 것 같다. 사람이 자신의 생명력을 되살리는 데 거창한 일은 필요치 않다. 내가 심고 토닥여준 조그마한 완두콩알이 싹을 튀워내는 걸 보면서, 하나씩 쌓아간 널빤지가 원두막의 꼴을 갖춰가는 걸 보면서 나는 내 안에 뭔가를 이룰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알아간 것 같다.
이 마을은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갈망이 내가 살아왔던 곳보다 훨씬 덜했다. 이곳에선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곳에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지 않아도, 월수입이 80만원이 안돼도 낙오자가 아니었다. 내가 오기 전에 이미 마을에는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정과 지지를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나 혼자였다면 산양유 배달하며 최저임금에 못미치는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삶을 긍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니 나이가 몇인데...’, ‘직장이 어디세요?’란 말에 흔들렸을 것이다. 내부의 생명력을 꽃피우려면 남의 시선이 아니라 마음의 소리에 따라 살아야 된다. 백범 김구 선생처럼 의지가 강하다면 남이 뭐라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겠지만 사회에 섞여 살면서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내 존재와 삶의 방식을 스스럼없이 인정하는 사람들 덕택에 내 쪼대로 살면서도 불안에 떨지 않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