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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이 Feb 26. 2019

할머니의 플립턴

어쩌다,수영

플립턴,www.alacartespirit.com


내가 자유수영을 하는 시간대에 독특한 할머니 두 분이 계신다. 70대로 보이는 할머니 두분은 가장 한가한 레인에서 늘 사이좋게 수영을 하시는데 할머니들의 수영 패턴에 정말 재미있는구석이 있다.

몸이 유난히 피곤했던 어느날은 '(할머니 두분만 계시니)쫒기지 말고 좀 천천히 돌아야지'하는 마음으로 그 할머니들 레인으로 들어섰다. 나를 보더니 할머니 중 한 분이 말씀하셨다.


"아휴, 우리는 늙어서..먼저 출발해"


레인 끝에서 할머니들이 오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헛것을 본건지 물안경에 습기가 찬 건 아닌지 확인해야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이분들 보통분들이 아니시네. 역시 나는 오늘도 레인을 잘못 찾아왔구나...


할머니 두분이 무호흡 자유형으로, 마치 단거리 스프린터처럼 전속력으로 헤엄쳐 오시는게 아닌가!! 두분이 사이좋게 앞서거니 뒷서거니 순서를 바꾸시기도 하고, 어떨때는 호흡이 딸리시는지 25m를 채 못 채우고 깃발 아래즈음 멈추시기도 했지만 그 전속력 질주를 멈추지 않으셨다. 자유형 대쉬 다음은 무호흡 접영이었다. 스트록 4번에 호흡 한번, 아무래도 관절이나 근력이 젊은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보니 선수들같은 완벽한 자세는 아니었지만 접영으로 도는 내내 할머니들의 자세는 단 한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다음날은 플립턴이었다. 실내 수영장 자유수영 때는 아무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픈턴을 하는데, 사실 그 오픈턴도 정확한 자세로 하는 사람을 거의 본적이 없었다. 수영 대회에 나온 것도 아니고, 북적거리는 레인에서의 안전 문제도 있고 무한 자유형 뺑뺑이 돌기를 위해서는 그저 슬쩍 벽을 잡고 방향을 바꾸면 그만이 아닌가. 그런데 할머니들은 마치 대회 출전한 수영선수들처럼 물속에서 앞구르기를 해서 턴을 하는 플립턴을 연습하고 계셨다. 자유형으로 가셨다가 벽 앞에서 돌고래처럼 앞구르기, 그리고 벽 차기, 그리고 유선형 자세를 유지하며 다시 되돌아오기, 타이밍이 안맞아 벽을 차는 발이 삐끗한건지, 아니면 코에 물이 잔뜩 들어가신건지 중간에 멋쩍은 듯 배시시 웃으며 서실 때도 있었지만 할머니들의 플립턴 연습은 한 번, 두 번, 그리고 열번 넘게 계속 이어졌다.


수영을 하다보면 가끔 '할머니들의 해파리 수영'이라거나, '할머니들의 관광지 수영'이라는 말을 듣곤 했는데, 두 분 할머니는 마치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성실하게, 그리고 정말로 진지하게 자신들만의 프로그램을 연습하고 계셨다. 연습하는 그 자세만 본다면 내가 지금 70대 할머니들의 수영을 보는건지, 2020년 도쿄올림픽 유망주의 훈련을 보는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대한민국 수영장은 곧 할머니들이 지배하는 세계다. 60넘은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게 등산, 요가, 걷기, 수영 등 지극히 제한적인데다 관절염, 오십견, 디스크, 나 같은 암환자가 할 수 없는 운동을 제외하고 나면 남는건 수영 뿐이다. '수영은 할머니들이 하는 운동'이라거나 '어느 수영장은 할머니들 텃세가 심하다더라'하는 얘기들이 그냥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탈의실 할머니들의 대화를 조금만 엿들어보면 수영장은 할머니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넘어 할머니들 인생의 우주라는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


남편 뒷바라지, 자식 뒷바라지 하느라 꽃다운 나이에는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고. 그래서 온몸의 관절이 아파오고, 디스크가 터지고, 암수술을 마친 이후에야 내 몸을 챙기자고 찾은 곳이 수영장 물속이었다고. 젊었을 때는 일만 하느라, 아니면 밥짓고 빨래만 하느라 친구도 없었다고. 그래서 환갑 지나, 칠순넘어 찾은 수영장 친구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머리는 백발에 피부는 다 늘어졌지만 꽃분홍색, 노란 무늬 수영복이라도 화사하게 입고 싶다고. 매일 접영과 플립턴을 연습하고, 무호흡으로 죽을힘을 다해 자유형을 해보는 이유는 나이 70에도 새로 뭔가를 해볼 수 있다는 가슴벅참을 느껴보고 싶어서라고. 수영장에서는 그래서 나이를 잊게 된다고. 나이들어 일찍 눈뜨는 새벽, 다섯시 사십오분 수영장 문앞에서 '안녕!'하고 같은 반 사람들과 인사할 때 할머니들 얼굴은, 그래서 아주 잠시나마 등굣길 여고생들의 얼굴로 바뀌나보다.

 

할머니들의 플립턴을 보고있다보니 내가 왜 물속으로, 수영장으로 도망쳐왔는지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았다. 사실은 엄마도 존재하고 싶어. 매일 식탁에 묻은 이유식 자국을 닦고 젖병을 씻는 동안 너는 그렇게 어린 나무처럼 푸르게 자라나고 엄마는 매일을 지워나가듯 사는게 때론 숨이 막혀왔어. 막다른 골목에서 암이 위협해 와도 내가 물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방향을 틀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어. 이기적인 나는 서른하고도 일곱에 수영장으로 도망쳤지만 할머니들은 그 도피처를 미련하게도 예순에, 그리고 일흔에서야 발견했던 것이다.


언젠가 또 자유수영에서 마주치는 날 할머니 두분이 멋지게 플립턴을 하셨으면 좋겠다. 젊은 우리들보다 수영도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예쁘게 하셨으면 좋겠다. 적어도 내가 수영을 하는 하는 동안엔 할머니들처럼 성실하고 진지하게, 오늘이 내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 처럼 수영하고싶다.


 

플립턴, www.velo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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