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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이 Mar 03. 2019

님아, 그 '킥판'을 놓지 마오

어쩌다, 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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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을 배운다고 말하면 열에 아홉 사람들의 관심사는 '언제쯤 킥판 떼고 자유형 해요?'다.

"저 요즘도 킥판잡고 하는데요"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의 안타까운 표정이 뒤따른다.

'아니 수영을 배운다한게 언젠데.. 몸친가? 아직도 킥판을 잡고하다니'


우다다다 발차기를 하면서 음~파! 음~파! 정말이지 생존을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한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초급반식 수영의 동반자. 옆레인 중급반의 뺑뺑이가 일으키는 거친 파도에 가랑잎처럼 마구 흔들리는 몸을 지탱해주는 동아줄. 바로 킥판이다. 킥판을 손으로 꼬옥 쥐고 계란 초밥인양, 거북이 등딱지인양 몸을 띄워주는 '헬퍼'까지 허리에 차고 나면 초보 수영인의 몰골이 더욱 숙연해진다. 그래서 초급반 안에서도 남들보다 빨리 스스로의 추진력으로 자유형을 하는 사람은 수능만점자가 받을법한 경외의 시선을 받으며 초급반의 에이스로 등극하고 마는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 영법을 모두 익히고 자유형 팔꺾이와 글라이딩을 한창 교정하던 어느 날이었다. 보헤미안처럼 자유로운 내 자유형 한바퀴를 본 록쌤은 고개를 절레절레 하더니 "회원님 오늘부터 자유형은 무조건 킥판 잡고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내가 이 킥판을 내려놓고 두손 두발로 스스로 헤엄치기 까지 얼마나 연습했는데. 초급반처럼 다시 킥판, 아니 킥판이라니요. 록쌤은 이런 내 마음을 간파한 듯 "앞으로 자유수영 때는 무조건 킥판 잡고 발차기 열바퀴, 킥판 잡고 자유형 열바퀴하시고 그런 다음에 다른 것 연습하세요"라고 못을 박았다.


록쌤이 고개를 절레절레 한 이유는 수영하면서 내 다리가 가라앉기 때문이었다. 수영은 누가 물의 저항을 덜 받아 남들보다 더 빠르게 앞으로 나가는가  겨루는 경기다. 그런데 하체가 가라앉으니 기울어진 상태에서 온몸으로 저항을 받으며 남들보다 더 힘겹게 더 느리게 수영하고 있는 꼴이었다. 가라앉는 발차기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다시 킥판에 의지한 채 코어에 힘을 주고 몸을 유선형으로 띄우는 것이 과제였다. 록쌤의 마지막 말이 내 귀를 때렸다.


"아마추어가 킥판잡고 하는게 뭐 어때서요. 회원님 인생에서 앞으로 킥판 안잡고 수영할 날이 더 많아요."





영국일간지 가디언의 편집장인 앨런 러스브리저가 쇼팽의 발라드를 연습하는 과정을 쓴 '다시 피아노(PLAY IT, AGAIN)'를 읽으면 배나온 중년 아저씨가 킥판을 잡고 수영을 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나이 오십 넘어 피아노 중에서도, 그리고 쇼팽 중에서도 그 어렵다는 쇼팽의 발라드 1번을 1년 간 좌충우돌 연습하는 과정을 쓴 책이다.


앨런 러스브리저, <다시, 피아노>


수영인의 언어로 말하자면 어릴 때 엄마손에 이끌려 수영을 배웠던 아저씨가 나이들어 다시 킥판잡고 접.배.평.자를 시작하는 셈이다. 오랜만에 수영을 시작한 아저씨의 투박한 영법이 점차 세련되게, 심지어 기록을 단축해 나가는 과정까지 그려져 피아노 문외한이라도 그 아마추어스러운 매력에 흠뻑 빠지게 하는 사랑스러운 책이다.


영국 주요 신문의 편집국장, 그것도 위키리크스 같은 굵직한 특종을 터뜨리고 회사의 온라인 전략을 이끄느라 눈코뜰새없이 바쁜 그에게 쇼팽의 발라드 연습은 일종의 탈출구였다. 바쁘고 바쁜 시간을 쪼개 집 근처에서 단 20분이라도 피아노 레슨을 해줄 선생님을 구하고, 직업의 이점을 십분 활용해 머레이 페라이어 같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들에게 조언을 구하면서도 천재 소녀 피아니스트의 쇼팽 연주 동영상을 트위터로 확인하며 좌절하는 지난한 그의 여정을 보고 있노라면 '가디언 국장이 피아노때문에 정신이 나갔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왜 그렇게 쇼팽 연습에 매달리는지 이해가 된다.


심지어 이 귀여운 아저씨는 연습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마다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를 위한 책까지 찾아 읽으며 위로도 받는다.


연주를 대함에 있어 대부분의 프로페셔널보다 아마추어인 당신의 처지가 더 낫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아마추어에게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해야 한다는 엄혹한 멍에가 없다. 부담감과 책임감에 짓눌릴 일도 없고, 치열한 경쟁도 없다. 공연장의 형편, 음향 상태나 본인의 정신 상태와 무관하게 끊임없이 청중을 상대야하 하는 입장도 아니다. 아마추어는 모든 취미가 본래 그렇듯 좋아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다. <재미삼아 피아노 치기, 찰스 쿡>


그는 그 자체로 전설적 언론인이지만 피아노 레슨이라는 '킥판'을 잡지 않았다면 그의 커리어에 드러나는 눈부신 성취도 없었을 것이다. 그나 우리나 모두 킥판을 금지당한 프로페셔널의 세계에서 표류하고 있으니까.


사소한 실수에도 비수처럼 꽂히는 'ㅇㅇ씨, 그렇게 안봤는데 사람이 참 허술하네'라는 말이나 급성 장염으로 오분 늦은 미팅자리에서 상사가 보내는 찌릿찌릿한 눈총의 세계에서 우리는 숨이 막힐때마다 계단실에 숨어서 심호흡하거나 회사 화장실에서 눈물 흘리며 살고있지는 않은가. 이 세계에서 우리가 금지당한게 어디 킥판 뿐인가. 냉혹한 프로페셔널의 세계에서는 자유형을 할 때 발이 나처럼 허술하게 잠겨서도, 옆 레인보다 늦어서도 안된다. 승부는 0.01초로 갈린다.


쇼팽이든, 수영이든, 캘리그라피든, 드럼이든 모두 퇴근길 각자의 탈출구에서 실컷 딴짓을 한 뒤에야 다음날 다시 차가운 프로페셔널의 세계로 뛰어들 힘이 생긴다. 편집국장과 배우, 운동선수, 택시운전사, 정치인이 함께 저마다 피아노 얘기를 하며 신나게 수다를 떨듯, 수영장에서 처음 만난 할머니와 젊은 총각, 아기 엄마가 각자의 접영 훈련법을 공유하듯 말이다. 아마추어에게만 허용되는 미숙함과 격려, 그리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 순수한 열정으로 우리는 내일의 지옥철을 견딜 수 있다. 그러니 '킥판'은 초보 수영인 뿐 아니라 프로페셔널의 세계에서 질식해버릴것 같은 우리 모두의 산소호흡기 같은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마추어들이여, 이 숨막히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부디 각자의 킥판을 사수하기를. 수영 강사의 한숨과 지적을 즐기자. '핑거링이 미숙하네요'라는 천재 피아니스트의 조언에 감사하자. 그리고 마침내 킥판없이 스타트대에 서고, 단독 조명이 비추는 피아노 앞에 앉는 희열의 그날을 기다려보자.



여전히 어디선가 허우적대는 나같은 아마추어들에게 '다시, 피아노'의 서문이자, 내가 읽자마자 주저없이 밑줄을 친 이 문장을 바친다.


음악을 하면 친구가 생길거라시며

피아노 연습을 강요하신,

돌아가신 어머니 바바라 러스브리저께 바칩니다.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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