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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이 Dec 30. 2019

"엄마가 날아요!"

어쩌다, 수영


수영에는 본질적인 선, 말하자면 리드미컬한 음악 활동이 내재한다. 그리고 수영에는 부유, 즉 우리는 떠받치고 감싸는 걸쭉하고 투명한 매질 속에 떠 있는 상태가 주는 경이로움이 있다. 수영쟁이는 물속에서 움직이기도 하고 물과 함께 놀 수도 있는데, 공기 중에서는 그와 비슷한 활동을 할 수가 없다.   
<올리버 색스, '모든 것은 그 자리에'>    


록쌤이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 거의 반년 만에 들어보는 칭찬이다. 한동안 진도를 나가지 못한 배영이 한창인데 배영 발차기를 하는 내내 전에 없던 감탄사를 연발하시는 게 아닌가. 오늘은 또 무슨 고강도 프로그램을 준비하셨길래 그러실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도 잠시, 마음이 순간 우쭐해진다. 그저 가라앉을까 봐 끊임없이 발차기를 하는 것뿐인데 나이 서른 후반을 앞두고 쉬지 않고 발을 찬 다는 것 만으로 받는 칭찬이라니!


"어디서 따로 몰래 강습받으세요? 우와 배영 발차기 너무 좋은데요? 회원님이 꼬마였을 때 저한테 오셨다면 배영을 시켰을 것 같아요."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는데 그건 개인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리라. 내가 꼬마였을 때 수영을 배웠다면, 그래서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그래서 암이나 디스크 같은 건 겪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나만의 비법처럼 수영을 오래오래 해 올 수 있었을까. 지금보다 조금 덜 우스운 접영을 할 수 있었을까.





돌 전부터 엄마의 오리발과 수영모자를 신나게 갖고 놀았던 딸은 말을 배우며 이따금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엄마 음~파!음~파!하는거 거 볼래!'한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흑역사를 담은 수영 모습이지만 이 두 돌을 갓 지난 아기는 케이티 러데키나 마이클 펠프스가 하는 자유형을 본 적이 없으니 내가 엉망진창 수영을 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마음 놓고 보여주곤 한다. 언젠가 동생이 호텔 수영장에서 내가 턴 하는 모습을 물속에서 찍어 준 적이 있는데 아기 눈에는 그게 꽤나 신기했던 모양이다. 아기는 연신 헤헤 웃으며 외친다.


"우와! 엄마가 새처럼 날아!"


화면 속 나는 정말로 날고 있었다. 영화 속 히어로라도 된 듯 양 팔을 쭉 펴 귀 옆에 단단히 붙인 채 방향을 바꾼다. 아기는 물속에서 헤엄치는 사람을 본 일이 없으니 그게 마치 나는 모습 같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수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이유가 있다. 물소리가 좋아서, 물속에 들어가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서, 핸드폰과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운동이라서,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라서, 수영장이 가까워서 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나에게 왜 수영을 하냐고 이유를 묻는다면 '처음부터 배울 수 있어서'라고 답하겠다.


수영을 배우며 록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어른들이나 부끄러워하지 애들은 다 이렇게 배워요!"였다. 록쌤이 접영 출수 킥이 약한 나를 물 밖으로 꺼내 힘껏 던져버릴 때나, 수업의 절반을 데크에 엎드린 채 푸짐한 하반신을 수영장 사람들에게 한껏 드러내며 평영 발차기를 연습할 때도 그랬다. 직장에서는 뭐든 능숙한 척, 익숙한 척 연기해야 한다고 배웠다. 사회 초년병 때 누군가 나에게 그런 조언을 했다. 직장생활의 팔 할은 '기세'라고. 자신감이 없는 모습을 보인다면 정말 그런 사람이 될 거라고.


그런데 뭍에서 사는 사람이 물에서 움직이는 법을 배운다는 건 아이가 걸음마를 하거나 외국어를 배우는 일과 같았다. 배우는 과정 내내 실수와 시행착오 투성이다. 물은 속 깊은 동료와 같아서 '척'하는 잔재주를 이내 알아챘다. 오히려 겸허한 마음으로 걸음마부터 배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더 빨리 곁을 내줬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라면 언제나 기꺼이 물 속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허락했다.


나에게 왜 수영을 하냐고 또 다시 이유를 묻는다면  '물이 지탱해 주기 때문에'라고 답하겠다.


사람들이 수영장으로 향하는 이유는 그곳에 물이 있어서다. 접영 할 때 만세를 부르든 말든, 봉산탈춤 추듯 배영을 하든 말든 물은 나만 겸손하다면 내 우스운 실력은 눈감아주며 오롯이 나를 떠받쳐준다. 배영을 할 때면 이 못난 허리디스크 환자가 누워서라도 전진할 수 있도록, '넌 할 줄 아는 게 발차기뿐이지? 그거라도 마음껏 하렴'이라고 하듯 든든하게 등을 받친다. 육지에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이 중력을 누군가 나 대신 나눠 짊어져 넉넉한 품 안에서 마음껏 뒹구는 느낌이다. 수영을 하다 보면 당장이라도 숨을 죄어 오듯 무섭던 물이 든든해지는 시기는 분명히 온다.  


이런저런 일을 겪고 난 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을 때 비로소 내 삶의 중력을 나눠 짊어진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수영할 시간을 기꺼이 챙겨주는 가족, 늘 내 건강과 안부를 염려해주는 친구들, 뭐든 할 수 있다고 지지해주는 동료들. 나를 환자가 아니라 유망주로 여겨 태릉식 고강도 프로그램을 마다하지 않는 수영 선생님까지.


나는 늘 혼자 수영장으로 향했지만 단 한 번도 외롭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곳에 물이 있어서, 그리고 기꺼이 나를 그곳으로 보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물속에서라도 나는 날 수 있었다.




커버 이미지: Kevin Franc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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