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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이 Apr 01. 2020

조코비치는 후라이팬을 꺼냈다

어쩌다,수영

속는 셈 치고 매일 기계처럼 수영장으로 향하다 보면 거짓말처럼 수영이 잘 되는 날이 있다. 그 주는 운 좋게도 내내 그랬다. 물속에서 내가 붕어인지 붕어가 나인지 모를 호접몽, 아니 '호붕몽'을 체험할 때가 있는데 그날은 붕어신이 내린 것 마냥 머릿속으로 굳이 몇 바퀴를 돌았는지 셀 필요 없이 레인을 돌고 또 돌 수 있었다.  공복으로 수영을 할 때는 정말로 몸이 물수제비를 뜨는 날렵한 조약돌처럼 느껴진다. 그런 때는 운동량을 충분히 채울 뿐 아니라 운동의 내용도 알차서 자유형 교정 드릴, 물잡기 연습, 접영 킥 연습에 물속에서 수영장 데크를 잡고 팔과 코어의 힘으로 올라오는 풀 푸쉬 업까지 뭐든 양껏 연습하고 수영장을 나선다. 연습은 언제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록쌤이 자유형을 한 바퀴 시켜보더니 이전보다 자세가 많이 좋아졌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라고 쓴다면 누군가는 우울한데다 재미까지 없는 만우절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분명 사실이다. 올해 설 연휴 무렵 연습이 유난히 잘 되던 날 잊지 않으려고 적어둔 기록인데 다시 꺼내보니 마치 만우절 거짓말 같다.


수영인들에게 2,3월은 잔인한 달. 그리고 4월도 여전히 잔인한 달. 어떤 사건들은 책상 가운데 큰 선을 그은 것 마냥 기어이 흔적을 남기고야 마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는 여전히 일상을 가로지르며 깊고 굵게 패인 흔적을 남기는 중이다. 전국의 수영장은 대부분 폐쇄됐고 불과 한두 달 남짓 된 수영 연습이 무척이나 오래된 과거의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10년 넘게 묵묵하고 미련 맞게 회사일을 해내는 동료 W는 희망하던 새 부서로 옮긴 뒤로 저녁마다 규칙적으로 하던 운동도 미룰 정도로 적응에 열심이었다. 인사이동 이후 드디어 두어 달이 지나 이제야 비로소 짬을 내 운동 습관을 잡아가던 그를 좌절시킨 건 상사도, 부상도, 바쁜 업무도 아닌 코로나바이러스였다. 그가 다니는 헬스장과 수영장이 문을 닫았다. 이번 주에는 주말 저녁부터 시작된 인후통으로 급기야 1339에 전화를 건 뒤 차를 끌고 선별 진료소로 향했다. 검사 후 지난주 한 번이라도 접촉한 적이 있는 지인들에게 '불안하게 해 미안하다. 검사 결과를 바로 전달하겠다'는 단체 메시지를 남긴 뒤 집에서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다행히 그날 오후 '음성'이라는 메시지를 받아 들었지만 그 메시지를 받기 전까지 그는 길고 긴 반나절을 보내야 했다.


'일상'이라는 건 확진 문자 하나에 툭 끊어질 수 있는 가느다란 실오라기 같은 존재였다.  살다 살다 '아휴, 접영킥 언제까지 이렇게 무릎으로 차실 거에요?'라거나 '왼쪽 팔은 계속 깁스한 것 처럼 돌리는데, 알고 있어요?' 시무룩하게 만드는 록쌤의 독설이 그리워지는 날이 올 줄이야. 마스크를 살 수 있는 요일은 언제인지, 마트가 가장 덜 붐비는 시간은 언제인지, 몸이 으슬으슬한데 과연 출근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대신 이불 속에서 오늘은 수영을 갈까 말까 망설이던 그 시간이 사무치게 그립다.


당장 눈앞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도무지 웃을 일이 없는 요즘이지만 테니스 선수 노박 조코비치가 후라이팬을 꺼내 든 동영상에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집안에서 후라이팬으로 공을 주고받는 그와 동생 사이에는 가구들이 네트처럼 놓여있었다.


그래서 나도 창고에 처박혀있던 스트레치 코드를 꺼냈다.


치킨을 먹으며 더 이상 이렇게는 살지 말자 몇 달 전 결연히 결제한 스트레치 코드. 수영장에 참으로 요란스럽게도 그걸 들고 나타나자 록쌤은 "진짜 하시게요?"라고 말했지만 눈빛은 사실 '얼마나 열심히 하나 보자' 였더랬지. 록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집에서 열심히 당기고 있는 거 맞아요?"라고 물을 때마다 어물쩡 넘어갔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이제 드디어 스트레치 코드가 빛을 발할 때가 온 것이다! 조코비치에게 라켓 대신 후라이팬이 있다면 우리에겐 수영장 대신 스트레치 코드가 있다.


일상이란 실오라기처럼 유약하기 짝이 없으면서 또 어마어마한 복원력을 지닌 스트레치 코드와 같은 것. 당장 눈앞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언제나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해왔다. 도처에 불확실성이 버티고 있지만 여전히 밥을 짓고 일을 하고 수시로 사랑하는 이들의 안녕을 확인한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꽃도 본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이것 뿐이다. 그래서 노를 저어 이 혼돈을 헤쳐나가듯 열심히 코드라도 당겨보려 한다. 후라이팬 위 통통 튀는 공처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창 밖에서 까르르 까르르 터질 때까지.





커버 이미지: Swimming Science: Optimizing Training and Performance by  G. John Mu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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