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9일 순례길 15일 차, 카스트로헤리츠에서 프로미스타
2023년 9월 19일 Camino de Santiago Day 15
Castrojeriz - Fromista : 25.28 km
출발 06:35/ 도착 12:35 , 총 6시간 걸림
동트는 게 이렇게 예쁘긴 처음이야
오늘은 시작하자마자 바위산이다. 어두운 아침부터 자갈돌밭인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비록 주위는 깜깜해도 자갈길을 오르는 자박자박 신발 소리가 앞에서도 뒤에서도 나는 게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 준다. 의외로 사람들이 일찍 하루를 시작한단 말이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한 시간 정도를 걸어 올라가니 정상인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는데 오늘은 통트는 모습이 너무 예뻐 그냥 자리를 틀고 앉아 해가 다 뜰 때까지 있고 싶다. 늘 평지에서 지켜보던 것과 달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비현실적이게 몽환적이다. 한 커플이 앉아서 동트는 모습을 보며 아침을 먹는데 부럽다. 나도 이런 뷰가 존재하는 걸 미리 알았다면 어제 샌드위치라도 하나 사둘걸. 감탄 나오는 카스트로헤리츠 마을을 넋 놓고 보다가 안 떨어지는 발을 재촉해 본다. 다음을 위해 꼭 기억해야지!! 카스트로헤리츠에서 출발해 1시간 지점의 정상에서 동트는 걸 보며 아침 먹기! 커피믹스 한잔에 삶은 달걀 한 개라도 좋으니 이 뷰를 예약한 사람처럼 앉아서 실컷 즐기리라!
20 km와 25 km의 차이
으아~ 어제와 겨우 5 km 차이인데 오늘 25 km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마지막엔 발바닥이 슬슬 뜨거워지며 조금씩 아파왔다. 아침에는 안갯속에서 한참을 걸어서 살짝 춥다 느낄 정도였는데 오전 10시 넘어서는 해가 쨍쨍한 게 덥기도 하고 길바닥에서 열이 올라오는 느낌마저 든다. 20 km는 노래를 부르면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데 25 km 정도를 걸으면 갑자기 힘들어진다. 다시 걸으면 모든 구간을 23km쯤으로 잡아 35일을 걸으면 딱 좋을 것 같다. 아주 미미한 게 '할만하다 VS 힘들다' 그 느낌을 좌지우지하는 게 2-3 km 더 걷고 덜 걷고의 차이 같다.
오늘은 중간 지점에서 아주 오랜만에 호주에서 오신 아주머니를 만나 너무 반가웠다. 아주머니의 속도에 맞춰드리며 30분 정도 함께 이야기 나누며 걷다가 아주머니가 먼저 가라고 배려해 주셔서 다시 열심히 내 속도로 걸어왔다. 이렇게 다시 못 보는 게 아닌가 싶었던 사람들도 며칠 지나 만날 수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참 재미있다. 호주 아주머니는 길에서 만나 같이 걷던 다른 아주머니와 멀어져 자연스레 혼자 걷고 계셨는데 정말 산티아고 순례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걷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쭉 혼자 걷는 것도 아닌 묘한 길이다. 길이 나에게 우연하게 주는 동행과 함께하기도, 내가 선택해 혼자 나만의 사색의 시간을 갖기도 하며 매일 다르게 경험하는 길이라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물론 같이 걷건 혼자 걷건 모든 건 내가 선택하는 거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순례길 위에선 우리 모두가 그 어느 때보다 큰 자유 의지를 가진 독립체다. 그 사실이 굉장히 행복하고 나 자신이 강하게 느껴진다.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러 노란 벽돌길을 따라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보면 참 신기한 경험도 한다. 오늘은 해가 뜨고 나서도 한참을 안갯속에서 걸었다. 보통 안개는 해 뜨면 없어지는 거 아니야? 구름이 하늘을 잔뜩 가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새벽에 시작해서 오전 10시가 될 때까지 서너 시간을 안갯속에서 걷는데 이게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싶을 정도로 몽환적이었다. 오른쪽 왼쪽 끝없는 노란 해바라기 밭과 짙은 안갯속의 순례자들. 앞에 걸어가는 사람들이 조금 뒤엔 안갯속으로 없어진다. 마치 안개가 사람들을 삼키는 것 같다. 오즈의 마법사의 노란 벽돌길을 연상시키는 이 풍경이 재밌다. 우리 모두가 노란 벽돌길을 따라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 각자의 소원을 이루러 가는 모험의 길 위에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이루고 싶은 소원은 무얼까? 아직 안갯길이 한참 더 남아보이니 걸으면서 생각을 해봐야겠다.
올해 스페인의 여름이 가뭄에 폭염이었기에 그런지 몰라도 해바라기들이 하나같이 자라다가 만듯해 보인다. 이 꽃들이 잘 자라서 만개했었다면 그 풍경은 또 어떠했을까 궁금해진다. 지금은 시들었어도 나보다 더 더운 6월, 7월, 8월에 이 길을 땀 흘리며 걸었을 순례자들에겐 힘이 되었을 활짝 핀 예쁜 풍경이었길 바란다.
오늘은 성당뷰 숙소
드디어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에 도착해 방에 들어가니 큰 창으로 햇볕이 쫙 드는 게 밝아서 좋다. 커튼을 치려고 다가가니 이글레시아 데 산 페드로 성당이 눈앞에 한가득 들어온다. 와! 예상 못 했던 멋진 뷰에 기습공격을 당했다. 기분 좋은 서프라이즈가 아닐 수 없었다. 오늘의 숙박비는 60유로로 8만 5천 원, 지금까지는 가장 비싸게 주고 묵는 곳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길어질수록,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개인실의 중요성의 더 크게 느껴진다. 다시 산티아고를 온다면 상징적인 론세스바예스의 공립 알베르게를 제외하고는 100% 개인실로 예약을 할 것 같다. 여정의 질과 스트레스의 지수가 다르다.
이런 면에서 오늘은 산티아고를 정말 걷고 싶어 하시는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 생각이 났는데 정말 개인실만 쓰며, 하코트랜스를 매일 이용한다면 체력이 부족해서 순례길 엄두를 못 내는 우리 교수님도 완주가 가능하실 것 같다. 여하튼 그만큼 휴식의 질과 그다음 날의 체력이 다르다는 거, 순례길을 걸을 거라면 작은 호텔이나 개인실도 잘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짐을 풀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양말을 벗어 발상태를 확인하는 거였다. 그저께부터 자리 잡기 시작한 오른쪽 새끼발가락의 물집이 걷는 내내 신경 쓰였다. 오늘 절반정도가 지나서는 의식적으로 새끼발가락을 바닥에 덜 닿으려 노력을 하게 되었고, 보통때와 다른 힘을 주며 걸으니 다른 발가락들도 긴장되고 힘들어서 영 불편하게 걸었다. 역시나 어제 터뜨린 곳 위쪽으로 커다랗게 다시 물집이 생겨있다. 다시 물집의 물을 빼고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고 돌아다녔는데 저녁에 보니 같은 부위에 다시 빵빵하게 물이 차있다. 조언을 받아 처음으로 바늘로 실을 통과시켜 봤는데 어디 이게 제대로 일을 해줄지 내일 한번 지켜봐야지. 물집 하나가 하루종일의 걸음을 꾀나 방해한다. 지난 이주일 동안 물집 없이 잘 걸은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얼른 나아라 내 발가락아. 더 잘 걸을 수 있게 좀 도와주렴!
택시 타고도 먹으러 오는 프로미스타의 폭립
오늘의 점심과 저녁은 둘 다 E Chiringuito del Camino에서 먹었는데 무려 구글 평점 4.8의 기차게 맛있고 푸짐한 폭립으로 유명하다. 한국어 메뉴판도 준비가 되어있을 정도로 한국인 순례자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한데 내가 한국인인걸 알아보시고 너무 유창한 발음으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셔서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레드와인을 마시며 폭립을 기다리는데 고추장 원하냐고, 아주 조금이나마 가져다주시는 게 참 귀여우시다. 세 덩어리나 되는 폭립이 진짜 진짜 맛있어서 인생 폭립 1위에 등극시켰다. 뭐랄까, 아웃백 같은 데서 먹는 레스토랑의 판박힌 폭립이 아니라 더 튼실한 게 먹을 게 많고, 발라진 소스도 특유의 'BBQ 소스다!!'하고 소리치지 않는 깊고 점잖은 맛이랄까. 정말 맛있었다. 이곳 주인분이 한국을 좋아하셔서 올해 한국 가신다던데 좋은 음식 많이 드시고 내가 지금 여기서 행복했던 만큼 즐기실 수 있으시길 바란다.
J 씨와 H 양은 오늘 프로미스타에 숙소가 없어 바로 전 마을에서 머무르기로 했는데 이 폭립을 먹으러 저녁에 택시를 타고 프로미스타로 건너왔다. 그만큼 이 폭립이 유명하다는 거 아니겠어. 동생들과 함께하기 위해 나는 간단하게 초리조를 시켰는데 감바스처럼 오일이 자작한 게 빵에 찍어 초리조와 함께 먹으니 맛있다.
여기까지 건너온 동생들 덕분에 나도 호텔에서 잠시 나가 같이 수다를 떨며 여유 있는 저녁을 즐겨본다. 오늘은 지는 해도 예쁘구나. 기억해 두려고 남긴 사진이 꼭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 닮았다. 우리는 지금 빛의 제국에 있는 걸 지도 몰라. 하루의 걷기를 끝내 넘치는 여유만큼 천천히 느린 행복감을 느낀 저녁이었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19일 프로미스타의 Hotel San Pedro
가격: 개인실, 60유로 (8만 5천 원)
구글평점 4.0, 내 평점 3.8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2개 있음
담요 / 이불 유무 : 있음
위치 : 도시 가운데, 10분 거리에 작은 슈퍼 2개 정도 있다. 산 페드로 성당 바로 코 앞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아니요, 시설대비 가격이 너무 비싸요. 더 나은 다른 호텔에 묵을래요.
나의 경험 : 커다란 통창 밖으로 빛이 들어오고 성당을 내다보는 건 너무 좋은데 시설이 전체적으로 올드하다. 오래된 가구들과 오래된 침대 시트의 꿉꿉함이 있었다. 형광등 하나가 소리를 내며 깜빡거리는데 귀찮아서 바꿔달라고는 안 했다. 순례길 31일 중 가격으로 치면 상위 5위로 비싼 곳이었는데 그 값을 못해서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