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0일 순례길 16일 차 프로미스타에서 까리온데로스콘데스
2023년 9월 20일 Camino de Santiago Day 16
Fromista - Carrion de los Condes : 18.88 km
출발 07:20 / 도착 11:40, 총 4시간 20분 걸림
안녕? 나 기억하니? 어제 그 물집이야
오늘은 19 km 남짓 짧은 거리를 걷는 날이라 아주 여유 있게 6시 반에 일어났다. 거리 자체도 짧지만 평지라서 걱정 하나 없이 마음이 가벼운 날이다. 그런데…
아침에 걷기 시작하고 5분 만에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며칠새 발달된 이놈의 새끼발가락 물집. 온 정신을 다 앗아갈 정도로 통증이 날카롭다. 상처가 있는 이 발가락으로 오늘 하루종일 내 무게로 누르고 누른다면 이거 성하지 않을 텐데, 이미 아파서 걸을 수도 없다. 아주 찰나의 순간에 ‘오늘 택시를 타고 가야 하나’, ‘이거 4시간 넘게 걷는 거 불가능하겠지?’ 등 별의별 생각이 다 스친다. 나는 벌써 출발했는데, 이미 오늘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길 위에 있는데 이거 어쩐다.
일단 어둡고 차가운 길바닥에 주저앉아 신발을 벗었다. 속양말까지 다 벗고 물집을 확인한들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기에 물집이 생긴 발가락이 가능한 땅에 안 닿게 주위에 휴지를 구겨 넣어 쿠션을 만들었다. 다행히 인진지 양말과 라이너를 모두 신었기 때문에 발가락 양말 사이사이에 휴지를 넣고 겉양말로 한번 더 잡아줄 수 있었다. 이럴 때 또 인지지 양말 두 겹이 빛을 발하는구나. 다시 걷기 시작하니 역시나 불편하긴 하지만 직접적인 날카로운 고통은 덜해진 기분이다. 통증이야 있지만 내가 휴지를 기가 막히게 잘 넣은 건지, 아니면 내가 통증에 익숙해진 건지 30분 정도 지나니 아픔이 무뎌졌다. 아마도 어제 동기들의 조언을 받고 처음으로 실을 통과해 둔 방법도 잘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휴 다행이다. 하마터면 하루를 시작하자마자 오늘의 여정을 포기할 뻔했지 뭐야. 평소에 엄살 심한 내가 이런 것도 극복하고 걷다니, 산티아고 순례길은 매일 조금씩 날 더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 같다. 포기하지 않고 길을 계속하길 선택한 나, 오늘 좀 멋지다!
나의 새로운 연인 코르타도
오늘은 길 자체도 수월한데 거진 매 시간마다 바가 많아서 화장실도 계속 갈 수 있고 안심이 되어 좋았다. 유난히 화장실이 마려웠던 날이라 보이는 바는 거진 다 들려 3개의 바에서 커피 3잔을 마셨다. 이제 스페인 바에서 마시는 커피는 코르타도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카페 콘 레체는 우유가 너무 많아서 화장실 가게 될까 봐 걱정돼 안되고, 에스프레소는 개인적으로 써서 별로고,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1 : 1 정도로 넣은 코르타도가 나의 최애가 되었다. 적당히 커피의 강한 맛도 나면서 우유의 고소한 맛도 있는 게 잠을 깨고 카페인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나서 좋다. 이탈리아에서는 죽어도 카푸치노만 마시는데 산티아고를 걸으며 코르타도의 맛에 재미가 들렸다. 무언가 길 위에서의 생활이 길어지니 취향도 조금씩 바뀌는 게 재밌다. 진심으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걸 몸소 느끼는 요즘이다.
다들 사진 찍는 에너지와 정성이 어디서 나는 거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다. 걷는 길도 일직선이고, 날씨도 밝고 맑고 아주 건조한 게 기분까지 뽀송하다. 너무 기분이 좋아 가방을 내려놓고 비석옆에 세워 설정 샷도 한번 찍어본다. 블로그에 숱한 남들의 산티아고 후기에는 예쁜 사진이 넘쳐나던데 이런 사진을 찍을 여유가 대체 어디서 나는지 그 사람들이 신기하다. 나는 걸으면서 사진까지 찍을 여유가 별로 없던데 말이야. 세상에 순례길을 영상으로 담은 유투버들은 어디에서 그 여유와 멀티태스킹이 되는 힘이 나는 건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나는 가방사진 하나 찍느라 한 5분 소요하니 진이 빠지고 무엇보다 가던 길을 멈추고 내 흐름을 끊는 게 참 힘들다. 나는 그냥 잘 걷기만 해야겠다. 오늘같이 걷는 거리도 짧고, 날씨가 너무 좋고, 주위에 사람 없을 때 아주 가끔 기분이나 내고 추억이나 만들자 하고 사진 찍는 건 앞으로도 드물 것 같다. 자, 가던 길이나 가봅시다.
오늘의 도시 까리온 데 레스 콘데스는 나름 소도시 중에서도 조금 모던하게 잘 발달된 것 같아서 초입부터 조금 설레었다. 부르고스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도시에 비해 먹을 곳도 많고, 기념품 샵도 많고, 이곳저곳에 사진을 찍을만한 스폿들도 준비되어 있는게 나를 설레게 했다. 날씨가 유난히 좋은 날에 조금 걸어서 체력이 남아도는 기분이라 씻지도 않고 가방만 내려놓은 뒤 마을을 둘러보러 나갔다. 걸은지 얼마 안 된 그때 교회 앞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 “oo 씨!”
반가운 호주 아주머니와의 식사
"어머, 반가워요! 멀리서 보는데 맞는 것 같아서 불러봤어요!"
호주 아주머니시다! 내 이름을 기억해 두시고 만날 때마다 늘 밝게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데 난 그게 그렇게 감사하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식사를 하셨냐고 여쭤보니 지금 찾는 중이라 하셔서 아주머니와 함께 밥을 먹으러 갔다. 원래는 곧 도착할 J 씨와 H 양과 함께 먹기로 했는데 혼자 식사를 하실 아주머니를 두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J 씨에게 내가 먹는 위치를 보내준 다음 나는 아주머니와 먼저 식사를 하고 있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오늘은 La Cerve라는 식당에서 3코스가 나오는 점심 메뉴를 먹었다. 아주머니께서 본인은 나이가 들어 어디서 어떤 걸 먹는 줄 모르니 이렇게 먹는 건 처음이라고 하시는데 마음이 조금 아프다. 우리 엄마가 생각이 난다. 우리 엄마가 산티아고를 혼자 걷는다면 밥이나 제대로 먹고 다닐까, 커피 한잔이나 마음껏 주문할 수 있으려나, 괜히 있지도 않을 일이지만 감정이 이입되어 벌써 속이 상한다. 오늘의 식사는 재밌는 딸처럼 내가 아주머니의 행복한 동행이 되어드리기로 생각했다.
첫 코스는 한 명이 다 먹을 수 없을 정도의 수북한 양의 까르보나라 파스타가 나왔고 맛은 특별할 것 없었지만 무난하게 고픈 배를 채울 수 있는 좋은 메뉴였다. 두 번째 코스로는 소고기와 감자튀김이, 마지막 코스 디저트는 초콜릿케이크까지 14유로 치고는 부족하다고 할 것 없는 식사였다. 음식이야 어떻건 오늘은 호주 아주머니와 함께해서 더 즐거웠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이신 아주머니는 늘 미사를 보러 도착하는 동네의 성당에 가신다고 한다. 이 산티아고 순례길도 카톨릭 신자로서 성스러운 길을 순례하고 싶어 혼자 오셨으니 나이와 불편한 몸의 한계를 넘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종교의 대단함을 느낀다.
식사가 다 끝나고 나가서 아주머니의 사진을 찍어드렸다. 우리가 만난 그 어떤 날보다 화창한 날이었고, 이번에는 길 위가 아닌, 길 끝에서 함께하기에 오후의 여유를 함께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내일은 비가 엄청 올 예정이고, 시작하는 길에서 약 4시간 정도의 17 km 구간에 카페가 하나도 없는 날이라 아주머니는 택시를 타고 점프를 하신다고 한다. 점프라고 하면 구간에서 구간사이를 버스나 기차, 택시 등을 타고 이동하는 건데 다리가 불편하신 아주머니를 위해 좋은 선택인 것 같다. 아주머니가 내일 빗속에서 조금이나마 안전하게 가시고, 도착하신 숙소에서 하루 푹 쉬실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인다. 즐거운 오후였어요 아주머니, 우리 길 위에서 또 뵈요!
페트병으로 마시는 띤또 데 베라노의 여유
호주 아주머니와 헤어지고 J 씨, H 양을 만나 마을을 더 둘어봤다. 근처에 큰 규모의 슈퍼마켓이 있다 해서 같이 장을 보러 갔다가 결국에는 커다란 1.5리터의 띤또 데 베라노에 얼음과 플라스틱컵을 사서 나왔다. 우리가 늘 2~3유로씩 주고 마시는 띤또 데 베라노도 개부분은 슈퍼에서 파는 브랜드를 따서 얼음에 넣어주는 거라는 사실! 브랜드를 눈여겨봤다가 오늘은 슈퍼에서 같은 걸로 가장 큰 페트병을 사서 밖에 나와 플라스틱 컵에 봉지 얼음을 붓고 띤또 데 베라노를 한가득 담았다. 셋이서 짠을 하며 뜨거운 오후에 시원한 목 넘김으로 행복을 맛본다. 보통 한잔 마시는 가격에 오늘은 세 사람이 큰 컵으로 취기 오르게 마실 수 있으니 이거 혜자 아니야! 셋이서 다 같이 지금 이 순간 참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소소한 즐거움을 함께할 동료들이 있어 다행이야. 오늘도 고맙다.
순례자들의 대화가 다 그러하듯 오늘 걸은 길의 감상을 나누고 내일의 길에 대한 정보와 계획을 나누는데 내일은 J 씨와 H 양도 택시를 타고 다음 구간으로 이동한다고 한다. 장대비가 하루종일 올 것이고, 17 km 동안 아무것도 없는 길을 걷는 게 부담스럽다고 한다. 순간 나도 고민이 된다. 내 발가락.... 그 물집 어떻게 할 거야. 다행히 걷다 보면 덜 아프겠지만 비가 온다? 쉴 곳도 없다? 화장실도 없고 이 발가락으로 질척한 빗길을 잘 걸을 수 있을까 겁이 났다. 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나에게 선택지가 생겨버렸다. 내일 택시를 탈 것인가, 안 탈 것인가 선택지가 생긴게 여간 나를 약하게 만든 게 아니다. 같이 택시 타고 가자는 동생들의 제안이 솔깃하다. 아… 어떡하지.
나를 잘 아는 사람들과의 대화
지금까지 16일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씩씩하게 잘 걸었다. 며칠 전부터 생기기 시작한 이 물집 하나 빼고는 '어? 나 완전 산티아고 순례길 맞춤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건강하게 잘 걸었다. 첫날 피레네는 정말 힘들었지만 그 외에는 다 재밌게 걸었고 힘들어야 마지막 몇 km 만 조금 지친다 느낀 게 다였다. 전체로 보면 고비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내일 점프를 한다고? 그럼 내가 완벽하게 다 걷는 게 아닌 게 되나? 어쩌지? 뭔가 불편한 생각에 이건 아니다 싶다. 하지만 오늘 아침 발가락이 아파 길바닥에서 주저앉은 걸 생각하면 내일은 비도 오는데 바닥에 주저앉을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하니 깜깜하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우리 언니와 신랑에게 전화를 해 조언을 구했다.
"내 발가락 물집 상태가 안 좋고 내일은 긴 구간 동안 화장실을 쓸 바도 없고 비도 온다고 하는데 어떡할까?"
나도 내일은 좀 힘들 것 같아서 이미 택시를 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는데 중간을 건너뛴다는 불편한 마음에 위로를 받고 싶었나 보다. 언니도 신랑도 내일 하루 쉬고 전체 컨디션을 챙기는 게 낫지 무리해서 빗속에서 다치거나 물집이 악화되면 더 큰 손해를 보지 않겠냐고 점프를 하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어도 계속 신경이 쓰인다. 이건 내가 원하던 모습이 아닌데… 오늘 아침에 아파도 씩씩하게 걸었던 내가 참 자랑스러웠는데 말이야... 심란한 밤이다.
오늘의 숙소도 내가 조금 더 용감한 결정을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16일을 걸으면서 개인실이 30유로였던 적은 없는데 오늘은 평도 높은 곳이 30유로라 덥석 예약을 해놓고 갔더니 이거 꼭 고시원같이 생겼다. 내가 본 리뷰의 사진에선 분명 보통의 호텔룸처럼 생겼던데 거긴 2인실이었던 것이다. 내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15유로를 더 내고 2인실을 썼지, 슬슬 비가 오기 시작하는 오후에 고시원같이 생긴 침대하나 겨우 들어가는 공간에 세면대를 마주 보며 누워있자니 생각도 어두워진다. 가방을 펴 놓을 공간도 협소하고 앉을 곳도 없이 그냥 침대에 누워있다 보니 우울해지는 것 같다. 이러다간 몸도 마음도 컨디션 난조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J 씨에게 문자를 보낸다.
저도 내일 택시 조인할게요. 몇 시에 만날까요
아... 엄청나게 용감했던 아침이 엄청나게 용감하지 않은 저녁으로 마무리를 한다. 기분이 묘하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20일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의 Hostal Plaza Mayor
가격: 개인실, 30유로 (4만 2천 원)
구글평점 4.5, 내 평점 3.9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2개 있음
담요/이불 유무 : 있음
위치 : 바로 옆건물에 적당히 큰 슈퍼마켓도 있고, 1층에 큰 카페가 있어 음식 먹기도 좋다. 위치는 인정!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아마도 2인실이요.
나의 경험 : 1인실은 고시원 같았다. 잠자고 씻기에 부족함은 없으나 짐 정리나, 휴식을 하기엔 조금 갑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