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8일 순례길 14일 차, 오르닐로스에서 카스트로헤리츠
2023년 9월 18일 Camino de Santiago Day 14
Hornillos del Camino - Castrojeriz : 19.47 km
출발 06:45 / 도착 11:15 , 총 4시간 30분 걸림
어우 추워
오늘은 혼자 걷고 싶은 날이라 일찌감치 채비를 하고 나왔다. 감정들이 해일같이 몰려왔던 어제를 다시 떠올리며 오늘은 내 사랑하는 조카들과 우리 가족의 건강을 바라며 걸어야겠다 싶은 날이다. 어제 잘 때 누군가 열어둔 창문으로 밤새 썰렁한 바람을 맞았다. 추운 것 같아 경량패딩까지 입고 나왔는데도 목이 썰렁한 게 시리다. 낮에 해를 가리는 얼굴 커버를 코까지 덮어주고 나서야 그나마 낫다. 아우 추워! 이놈의 날씨는 어째 중간이 없는지 오늘은 귀도 시리고 손가락도 시리다. 얼굴 전체를 덮고 눈만 빼꼼 나오는 산악용 후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내가 뭘 비울지 생각하는 게 아니고, 뭐를 더 소유해야 편할지를 생각하다니 나는 아직 산티아고의 순례자로서 갈 길이 멀었다는 걸 재차 확인한다. 해는 한 시간은 더 지나야 뜰 텐데 와 9월 중순이 넘어가니 이렇게 온도가 뚝 떨어지는 게 놀랍다. 경량패딩을 가져오길 정말 잘했다. 정말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다. 아프면 안 되는데 조심해야지!
탁 트인 뷰를 자랑하는 카페를 소개합니다
끝도 없는 평원을 2시간 정도 걸으니 동이 트고, 슬슬 아침식사를 할 때인 것 같다. 카미노 닌자 앱을 확인하니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바 끼리의 거리가 먼 편이라 저 멀리 순례길에서 오른쪽으로 벗어나 보이는 언덕 위의 Fuente Siders 알베르게 겸 바에 들렸다. 올라갈 때는 몰랐는데 도착해서 커피를 주문하고 왔던 길을 돌아보니 와~ 장관이 펼쳐진다. 탁 트인 멋진 뷰에 펄럭이는 스페인 국기, 미국 랜치 스타일의 디자인까지 더해 앉아서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저 멀리 가로로 내가 걸어온 길을 여러 순례자가 열심히 걸어 지나가고 있다. 순례자와 해 뜨는 평원만이 보이는데 심장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마치 그림 같으면서 사진 같고, 현실적이며 비현실적인 꿈을 꾸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카페 콘 레체를 시켜 밖에 자리 잡았다. 날씨가 춥지만 뷰를 즐기고 싶어 코를 훌쩍이며 마시는 커피 한잔에 참 행복했다. 여기를 지나쳐가는 사람들에게 제발 여기 와서 이 뷰 좀 감상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멋진 곳이었다. 뒤따라 출발했을 J 씨에게 이곳을 놓치지 말고 꼭 들려야 한다고 문자를 보내두고 아쉽지만 남은 여정을 위해 일어나 걸음을 계속한다. 다음에 부르고스에서 출발해 여기서 하루 묵는 것도 괜찮겠어! 참 마음에 드는 곳이라 기억해 둬야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
오늘 들어오기 30분 전에 엄청 큰 성곽을 보았다. 다른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카스트로헤리츠가 과거에 분명 중요한 도시였을 거라 한다. 산 위에 성벽과 많은 유적지에 교회들도 많다고 한다. 나에게 이 도시의 첫인상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었다. 멀리서 마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산 위에 있는 성이 꼭 떠있는 것 같아 보였다. 저 성 위에서 내려다보면 사방으로 적이 어디에서 오는지 확실하게 보일 것 같은데, 정말 한 때 이름을 날리던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것이 이해가 간다. 아기자기한 골목들까지 예쁜 작은 마을, 이제 여기서 좀 쉬어볼까나. 오늘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에서 한식도 먹을 수 있기에 기대된다.
알베르게는 12시에 여는데 이런, 45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한식 먹을 생각에 좀 설레었는지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랐다. 나 말고도 오픈을 기다리는 노르웨이 전직 군인 아저씨와 미국인 할머니 두 분과 함께 한참을 수다 떨다가 들어갔다. 이 먼 타국에서 한국인 여자 호스트분을 보니 그저 반갑다. 밝게 인사를 하고 체크인을 하는데 내 이름이 명단에 없다고 예약 내역을 보여달라고 하신다. 순간 식은땀이 났다. 혹시나 내가 예약 실수를 했나? 오늘로 순례길 2주 차. 그동안 숙소 실수 없었지만 드디어 하나 실수했구나 싶어 당황했다. 서둘러 이메일 예약내역을 보니 다행히 오늘이 맞다! 알고 보니 사장님이 개인실 명단이 아닌 단체실 명단에서 계속 내 이름을 찾고 있어서 그런 거였다. 휴~ 다행이다. 난 오늘 다른 곳에서 잠을 자야 하나 순간 눈앞이 깜깜했지 뭐야. 여기 아주 심장 쫀쫀하게 장사 잘해~ 안도감에 웃음이 났다.
한국음식 먹을 준비 완료
점심은 내가 씻고 나왔을 때쯤 도착한 J 씨, 메구미, H 양을 만나 함께 김밥과 라면을 시켜 먹었다. 김밥 만원에 라면 만원이라.... 한국에서는 놀랄 노자의 가격이지만 여기선 팔아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다. 게다가 라면은 무려 6종류 중에서 원하는 걸 끓여주신다. 안성탕면, 너구리, 김치라면, 순라면, 짜파게티, 불닭 볶음면 중 골라골라! 아 너무 행복하잖아! 그 와중에 먹고 싶은 건 또 많아서 결정을 못하다가 H 양과 나눠먹기로 하고 불닭 볶음면과 안성탕면을 시켰다. 국물도 마시고 싶은데 매콤한 불닭을 포기할 수가 없지. 계란도 들어있고 너무 잘 끓여주셔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모든지 밖에서 먹는 게 더 맛있다지만 우린 한국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스페인의 소도시 카르트로헤라츠에서 고향의 맛을 느끼는 중이라 더욱더 감칠맛이 난다. 산티아고 순례길 오늘로 딱 2주 차. 김밥에 라면 점심이면 나름 제대로 된 포상이 아닐까 싶다.
자 그렇다면 이곳 알베르게 오리온이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인 저녁 커뮤니티 디너 비빔밥은 어떨까? 나름 기대가 컸는데 솔직히 아쉬웠다. 넉넉한 고기와 가득한 야채들로 예쁘게 준비된 비빔밥. 일단 비주얼과 양 매우 합격이다. 그런데... 비벼먹을 소스로 초고추장을 준다... 고추장이어야 하는데 초고추장...
우리 학교 다닐 때 점심시간에 친구들이랑 비빔밥 만들어먹자! 해서 모든 거 다 섞고 고추장만 들어가면 다 비빔밥 맛이 났는데... 비빔밥을 비빔밥다운 맛을 나게 해주는 핵심이자 근본인 고추장은 없고, 새콤달콤 묽은 초고추장이 과연 맛을 낼 수 있을까? 결과는 아니었다. 밥 전체가 시큼해졌다. 초고추장덕에 비빔밥이 아닌 회덮밥 맛이 난다. 뭔가 이건 아니다 싶어 앞에 보이는 참기름을 좀 부어볼까 했는데 이런... 참기름이 아니라 간장이다. 아마 매운 것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을 위한 것 같다. 고추장만 있었으면 정말 완벽한데! 적어도 한국인한테는 고추장을 제공해 주셨다면 좋았을 것 같아 너무너무 아쉬웠다.
게다가 초고추장이 과연 외국인들과의 입맛에도 맞았을까? 이왕이면 우리나라 음식에 대해 제대로 된 경험을 가지고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렇게 순례길 위에서 처음으로 한국음식을 경험한 외국인들이 한국의 비빔밥은 새콤달콤 하다고 기억을 할까 봐 조금 아쉬웠다. 외국인과 결혼한 나도 집에서 비빔밥을 할 때는 고추장을 넣는다. 물론 신랑의 비빔밥은 고추장 양을 조절해서 만들지만 절대 빠뜨릴 수는 없다. 아마 고추장을 제공한다면 고추장 넣는 그 정도를 모르는 외국인들이 맵기 조절을 많이들 실패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사장님이 그나마 묽어서 조금씩 양 조절이 용이한 초고추장을 선택 하셨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빔밥은 정말 너무 예뻤다. 단지 여기 사장님이 정말 푸짐하고 예쁘게 정성 들여 만들어주신 비빔밥이 더 잘 팔렸으면 하고 같은 한국인으로서 아쉬웠을 뿐이지 그래도 야채 가득 들어간 밥을 먹으니 오래간만에 든든하다. 다음에 오면 내 고추장을 가져오리라! 이상한 다짐을 하는 나를 본다.
예쁜 커플을 보면 네 생각이 나
식사를 다하고 노을이 질 무렵 일행들과 함께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근처 교회를 배경으로 다 같이 사진도 찍고, 갑자기 발동이 걸려 신발 멀리 던지기로 커피내기, 음료내기를 했다. 순례길을 같이 걷다 보니 나이고 뭐고 모두 친구가 되었다. 곧 우리 언니가 레온에 도착할 텐데 언니가 오면 자연스레 우리 둘이 걷게 될 것 같아서 같이 걷고 있는 이 친구들이 걱정된다. 물론 나 없이도 잘 걷겠지만 함께 하다가 두고 가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편하진 않다. 그런데 오늘 보니 이 세 명이 죽이 너무 잘 맞아서 다행이다. 나는 먼저 갈 때도 있지만 이 친구들은 이래저래 같이 출발하고 같이 걷는 것 같고, 그걸 보니 마음이 놓인다.
해가 지고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 앞에 한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걸어가신다.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있고, 옆으로는 순례길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다. 이 분들은 그렇게 인생의 길을 함께 걷고 계시구나, 나도 우리 신랑이랑 늙어서도 저렇게 두 손 꼭 잡고 저녁에 어디론가 밥 먹으러 마실 나갔으면 좋겠다. 이탈리아에 두고 온 신랑이 그리운 저녁이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 내 짝꿍아.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18일 카스트로헤리츠의 Orion
가격: 개인실, 45유로 (6만 4천 원)
구글평점 4.5, 내 평점 4.3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2개 있음
담요/이불 유무 : 있음
위치 : 중간 위치 정도 되는 듯하다. 슈퍼마켓이 걸어서 17분 정도 가야 해서 꽤나 멀다.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아마도요
나의 경험 : 개인실 객실은 넓은데 비해 화장실이 조금 아쉬웠다. 샤워하는 공간에 샤워커튼만 쳐져있고 욕조든 유리문이든 아무것도 없다. 세면대도 작고 조명도 어둡고 이런 디테일이 조금 아쉬웠다. 깨끗하긴 정말 깨끗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