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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루 같았던 고속도로 호텔에서의 조식

2023년 9월 16일 순례길 12일 차, 산토베니아 데 오카에서 부르고

by 몽키거
2023년 9월 16일 Camino de Santiago Day 12
Santovenia de Oca - Burgos : 24 km
출발 06:00 / 도착 11:15, 총 7시간 걸림


시골쥐들의 도시 상경기
대도시 부르고스야 내가 간다!!
대도시라 빨리 도착하고 싶어진다


오늘은 부르고스로 들어가는 날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 중 유명한 큰 도시는 손에 꼽게 적은 데다 오래간만에 대도시라 그런지 너무 신난다. 3일 차 팜플로나, 7일 차 로그로뇨에 이어 12일 차 부르고스!!! 그다음에는 아마 레온 정도를 대도시로 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산토베니아 데 오카에서 고속도로 대안길을 쭉 따라 걸어왔다. 차도 옆이긴 하지만 새로 만들어 놓은 길이라 널찍하고 포장도 잘 되어있어 그냥 앞으로 걷기만 하면 되기에 난이도는 하라고 느껴질 정도로 편했다. 산티아고 순례자들을 위한 대안길이라 순례길 표지도 잘 되어있어서 대안길이 나쁘지만은 않구나 싶다.

와~ 어제저녁 10시쯤 알베르게에서 소등을 하고 나니 밖에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왔다. 무슨 ASMR처럼 끊일 것 같지 않은 어마무시한 소리에 번쩍거리는 창 밖을 보며 걱정에 걱정을 하며 자려고 노력했다. 뻥 뚫린 12인용 도미토리는 처음이라 엄청 신경이 쓰였는지 10시부터 한 2시간 정도, 다시 새벽 3시부터 2시간 정도 쪽잠을 잤다. 그래도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나갈 준비를 하는 게 순례자의 일상이니 조금 이르다 싶은 5시부터 주섬주섬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선다.


대안길, 단 하나의 단점
아 대체 어디서 먹어야 합니까

오늘은 새벽 6시에 J 씨와 메구미와 함께 출발했다. 땅바닥은 젖어 있었지만 다행히 비는 멈췄다. 오늘은 고속도로 옆으로 걷는 대안길이라 축축한 땅길을 걱정하지 않고, 쭉 뻗은 도로 옆 새 길을 걷는 것도 우리의 복이구나 싶다. 이런 길은 또 처음이라 신선하네. 오르락내리락 없고, 울퉁불퉁하지 않은 평지를 걸으니 오늘 하루 좀 쉬어가는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새벽 6시부터 2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지만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 이런... 슬슬 배가 고파진다. 산티아고 메인 순례길 루트라면 카미노 닌자 앱을 통해 어느 지점에 카페나 바가 있는지 확인하고, 희망이라도 가지며 걸을 텐데 아직 새로운 대안길에 대한 정보는 어느 곳에도 없다. 정말 뭐라도 하나 먹고 싶다 싶을 때 어디선가 빵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우리 눈에 카페나 빵집이 보이지 않는데 냄새가 진동을 하니 대체 어디지 싶어 걷던 길에서 살짝 벗어나 마을로 냄새를 따라 들어가 봤다. 크... 아쉽게도 빵을 납품하는 공장 같았다. 빛은 새어 나오는데 문은 굳건히 닫혀있고 빵 만드는 기계 소리와 냄새만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전부였다. 배가 더 고파진다... 계속 걷는 것 말고 우리에게 선택지는 없다. 앞으로 계속 걸어가자! 정말 아무것도 못 찾는다면 뭐 어쩌겠어 , 부르고스 가서 먹는 거지.

산티아고 길 위에서는 포기도 빨라진다. 무언가를 마음에 담아둬 봤자 내 의지대로 풀리는 건 하나 없다. 길이 나에게 주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는 앞만 보며 걷는 것 말고는 행복해질 길이 없다. 건강한 정신 하나만 갖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가다 보면 길은 가끔 나에게 선물 같은 놀라움을 주기도 하니까, 그냥 걷는다. 그리고 걷는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이미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신기루 호텔, 호텔 까미노 데 산티아고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간단해도 우리에겐 고급지게 느껴지는 호텔 조식이다


빵냄새에 한 번 속고 나서 체념하고 걸어가던 중 얼마 안 가 J 씨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어, 저기 호텔에 바 있지 않을까요?"

정말 고속도로 건너편에 난데없이 호텔 하나가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다. Hotel Camino de Santiago. 뭐지? 아무리 봐도 여기에 호텔이 있을 곳이 아닌데 말이야. 뭐라도 먹고 싶은 마음에 셋 다 서둘러 길을 건너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가 8시가 조금 넘었을 때라 운 좋게 호텔 레스토랑에서 조식 뷔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아무리 고속도로에 자리한 작은 호텔의 조식이라 해도 10일 넘게 스페인 시골들을 지나 산을 타고 숲 속을 걸어온 우리에게 이 소박한 조식 뷔페는 고급 식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커피나 또르띠야 하나 먹던 아침 식사에서 오늘은 테이블 매트가 깔린 식탁에 앉아 포크 나이프를 갖춰두고 우리가 주문한 커피를 웨이터가 가져다주길 기다린다. 크~ 우리 오늘 좀 고급스러운 느낌이야. 게다가 가격은 8.5유로, 한화로 1만 2천 원이다.


치즈랑 살라미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어야지!


커다란 또르띠아 위에 치즈랑 살라미를 잔뜩 올려서 먹고, 오렌지 주스에 카페 콘 레체도 시켜본다. 빵도 따뜻하게 구워 먹을 수 있어서 샌드위치도 만들어 먹고 작은 달달이 과자들도 한두 개 디저트로 챙겼다. 너무 배가 고팠을 때 우연찮게 찾은 이곳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는 걸 잠시 잊고, 어디 놀러 와서 다음 날 호텔에서 조식을 즐기는 것 같은 기분을 내본다. 비행을 하면서 정말 좋다는 호텔의 조식을 안 이용해 본 것도 아닌데 오늘 소박한 이 호텔에서의 뷔페에서 가장 부유한 느낌이 드는 건 뭘까. 여하튼 오늘도 J 씨 아니었으면 이렇게 좋은 곳을 그냥 지나칠 뻔했다. 나에게 없는 재능을 가진 이 친구가 늘 신기하고 고맙다.


든든하게 먹고 부르고스로!


나오면서 생각했다. 이 호텔 뭔가 신기루 같아... 내일 다시 오면 이 자리에 없을 것 같은, 사막에서 힘들 때 헛것이 보이는 그런 느낌이랄까. 너무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형태의 만족감을 주다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호텔 조식 뷔페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과연 얼마나 될까? 같이 걷는 두 친구와 다음에 산티아고를 다시 걷는다고 해도 이 호텔의 조식을 먹기 위해 또 대안길을 선택해 부르고스로 들어갈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 아주 신기한 경험이었다


안녕! 부르고스야! 너 참 예쁘다!
너무나 예뻤던 부르고스 대성당


부르고스는 정말 기대 이상의 멋진 도시였다. 카메라 한 각에 다 안 잡힐 정도로 큰 대성당과 근처의 여러 식당들과 가게들 그리고 넘치는 기념품 샵들까지 즐길게 많아 보여 마구 설렌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이 대도시 바이브에 심장이 쿵쾅거린다. 성당 앞에서 이탈리아에 있는 우리 신랑과, 한국에 있는 우리 엄마와 영상통화로 성당을 보여줬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나에게 노트르담보다 예뻤고, 한 개의 탑으로 구성된 게 아닌 옆과 뒤로 규모가 꽤나 커서 장엄했다. 우리보다 이틀 정도를 앞서가신 미국 아저씨가 부르고스 대성당을 배경으로 인증샷 찍어 보내주신 각도가 너무 예뻐서 똑같은 스팟을 찾아가 우리도 인증샷을 찍었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어! 나도 여기에서 사진 이렇게 찍고 싶어! 이런 적은 오늘이 처음이다. 게다가 J 씨가 같은 장소에서 기가 막히게 내 인생샷 수준의 맘에 드는 사진을 남겨줘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라면은 진짜 맛있었다


오늘의 점심을 먹을 레스토랑은 메구미가 먹고 싶다는 평점 4.7의 라멘집 El Cuenca dorato다. 각자 뜨끈한 라멘 한 그릇씩 맛있게 먹고 교자를 시켰는데 이상하게도 이탈리아나 여기나 교자가 바삭하게 구운 만두가 아닌 축축한 찐만두가 나왔다. 으잉? 1만 2천 원에 자그마한 6조각의 찐만두는 아시아에서 온 한국인, 일본인 눈엔 성이 안 찬다. 교자는 바삭하게 튀기듯 구워 나와야 하는데 유럽 사람들은 교자가 뭔지 모르나 보다. 뭐 이것도 경험이죠~ 메구미에게 여기 평이 높은데 정말 일본 라멘과 가깝냐고 물으니 음~ 하고 생각하더니 나쁘진 않지만 정통 일본라멘이라고는 못할 것 같다고 한다. 하긴 일본 비행을 하면 무조건 라멘과 돈카츠는 한 번씩 먹어주던 나한테도 여기 라멘은 유럽 현지화가 많이 된 맛이긴 했다. 그래도 정말 오래간만에 뜨끈한 국물 있는 음식을 먹으니 배가 따뜻하고 든든하다. 역시 난 한국 사람인지 가끔씩 국물 한 번은 먹어 줘야 하는 것 같다.


고멘나사이 메구미상

밥을 다 먹고 헤어지기 전에 우리 세명의 숙소가 다 다르기에 내일 몇 시에 만나서 같이들 가고 싶은지 물었더니 메구미가 자긴 내일 혼자 천천히 걷고 싶다고 한다. 우리랑 걸은 게 즐겁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잠시 스쳤는데 J 씨가 나중에 살짝 알려준 게 오늘 걸으면서 내 속도가 너무 빨랐지만 메구미가 멈추자는 소리를 못했다고 한다. 순간 내가 못된 사람이 된 것 같아 당황스럽고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내가 오래간만에 대도시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들떠 얼른 들어가 반나절이라도 이것저것 더 둘러보고 재밌게 하루를 보내자는 열의에 조금 서둘렀던 것 같다. 아이고... 너무 미안했다. 힘들면 먼저 가라던가 아니면 쉬어가자고 이야기를 해준다면 귀 기울여 들었을 텐데. 나도 산티아고 순례길 초반에 선생님과 함께 걸을 때 빠른 그분의 걸음을 따라 가느라 조금 벅찼던 경험이 있어 메구미가 십분 이해 갔다. 걷는 매 순간 나에 맞는 속도로, 여정 전체가 즐거워야 순례길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도 혼자 걸을 때 조금은 심심해도 늘 더 나답고 활력 넘쳤던 것 같아 내일 혼자 걸을 메구미를 응원한다.

이제 거진 이주일을 다 걸어가는 마당에 각자의 페이스와 스타일이 생기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 같다. 그리고 오늘 같이 걸었다고 해서 내일 꼭 같이 걸어야 한다는 법도 없고, 내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 동행을 하게 될지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각자의 길을 존중하고 응원해 주는 게 같은 순례자로서 최소한의 예의인 것 같다.


서로 다름이 중요하지 않은, 순례길 그 위에서의 동행

숙소에서 씻고 휴식을 취한 다음 부르고스 구경을 조금 더 하자 싶어 밖으로 나왔다. 부르고스 대성당을 배경으로 셀피도 몇 장 더 남겨보고 기념품샵을 둘러보는데 메구미를 다시 만났다. 나는 정말 정말 그녀를 잘 찾는다. 전생에 우리가 아주 여러 번 헤어졌던 사이인가? 이 길 위에서 이리 돌아가도 저리 돌아가도 난 그녀를 찾곤 한다. 둘이 함께 기념품 몇 개를 같이 구경하는데 늘 언니 것까지 몰아 사는 나를 보며 메구미가 신기한 듯 쳐다본다. 알아, 나 많이 사는 거. 기다리는 메구미에게 멋쩍은 웃음을 날리고 서둘러 계산을 한다.


예쁜 패치들과 스티커들을 발견해 행복하다


메구미는 산타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서도 교회를 안 들어간다고 했고, 부르고스에서도 대성당에 안 들어갈 거라고 했다. 그리고 기념품을 마구 사두는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기념품을 사지 않는다. 나는 늘 교회를 들어가고 싶어 하고, 기념품은 보일 때마다 마음에 드는 건 꼭 사는 편이다. 우리가 순례길이어서 그렇지 같이 여행을 하는 사이였다면 벌써 따로 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다르다. 이게 산티아고의 묘미가 아닐까.

여행은 각자 느끼고 보고 싶은 포인트가 다 다르지만 산티아고는 얼마나 다르건 간에 도착해야 하는 목표와 우린 계속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같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길이 끝나고 오늘같이 휴식을 취할 때야 서로의 취향이 조금 드러나도 길 위에서는 그냥 의지 할 수 있는 나와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걷는 동지이다. 그래서 아무리 달라도, 그 다름이 무색하게 길 위에서는 닮아있다.


너, 나, 오늘, 저기까지, 걷는다.


이렇게 단순한 우리의 일일 미션을 조만간 또 함께하길 기다릴게, 메구미상! 그때는 내가 조금 천천히 걷겠어!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16일 부르고스의 Hostal Carrales

가격: 개인실 54유로 (7만 7천 원)

구글평점 4.4, 내 평점 4.2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2개 있음

담요/이불 유무 : 있음

위치 : 나름 가운데, 부르고스 성당까지 걸어서 10분. 슈퍼마켓은 조금 멀다.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반반

나의 경험 : 나쁘지는 않았다. 깔끔하고, 모던한데 침대가 2인이 쓰기에는 좀 작은, 더블 사이즈는 아니었다. 부족한 건 없는데 가격 대비 특별하게 좋은 것도 없었다. 근데 안내해 주는 데스크를 체크인 시간대만 열어두고 그 이후에는 아예 퇴근해서 뭔가 급한 상황 때 난감하다. 나도 하코트랜스 종이가 필요했는데 못 구해서 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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