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5일 순례길 11일 차, 벨로라도에서 산토베니아 데 오
2023년 9월 15일 Camino de Santiago Day 11
Belorado - Santovenia de Oca : 27.2 km
출발 06:30 / 도착 13:30, 총 7시간 걸림
Welcome back J
오늘은 조금 힘들었다. 생각했던 거리보다 무려 3.2 km를 더 걸었고, 비도 오는 데다 발도 찡한 느낌이 영 피로하다. 11일 차가 되니 발이 피곤할 때가 되었나? 그동안은 느끼지 못했던 피로감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J 씨와 함께 걸으며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비디오도 남겨보며 재밌게 걸어서 참 다행이었다. 먼저 묻지 않아도 참 잘 챙겨주고, 재밌어서 이보다 더 좋은 카미노 친구가 있을까 싶다. 내가 지난 3일은 혼자 빨리 걷는데 익숙해져서 혹시나 종아리가 아팠던 그와 속도 차이가 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너무 잘 걷는 모습을 보니 다행이었다. 물론 J씨도 티는 안내지만 내 걸음에 맞춰주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을 것 같다.
비가 와서 우비를 써야 하는 불편함은 있었지만 다행히 부슬비 정도라 문제없이 잘 걸었다. 발이 젖을 정도의 쏟아지는 장대비만 아니면 이 정도야 기꺼이 행복하게 맞으며 갈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지난 4일 동안 운 좋게 날씨가 너무 좋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지난 11일 모두 아주 극심한 날씨 없이 전체적으로 참 걸을만한 날씨였음에 사뭇 감사해진다. 선택받은 사람처럼 날씨도 따라주니 운도 참 좋다.
Bar 3개를 걸친 뒤 깨달았다
여기가 아닌가벼
오늘 아침 식사는 2시간쯤 걷고 찾은 바에서 또르띠아, 신선한 오렌지주스, 바나나 한 개를 사 먹었다. 이곳에서 산티아고와 관련된 예쁜 그림엽서들을 팔고 있어 5장이나 샀다. 엽서들을 사면서 나중에 이탈리아로 돌아가면 나와 함께 걸었던 사람들에게 언젠가 이 엽서에 글을 써서 보내야지 생각했다. 길이 끝나고 나면 동기들만큼이나 이 경험을 이해해 줄 사람은 없을 것 같아 길 위에서의 인연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두 번째 바에선 각각 커피 한잔씩 충전해 주고, 11 km 남은 거 잘 걸어보자 으쌰으쌰 하며 걸었는데 끝인 줄 알았던 세 번째 바에서 4km 정도를 더 걸어야 함을 발견하고 아예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를 틀었다. 끝이라고 생각해서 힘을 내어 왔는데 더 가야 한다니 의지가 꺾여 바로 출발해지지가 않았다. 카페 콘 레체를 시켜 싸왔던 머핀이랑 스낵들을 입안에 다 털어 넣었다. 어쩌다 보니 중간에 메구미도 만나 셋이 같이 걸었는데 셋 다 똑같이 거리 인지를 못했다는 게 너무 웃겼다. 나는 그렇다 치고 똑똑한 J 씨와 야무진 메구미까지 당황해서 힘 빠져하는 모습을 보니 이거 순례길이 길어지니 이 친구들도 실수를 하게 되는구나 싶다.
그래도 최소한 마지막 바에서 도자기로 빚은 순례자 모양의 귀여운 자석들을 발견해 이것저것 사느라 또 살짝 즐거웠다. 지금까지 본 자석들 중에 제일 이뻐서 처음에 보고 꺅 소리가 났다. 남자 순례자, 여자 순례자, 예쁜 조개까지 내 거 한 세트 언니 거 한 세트 사서 가방에 잘 넣어두고, 자! 다시 한번 힘을 내 우리의 도착지까지 걸어본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중간중간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얼터네이티브 길 (alternative road), 대안길을 아시나요
산티아고 모든 숙소의 예약을 3달 전에 마치고 온 순례길에서 마을이 작아 도무지 예약을 할 수가 없었던 곳이 단 한 곳 있었는데 그게 오늘이다. 원래의 목적지는 산 후안 데 오르테가. 며칠 전에 메구미가 자기도 산 후안 데 오르테가에 예약을 못해서 근처 마을에 숙소를 잡았다고 소개를 받고 급하게 예약을 했었다. 우린 오늘 얼추 벨로라도에서 산 후안 데 오르테가로 가는 걸로 생각하고 ‘24 km? 우습지!’ 하고 걷다가 결과적으로 27.2 km를 걸었다. 우리의 도착지는 산 후안 데 오르테가에서 살짝 왼쪽으로 벗어난 산티아고의 대안길에 있는 산토베니아 데 오카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응? 대안길이 뭐지? 내가 산티아고를 준비할 때 대안길이란 걸 들어본 적이 없어서 적잖게 당황했다. 모두가 다 한 길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걸어가는 줄 알았으니까 말이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산티아고 순례길을 따라 여러 지점에서 주요 고속도로 건설을 하며 돌이킬 수 없는 물리적, 환경적, 경관적 파괴를 가져오는 것에 대비해 길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대체 고속도로 경로가 제안된 것이라고 한다(이후에도 총 여정 중 두세 번 정도 더 얼터네이티브 길을 만났다). 모든 대안길은 가끔은 더 길 때도, 짧을 때도 있지만 결국은 메인길과 만나게 된다.
어쨌든 오늘 원래 목표로 삼았던 산 후안 데 오르테가는 마을이 작고 숙소가 많이 없어 이미 예약은 불가했고, 몇몇의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우리와 같이 대안길로 걸어서 산토베니아 데 오카에 도착했다.
결국에는 사람에 감동하는 거지
발이 찡해지기 시작한 지 조금 지나 드디어 오늘의 숙소 Albergue Camino de Santovenia에 도착했다. 강당식의 뻥 뚫린 두 방에 각각 12명이 지내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알베르게인데 처음에 방에 올라가서는 조금 당황했다. 지금까지 11일을 머물면서 가능한 프라이빗한 곳에 머물렀기에 오늘같이 캡슐도 아니고 뻥 뚫린 형태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나의 프라이버시가 절대적으로 없는 곳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가장 먼저 왔다고 일행 모두가 이 층침대의 아래를 골라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셔서 이미 마음에 든다. 숙소에서 이 층침대의 일층을 배정받는 건 정말 행운이 따르는 날이라는 걸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야무진 J 씨가 콘센트가 많이 안 보이니까 가능한 콘센트 옆 침대를 고르라고 나에게 조언해 준다. 크~ 이런 똑똑한 친구 같으니라고, 그건 또 언제 싹 둘러본 거야! 덕분에 짐을 다 풀기 전에 콘센트가 있는 침대를 다시 골라 다시 이동해 짐을 풀었다. 내일을 위해 핸드폰과 해드랜턴과 애플와치 등 정말 많은 걸 충전해야 하기에 콘센트 옆자리는 명당이었다.
*** 거진 모든 알베르게가 각 개인이 침대 옆에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는 구비하고 있는 추세다. 그러니 공립만을 골라 숙박하지 않는다면 웬만한 사립의 도미토리들은 코드 연장선을 들고 올 필요가 없는 것 같다 ***
그런데 여기 호스트들이 너무 친절하다. 정말 이건 뭐랄까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판에 박힌 친절을 베푸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선하고 진심을 다해 순례자들을 대한다. 음식 주문이나 세팅 등 뭐 하나도 대강하시지 않고 테이블보도, 작은 요구사항도 놓치지 않고 챙겨주신다. 해가 진 뒤 식당 한구석에서 글을 쓰고 있으면 레스토랑의 불을 환하게 켜준다. "너 글 쓰는 것 같아서. “ 쿨하게 한마디 하고 웃으며 지나가신다. 정말 마음이 안 가면 할 수 없는 작은 점들을 놓치지 않고 물어보기도 전에 기꺼이 해주신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젊은 아주머니 두 분과 중년 남자 한 분이 모든 일을 하시는데 신기할 정도로 세 분의 친절함이 닮아있다. 아마 가족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특별한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구글 평점 4.7인지 이해가 확 갔다. 그냥 보통의 부족함 없다 정도의 시설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곳보다 확연하게 다른 게 이곳의 ‘사람들'이다. 운영하는 사람들이 감동을 주니 머무는 짧은 시간 동안이 꼭 친척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난 이렇게 단체로 서로 바라보고 자는 공간은 부담스러운데 호스트들에게 친절한 감동을 받으니 다른 건 아무려면 어떤가 싶은 마음까지 생기더라. 다른 사람에게 받는 감동은 모든 경험을 좋은 기억으로만 간직하게 해주는 마법이 있다. 답은 결국 사람이다.
저녁은 보통 잘 안 먹거나 과일로 먹으려고 노력하는데 오늘은 너무 작은 마을이라 근처에 슈퍼도 없어 알베르게 레스토랑에서 피자와 띤또 데 베라노를 시켜 먹었다. 처음으로 한국에서 온 모녀 두 분과 지난번에 만난 H 양까지 합석을 해 오늘 저녁은 J 씨와 나까지 한국인끼리 저녁을 했다. 아주머니의 이런저런 이야기도 듣고 각자의 사연들도 나눠가며 작은 산토베니아 데 오카의 밤이 지나간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15일 산토베니아 데 오카의 Albergue Camino de Santovenia
가격: 16유로 (2만 3천 원)
구글평점 4.7, 내 평점 4.5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없음
담요/이불 유무 : 없음
위치 : 메인 길에서 벗어난 아무것도 없는 곳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메인길에 숙소를 구할 수 없다면 다시 올 것도 같다.
나의 경험 : 12인이 같이 쓰는 이런 군대식 오픈형 이층침대 도미토리는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다. 물론 내가 가능하면 개인실이나 적은 수의 사립 호스텔에서 지냈기 때문이지만 너무 뻥 뚫려 있어서 살짝 부담스러웠음. 그래도 불편한 건 크게 없었다. 가격대비 부족함 없이 잘 쉬었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지만 1층 식당에서 친절한 호스트들이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음식을 제공해서 점심, 저녁까지 잘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