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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점심 먹으러 오세요

2023년 9월 13일 순례길 9일 차 나헤라에서 산토도밍고데라칼사다

by 몽키거
2023년 9월 12일 Camino de Santiago Day 9
Nájera - Santo Domingo de la Calzada : 20.93 km
출발 06:20/ 도착 11:00, 총 4시간 40분 걸림


나 이제 좀 잘 걷나?

나헤라에서 시작해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도착하는 오늘 일정. 아무리 일찍 도착해도 너무 이른 오전 11시에 도착해 버렸다. 오늘 묵는 호텔은 체크인 시간이 한 시간이나 남아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카페 콘 레체를 한 잔 마시며 기다려본다. 걸을 때는 화장실 갈까 봐 꿈도 못 꾸는 우유 잔뜩 들어간 라테를 마시고 있으니 행복하다. 큰 창 옆에 앉아 지나가는 순례자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크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 응원한다. 다들 웃거나 손을 흔들며 나의 응원을 받아준다. 이렇게 순례자인 우리는 옆에서 나란히 걷지 않더라도 모두가 친구고 서로의 열렬한 응원단이다.


카페 콘 레체 너무 맛있잖아~ 빨리 끝내니 이런 여유가 생기네


텔레토비 동산을 넘어보자
저~기 길 위에 사람이 점으로 보인다


오늘은 걷는 게 너무 쉬운 날이었다. 이제 20 km면 정말 가볍게 느껴지는 것 같다. 뭐야 나 프로야? 물론 이 순례길 여정을 끝낼 때까지도 난 아마추어겠지만 겨우 9일 차에 적응해 가는 내 몸이 신기하다. 오늘은 텔레토비 동산 같은 끝없는 언덕에 언덕을 넘었다. 내 앞 저~기 멀리 가고 있는 사람이 하나의 점으로 보이고, 내 뒷사람도 점으로 보이는 그런 간격으로 거진 혼자 걸었다. 아래에서 언덕 위 꼭대기를 걷는 사람을 보고 있자면 바다같이 끝도 없는 광활한 하늘 속으로 사람이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이 보여 꾀나 시적인 풍경이었다. 이럴 때 누군가와 함께 걸으며 좋은 이야기를 나눴다면 가슴 깊이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이 참 아름다운 길이었다.

하지만 사람마다 걷는 속도가 다르기에 같이 오래 걷기 힘들다는 건 오늘 길만 봐도 알겠다. 개인적으로 친구나 가족이랑 함께 이 길을 걷는다는 건 또 다른 도전으로 힘이 배로 들 것 같다. 속도와 체력 다른 거 둘째치고 원래 아는 사람이랑 있으면 엄살이 늘어... 나는 혼자 오길 잘한 것 같다. 엄살 많은 나는 혼자 있을 때 제일 강하다.


호의는 조건 없이 순수하게
멀리 작게 보이는 도네이션 바에서 자석을 샀다


오늘은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길에서 도네이션 바를 하는 한 아저씨를 만났다. 자신이 만든 자석들, 열쇠고리 들이랑 바나나 같은 과일을 몇 종류 두고 계시는데 사진을 찍지 말라고 거친 말투로 막으신다. 응? 왜일까.. 뭐지 이 도네이션바 몰래 하시는 사업인가, 아무한테 들키면 안 되나? 어쨌든 바나나를 하나 집고, 옆에 자석은 얼마인지 물어보니 짜증 나는 투로 “다 도네이션이라고 했잖아!"라고 말하신다. 솔직히 기분이 좋진 않았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며 이 부분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남의 반응에 민감한 걸까?


나는 새벽에 순례길을 시작할 때 모든 사람에게 밝게 인사를 하는데 대부분이 즐겁게 대답을 해주지만 반응이 영 시원찮은 사람, 인사를 안 받아주는 사람을 만날 때 기분이 상한다. 어떻게 보면 내가 베푼 인사라는 작은 호의만큼 내가 그 사람들에게 나와 같이 반응하길 바라나 보다. 인사가 하고 싶다면 어떤 리액션이 돌아오던 내가 그들에게 밝게 인사를 했다는 것 만으로 즐거워야 하는 것 같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한다면 호의지만 원하는 리액션이 돌아오길 바라는 순간 난 그들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앞으로 스스로가 호의를 베풀 때 순수한 의도를 전달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의 도네이션 바에서 처럼 남과의 상호작용에서도 좀 덜 신경 쓰고, 남의 반응에 '응,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덜 감정을 이입시켜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해봤다. 나이가 들면서 더 무던해져야 하는 것 같다.


젊음은 꿈과 열정을 실현하는 것
멀리 호주에서 혼자 오신 아주머니 이야기
한국인 아주머니가 찍어주신 사진이라 더 소중하다


산타 도밍고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에 한국인 아주머니 두 분을 만났다. 두 분이 같이 오신 건 아니고, 길 위에서 만나셨다고 한다. 그런데 한 분이 세상에나 호주에서 여기까지 혼자 오셨다해서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우리 엄마와 비슷한 나이 같으셔서 더 마음이 가는 선한 분이다. 내 이름과 나이도 물어보시고 딸과 나이가 같다며 반가워하신다. 우리 엄마 생각이 참 많이 났다. 나도 엄마랑 같이 산티아고를 걸으면 여러 의미로 행복할 것 같은데 우리 엄마는 허리디스크 수술도 한 적이 있으셔서 꿈도 못 꾸는 상황이 참 아쉽다.

내가 “사진 많이 찍으셨어요?”하고 물으니 지금까지 풍경만 열심히 찍으셨다고 하셔서 오늘의 사진사를 자청했다.

"어머님, 저 조개 표시석과 함께 길 걷는 뒷모습을 남겨드릴게요! 저기 자연스럽게 걸어가 보세요!"

처음엔 왜 뒷모습을 찍냐고 하시던 두 아주머니가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 참 좋아하신다. (며칠 뒤에 다시 만났을 때 내가 찍은 사진을 가족들한테 보냈더니 누가 찍어줬냐고 사진 너무 예쁘다고 고맙다고 하셔서 나도 뿌듯했다.) 물론 원하시는 정면 사진도 잘 찍어드렸다. 걸음이 달라 30여 분간을 함께 걷고 자연스레 멀어졌는데 나보다는 훨씬 길게 일정을 잡으시고 스스로의 호흡에 맞춰 걸으신다는 두 분의 열정과 모든 여정을 응원해 본다. 젊음이라는 게 단지 나이만 어려야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라, 이분들처럼 가지고 있던 꿈과 열정을 실현해 나가시는 것도 젊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거다. 나도 이분들처럼 나이가 들어도 마음에 꿈과 열정이 가득한 그런 젊은 영혼을 유지할 수 있길 바라본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점심 먹으러 오세요
31일 순례길 여정 중 탑 2 레스토랑

오늘의 숙소 Atuvera는 정말 너무 좋다. 어제 묵은 숙소가 덜 좋아 보일 정도로 이곳이 너무 마음에 든다. 방도 2배는 큰 것 같고, 커다란 창문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게 기분이 다 밝아진다. 게다가 어제 San Lorenzo는 58유로였는데 오늘은 46유로, 무려 12유로나 저렴한데 시설은 더 모던하다. 아까 체크인 기다리며 있었던 1층 카페의 커피도 맛있고, 이거 너무 마음에 드는 호텔이다!

커다란 프렌치도어 스타일의 창문을 열고 베란다에 재미 삼아 나가보았다. 아래를 내다보는데 때마침 메구미가 지나가는 게 아닌가! 크게 이름을 불러 위를 보라고 했다. “너 오늘 여기가 최종 목적지야?”물어보니 그렇다고 한다.

"그럼 같이 점심 먹을래?

이렇게 화장한 오후, 나는 점심을 같이 먹을 친구가 생겼다. 정말 몇 초만 더 늦었어도 오늘 못 봤을 수도 있었는데 우리 둘이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짐을 풀고 샤워해야 하는 메구미를 기다렸다가 La Parrilla de Arcaya에서 함께한 점심. 오늘의 식사는 지금까지 산티아고 걸으며 사 먹은 식사 중에서는 정말 최고였다. (물론 선생님이 에스테야에서 구워주신 삼겹살을 이길 식사는 없고, 내가 '사 먹은 식사‘ 중에서는 31일 산티아고 순례길 중 여기가 거진 탑이다.)


첫번재 코스인 흰 아스파라거스와 두번째 코스 소고기


보기에도 먹기에도 만족도 별 다섯 개의 완벽한 식사였다. 18유로 (2만 5천 원)에 3 코스 요리였는데 일단 에피타이저로 화이트 아스파라거스가 나왔고 메인으로는 소고기 안심구이에 감자튀김과 함께 고추랑 피망볶음도 나왔다. 디저트로는 맛있는 플란(계란푸딩). 보통 스페인의 점심 메뉴에 와인이 포함된 거는 알고 있었지만 이 가게는 원하는 알콜 드링크 선택이 가능해 나는 띤또 데 베라노, 메구미는 원하는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작은 차이지만 많은 샵들이 그냥 정해진 와인만 가져다주는데 비해 긴 길을 걷고 원하는 종류의 술로 갈증을 해소하는 캬~하는 순간은 꽤나 소중하다.

이런 식당을 찾은 나를 칭찬해! 레스토랑 자체도 테이블 보가 깔려있는 제대로 된 곳에다 분위기도 좋고 무엇보다 직원이 너무 친절했다. 스페인이 점심 브레이크에 시에스타도 있어 길을 걷다 보면 레스토랑 오픈시간 맞추기도 애매한데 오늘 정말 일찍 도착해서 여유 있게 1시 반 적당한 시간대에 점심을 먹으니 참 좋군 그래. 메구미가 이런 맛있는 곳 데려와줘서 고맙다고 한다. 정말 첫 코스, 메인코스, 디저트와 술까지 다 맛있었던 레스토랑이었고 꼭 다시 들리고 싶다.


*** 앞으로 산티아고를 걸으실 분들은 여기 꼭 들려가셨으면 좋겠다. 메뉴 초이스도 다양해서 모든 코스를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산타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점심 드시러 가세요~***


산토 도밍고 성당과 내일의 일용할 양식


식사를 하고 메구미와 동네 한 바퀴를 돌고 헤어졌다. 나는 슈퍼 Dia에 가서 내일 먹을 과일이랑 간식들을 사 왔다. 늘 그렇지만 외국에서 장 보는 거 진짜 너무 재밌어~ 오늘은 호텔도, 식당도 다 어제 좋았던 곳보다 더 좋아서 기분이 좋았다. 뭐야 이러다 매일매일 점점 더 좋아지는 거 아니야? 어쨌든 어제의 만족감을 또 경신해 준 오늘아 고맙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13일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의 Hotel Atuvera

가격: 개인실, 46유로 (6만 6천 원)

구글평점 4.7, 내 평점 4.8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수건 2개

담요/이불 유무 : 이불 있음

위치 : 완전 시티 초입구, 슈퍼마켓 Dia 바로 앞에 있음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100% 네!

나의 경험 : 기록 경신. 지금까지는 여기가 제일 좋음. 깨끗하고 엄청 넓고, 새로 지은 지 몇 년 안 된 것 같다. 로비도 따로 있고, 1층에 넓은 카페의 커피까지 맛있다. 여긴 꼭 다시 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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