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2일 순례길 8일 차, 로그로뇨에서 나헤라
2023년 9월 12일 Camino de Santiago Day 8
Logrono-Najera : 28.27 kml
출발 06:30 / 도착 13:50, 총 7시간 20분 걸림
말동무가 있으면 시간은 빨리 가지
오늘 날씨도 너무 덥지 않고, 중간중간 구름이 적당히 해를 가려주어 걷기 좋았다. 그래도 마지막 한 시간 반정도는 속도도 늦어지고 조금 힘들지 않았나 싶다. 어제 27 km에 이어 오늘 29 km가 다되는 길을 2일 연속 걸었으니 힘들만하지. 그래도 엄청난 산도 없고 거진 고른 평지들을 걸은 것 같아 난이도는 하라고 볼 수 있겠다.
걷기 시작하고 3시간 정도가 지나 도착한 첫 바에서 샌드위치와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아침에 마시는 우유 들어간 커피를 정말 좋아하는데 화장실을 가고 싶어질까봐 그나마 양이 적은 에스프레소를 선택한다. 주문을 하고 자리를 잡자마자 일본인 친구 메구미를 만났다. 길 위에서 아는 얼굴을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뒤이어 이탈리안 앨비스, 이어서 영국인 이안까지. 모든 사람들이 한 번은 쉬어줘야 하는 때인가 보다. 다들 이곳저곳 동창회를 하는 것처럼 아는 사람들끼리 활기찬 수다가 펼쳐진다. 각각의 일주일간의 산티아고 모험담이겠지 싶다.
아침식사를 한 후 자연스럽게 메구미와 동행을 하게 되었다. 가만히 보면 말수 적은 일본인인 줄 알았던 그녀도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려고 참 많이 노력하는 것 같다. 3시간 정도를 같이 걷고 나서 본인은 사진을 더 찍으며 가겠다고 하는 게 헤어질 때는 또 단호한 일본인의 모습이 보인다. 같이 중간에 다른 바에 들려서 신선한 오렌지 주스도 마셔주고, 말동무가 있어서 길이 덜 힘들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물론 사람 나름이지만 메구미와 나는 잘 맞는 것 같다. 오늘의 동무가 돼줘서 고마웠어, 사진 잘 찍고 금방 또 보자! 멈춤 없이 혼자 씩씩하게 나헤라로 들어간다
야, 너 동양인들 무시하다가 큰일 난다
폴란드인 마르코 이야기
케이스 바이 케이스, 사람 나름이라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 오늘 아침에 걷기 시작하자마자 뭔가 히피 바이브의 폴란드인 마르코를 만났다. 순례자들이 나름의 행색과 짐이 있지만 이 사람은 딱 봐도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그냥 떠도는 사람 같았다. 자기는 스페인 테네리페에서 20년을 산 소믈리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뭐 네가 그렇다니 알겠어. 나도 비행을 할 때 폴란드에 몇 번 갔었고, 지금 가장 친한 친구가 남편이 폴란드 주재원으로 막 배정받아 이사를 간지라 뭔가 친근했다. 그 마음에 대화를 이어갔는데 갑자기 농담을 한다는 게 나에게 눈도장이 찍히고 말았다.
"너 왜 아시안들 눈이 찢어진 눈(Chinky eyes)인지 알아?"
흠... 여기서부터 벌써 잘못되었다. 외국생활 십 년이 넘었지만 일단 칭키아이즈라는 단어 자체는 아시아인의 작은 눈을 비하하는 표현이라 절대 안 쓴다. 모르겠는데?라고 대답하고 그냥 듣고 있으니 손꿈치로 두 눈을 쭉 뒤로 늘리며
"밥 좀 더 줘, 밥 좀 더 (more rice, more ricel) 하고 하도 울어서 그런 거래."라고 말을 한다.
뭐지... 재밌는 거라면 내가 들어주겠어. 근데 말이야 이런 가당치도 않은 인종비하적인 불편한 발언을 내가 참아줄 이유는 없지. 물론 어느 국적의 사람이 했더라도 용납할 수 없는 말이지만, 야... 너 우리나라보다 잘 사냐? 선진국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내가 널 응징하리라!
"마르코, 이런 발언하려면 앞으로 한번 더 생각하고 앞으로 더 조심해라."
굳은 얼굴을 하고 단호히 혼내고 내 갈 길 가려니 따라오며 민망함을 풀려고 한다.
"아니 근데 너네는 왜 밥이 주식이야?"
"그럼 너네는 왜 빵이랑 감자 먹는데?"
시답잖은 질문에 나도 시더운 질문으로 답하고 의도적으로 속도를 내며 길을 재촉했다. 나중에 한 시간 정도 뒤에 다시 마주쳐서는 자기가 아침에 커피를 엄청 마셔야 정신을 좀 차리는데 오늘 못 마셨다고 미안하단다. 뭐 산티아고에 별별 사람이 다 있는 거고, 난 같이 안 걸으면 되는 거니까. 다음에 어디에서 다른 동양인에게 이런 소리를 안 하고 다니길 바랄 뿐이다. 거참 다른 국적의 순례자들끼리 대화 나누는 건 좋지만 서로 예의는 지킵시다!
마음에 드는 숙소, 마음에 들었던 식사
오늘의 숙소는 개인실! 여긴 반드시 다시 올 거라고 다짐할 만큼 지금까지 중에서는 제일 깔끔하고 모던했다. (나중에 여러 개인실들을 더 경험해 보니 여긴 딱 괜찮다 정도였다.) 오늘은 단체 도미토리 형식이 없는 개인실들만 있는 펜션이라 조용해서 너무 좋다. 창 밖에 내 개인 빨래를 널어둘 스탠드도 돼있고, 방에서 보이는 교회의 탑도 예쁘다. 화장실에 작은 플라스틱 대야가 있어 며칠간 진흙으로 더러워진 신발과 커버팬츠 등을 물 받아 야무지게 닦아 널어본다. 아 신발에서 진흙 떨어져 나가는 흙탕물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해. 샤워와 빨래를 끝내고 이제 고픈 배를 채워주러 밖으로 나가본다.
오늘은 혼밥 하러 구글 평점 4.7의 Meraki Gastrobar에 갔다. 음식점이 평점 4.7을 받기가 힘든데 오~ 기대된다. 비까지 부슬부슬 내려서 뭔가 더 분위기 있다. 오늘의 식사도 별 5개! 와인으로 유명한 리오하 지역에 있으니 리오하 와인 한잔 주세요~ 하고 식사랑 함께 한 뒤 계산을 하려니 와인값이 1유로인 게 아닌가! 크~ 이런 게 리오하지역 와인 플랙스구나 싶다. 오늘 나의 메뉴 초이스는 돼지 어깨살에 간장 소스로 볶은 면요리이다. 고기와 면을 함께 같이 먹는데 어딘가 익숙한 맛이 장조림을 떠오르게 했다. 고기도 잘 구워져 있고 양도 적당한 데다 면과 고기 밸런스도 좋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대망의 디저트!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먹어온 치즈케이크 탑 3에 가뿐하게 들어올 인생 치즈케이크를 만났으니... 뭐야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작년에 서울 갔을 때 흘러내리는 치즈케이크로 유명한 광화문의 멜팅샵 치즈룸의 케이크가 떠오르는 비주얼에 맛 또한 좋았다. 와 이런 퀄리티를 스페인의 작은 도시에서 만나다니 너무 행복하잖아. 나는 디저트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으로 식사와 디저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면 디저트를 끼니 대신 선택할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오늘은 식사도 완벽, 와인도 완벽에 디저트까지 정말 큰 상같은 식사였다. 오후 4시에 마감이라 사람들이 줄어들 때라 정말 럭키하게 내가 거진 마지막으로 먹고 나왔다. 다음에 또 산티아고를 걷게 된다면 여긴 일부로라도 지나가며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은 꼭 먹고 가리라!
밥을 먹고 알캄포 슈퍼마켓에서 물이랑 오렌지주스를 사 오는 길에 너무 기쁘고 신기한 마음이 벅차올라 웃음이 났다. 아니 지금 내가 스페인의 이런 작은 도시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와있다니! 행복감과 스스로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예고 없이 훅하고 올라오는데 참 감사하다. 아직 내가 작은 것에 감동할 수 있구나, 아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살고 있구나 하는 하나의 작은 증표 같아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 느낌은 내가 비행을 시작하고 세계 여러 나라들을 돌며 갖 레이오버를 시작했을 때와 비슷했다. 특히나 이런 소도시같이 동양인들이 많이 없는 곳에서 난 누가 봐도 이방인인데 그 느낌이 싫지 않다. 은근히 재밌기까지 하다. 지금은 일로 비행을 온 것도 아니고, 내가 그 힘들다는 산티아고를 걷고 있어! 스스로가 대견하고 웃기기도 해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계속 실실 웃음이 났다. 그래! 모든 여정에 감사하고, 많이 배우고, 많이 즐기자! 오늘도 잘 걸었고, 내일도 파이팅이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12일 나헤라의 Pension San Lorenzo
가격: 개인실, 58유로 (8만 2천 원)
구글평점 4.7, 내 평점 4.3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수건 2개 담요/이불 유무 : 이불 있음
위치 : 시티지만 슈퍼마켓은 10분 이상 걸어 나가야 했다.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네
나의 경험 : 조용하고, 프라이빗하고, 에어컨 잘 작동하고 좋았다. 나중에 이보다 더 좋은 개인실을 많이 경험해 보니 여기는 평범한 곳에 속했지만 크게 불편한 것 없이 잘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