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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산티아고의 벽화마을 벨로라도

2023년 9월 14일 순례길 10일 차, 산토도밍고에서 벨로라도

by 몽키거
2023년 9월 14일 Camino de Santiago Day 10
Santo Domingo de la Calzada - Belorado : 22.67 km
출발 06:20/ 도착 11:15, 총 4시간 55분 걸림


모든 순례자를 위한 노래 앨리시아 키스의 Authors of forever
아 웃기다. 산티아고 길 위의 밴딩머신엔 물집 반창고가 가득하다


오늘도 구름이 해를 가려줘서 너무 편하게 걸었다. 언니랑 40분 통화하고, 신랑이랑 1시간 통화하니까 시간이 빨리 지나간 느낌이다. 언니는 9년 전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들었던 음악들이 너무 기억에 남는다고 나한테도 산티아고용 플레이리스트를 꼭 만들어 가라고 했는데 걷다 보니 10일 차가 된 오늘 처음으로 음악을 듣게 되었다. 어둑한 새벽에 언니랑 통화를 끊고 음악 생각이 나 유튜브뮤직에서 랜덤으로 틀은 첫 노래가 앨리시아 키스의 'Authors of forever'였다. 어쩜 지금 산티아고를 걷는 순례자인 나에게 정말 일대일로 말해주는 듯한 노랫말에 코끝이 시큰해진다. 이 곡이 내 산티아고에서 들은 첫 노래가 되었음에 행복했다.


우리는 길을 잃고 외로운 사람들
우리는 이유를 찾고 있지만 다 괜찮아
자, 꿈을 가진 자들을 축하해 보자


정말 순례길을 걸을 계획을 가진 사람들의 플레이 리트로 강력히 추천한다. 어두운 새벽에 오늘도 나만의 의미를 찾아 걸음을 시작하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네가 어디에 있건, 누구건 다 괜찮다고 말해준다. 꼭 내가 이해를 받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힘을 가득 실어주는 노래이니 꼭 들어봤으면 한다. 이후엔 내 최애 샘 스미스의 앨범을 들으며 한참을 신나게 걸었다. 음악을 들으면 걸음도 가벼워지고 신나지만 확실히 생각을 덜하게 되는 경향이 있어서 앞으로 이건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다. 정말 사람 성향 나름인 것 같다.


요즘 아주 발에 날개가 달렸다

오늘도 20 km가 조금 넘는 22.67 km를 걸으며 한 30분은 더 가뿐하게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구간들이 25 km 정도면 힘들려고 하기 전에 딱 알맞게 걷기를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요즘 컨디션이 좋아 그냥~

호스텔 체크인이 12시인데 오늘도 11시 15분 좀 일찍 도착을 해서 가방을 맡겨둔 채 커피를 한잔 하러 광장으로 나가본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카페 Etoile가 눈에 띄어 '아! 저기가 이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방앗간이구나' 싶어 나도 들어가 주문을 한다. 카페콘 레체와 또르띠아가 다해서 3유로라니 스페인에서 이 조합은 사랑이다.


3유로의 행복, 카페 콘 레체와 또르띠아


밖에 앉으려고 둘러보니 미국인 닉이 보인다. 걷기 이틀째인가 길 위에서 만난 닉은 한국에서도 몇 년간 근무한 적이 있는 전직 미군이다. 오늘은 캔디스라는 처음 보는 친구와 있었는데 같이 앉자고 해서 조인했다. 알고 보니 캔디스는 순례자는 아니고, 스페인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닉의 대학동창이라고 한다. 닉이 산티아고를 걷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보러 벨로라도로 찾아온 거다. 20년이 지나서도 이렇게 먼 걸음을 와주는 친구가 있다니 참 멋진 우정이라고 생각되었다.


미국에선 흑인 미국인, 외국에선 그냥 미국인
한국에서 복무했던 미군 닉의 이야기

오늘 닉과 캔디스와 한 시간 남짓 매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나눴다. 캔디스도 흑인인데 지금 스페인에서 살고 있고, 닉도 군인으로 20년을 복무한 다음에 지금은 은퇴를 하고 외국에서 살집을 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흑인으로 살기에 미국은 적당한 나라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미국인에서는 미국인이라는 것보다 흑인이라는 게 더 우선시 되고 무엇을 해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기는 힘든 것 같다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론으론 외국에서 살면 흑인이라는 것이 우선시 되기보다 미국인으로 더 인식이 되는 게 사실이라는 거다. 그래서 결론은 흑인 미국인으로서 미국인답게 살고 싶다면 외국에서 사는 게 유일한 방법이지 싶다고 한다. 오~ 듣고 있는데 말이 된다. 미국 사회에서 백인과 흑인, 라틴계와 동양인이 절대 같은 대우를 받지 않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우선순위를 매기자고 한다면 분명히 순위는 정해져 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서 생활한다면 피부색을 불문하고 그냥 그 나라 사람으로 인지가 확실해진다. 단일민족인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이런 뷰를 가져본 적이 없는데 역시 여러 나라 사람들과 섞여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슈들도 한번 생각할 수 있고 참 신선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뉴스를 봤는데 우리나라도 더 이상 단일민족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지. 외국인과의 결혼도 많아지고, 이민자들의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보아 아마 그 아이들이 컸을 때 지금의 닉처럼 '나는 한국인인데 여기서는 이민자의 자식이나 피부가 다른 한국인으로만 인식되니 밖으로 나가 살면 한국인이라는 이름 그대로 제대로 인정받고 살 수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닉의 이론이 우리나라에도 적용될 날이 그리 멀진 않을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난 이 두 동창의 만남을 계속 방해만 할 순 없을 것 같아 그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나는 체크인을 해야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닉도 한국에서 미군으로 복무할 때 나름 좋았던 추억들이 많아서 그런지 한국인에게 친근함을 느끼나 보다. 언제 봐도 즐겁게 인사해 주고 소소하지만 재밌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이다. 길에서 또 볼 수 있겠지! 내 친구가 산티아고 여정 중 한 도시로 나를 보러 온다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울까 생각해 봤는데 짧은 반나절을 함께하고 헤어지는 게 더 속상할 것도 같다. 멀리서 온 친구 캔디스와 닉이 재밌는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


순례자 벽화의 도시 벨로라도 다시 만나 더 반가운 사람

오늘은 로그로뇨에서 잠시 안녕을 했던 척척박사 J 씨가 벨로라도에 도착하는 날이다. 종아리가 심하게 아파서 로그로뇨에서 하루를 더 쉬고, 근처 빌바오에서 구겐하임 뮤지엄을 갔다가 크게 구간 점프를 해서 벨로라도에 도착했다. 구겐하임에서 야요이 쿠사마 전시전을 하고 있었기에 고맙게도 내가 부탁한 야요이 쿠사마 인형을 사다 줬다. 작년에 일본에 갔을 때도 모리 미술관에서 품절이어서 못 구했던 건데 어쩌다 보니 일본 아티스트의 기념품을 스페인의 빌바오에서 사서 벨로라도에서 배달받다니 거참 대단한 인형이 되어버렸다.


빌바오 구겐하임에서 오신 귀하신 인형


반가운 상봉을 하고 J 씨가 맛있다고 찾아놓은 Cuatro Cantones에서 폭립과 피자를 먹었다. 레스토랑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한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 “메구미상!"을 외친다. 난 어딜 가나 그녀를 찾는 게 참 익숙하다. 다행히 메구미도 식사를 막 시작한 터라 같이 앉아 식사를 했다. 순례자들의 인사는 늘 "오늘 길 괜찮았어? 지금 도착한 거야?"로 시작되는 것 같다. 반가운 만남들에 비해 오늘의 식사 총평은 정말 별로다. 양은 괜찮은데 립은 덜 익은 느낌이 나고, 샹그리아는 냉동과일이 찔끔 들어있다. 평에 비해 너무너무 아쉬운 식사다. 옆에 앉은 메구미는 단품메뉴 말고 순례자 3 코스로 시켰는데 그게 더 나아 보였다. 하지만 메구미는 나와 함께 먹은 어제 산타 도밍고 데 라 칼사다의 점심이 비교 못하게 훨씬 맛있었다고 말한다. 그래... 어제 식사는 정말 환상이긴 했어.


벨로라도는 마을 곳곳에 예쁜 벽화가 참 많다


아쉬운 식사를 마치고 다 함께 동네 산책을 한다. 이곳 벨로라도 동네는 정말 작지만 곳곳이 산티아고 순례길과 관련된 예쁜 벽화로 꾸며져 있다. 한두 개가 아니라 정말 온 마을이 작정을 하고 벽화를 그린 것 같다. 다른 스타일들의 재미난 벽화들을 보며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비록 나는 검은 기능성 티셔츠에 스포츠 운동복 바지 차림의 누가 봐도 순례자 같은 옷이지만 알록달록한 벽화 앞에서 사진도 남겨본다. 그만큼 그냥 지나가기에는 아쉬울 만큼 벽화들이 예쁘다. 이곳 주민들의 작품들이 내게는 순례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작은 선물 같았다. 지금까지 돌아본 도시들과는 다르게 조금 더 순례자들 어서 옵시오 ~ 환영합니다 느낌이라 따뜻하고 고맙다.


질문이 잘못되면 제대로 된 대답이 없겠지
산티아고 길 위의 비석에서 신랑과의 대화까지

일행과 헤어지고 방으로 돌아와 신랑과 다시 긴 통화를 했다. 아침에 걸으면서도 했고 도착해서도 두 시간은 더 통화한 것 같다. 우리 부부는 원래 통화를 자주, 길게 하긴 한다. 내가 뜬금없이 물었다.

"너는 내가 널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날 더 사랑한다고 생각해?"

"응, 난 내가 널 더 사랑한다고 생각해."

이 대답을 듣고 난 어이없다고, 내가 널 더 사랑하는 건 자명하지 않냐고 되물었는데 남편이

"나는 내가 널 더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만약에 내가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는 것 같아’하면 넌 행복할 것 같아? 아니잖아. 질문이 잘못된 거 아닐까?" 바로 이때 내가 오늘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서 벨로라도로 가는 길에 찍었던 한 비석의 글귀가 떠올랐다!


오늘 걷는 길에 찍어둔 비석 사진, 글귀를 보라!


Most of time, when you don't get answer,
it's because you didn't find the good question.
네가 대답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네가 맞는 질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맞는 말 아닌가! 딱 바로 이 상황에 어울리는 글귀였다. 그것도 내가 몇 시간 전에 길 위에서 산티아고의 비석에 쓰여있던 글이다! 신랑이 나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하건 그건 나에게 맞는 대답도 아니고 내게 즐거운 대답도 될 수 없었을 거다. 그런 면에서 내 질문이 좋은 질문이 아니었다는 거 인정! 이렇게 신기하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평범하지만 진귀한 배움의 경험을 만들어가고 있다. 어우 뜨끔할 정도로 타이밍이 기가 막히네. 신랑에게 오늘 찍은 비석의 글귀 이야기를 하면서 내 질문이 잘못되었소 미안하오 소심한 고백을 해본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더 사랑한다고 각자 생각하는 이 행복함을 잘 이어가자고 함께 다짐을 한다. 세상에 어떤 부분들은 낱낱이 밝힐 필요가 없는 채로 사는 게 더 행복한 것도 같다. 그리고 오늘의 나처럼 잘못된 질문을 할 바에는 아예 아무것도 안 물어보는 게 더 낫기도 하다.


나 벌써 1/3을 걸었어

오늘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한 지 10일이 되었다. 전체 여정의 1/3을 걸은 건데 지난 3일은 혼자 걷고, 개인실에서 푹 쉬며 참 편하고 좋았다. 순례를 시작하고 처음 5일은 걷는 거에 적응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문화에 적응하고, 알베르게나 호스텔의 공동시설에 적응하느라 정신없고 기운이 많이 빠졌다. 모든 게 새로우니 많이 긴장을 했던 것 같다. 이렇게 10일 차가 되니 내가 어떤 스타일의 분위기를 좋아하는지, 어떤 속도가 가장 편한지 스스로에 대해 적잖게 알아간다. 나는 혼자만의 걷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던 것 같다. 애초에 여기 온 이유가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리고 난 혼자 있을 때 가장 씩씩하고 강한 것 같다.

10일간 몸이 많이 적응된 것도 있고 최근 며칠은 km 대가 20대 초반으로 적당했던 것도 있고, 혼자 걸어서 원하는 속도로 마음대로 갈 수 있어서 편했다. 개인실을 쓰며 남들 덜 신경 쓰고 더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해 컨디션도 좋았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섣부르게 난 이제 잘 걸어! 하고 속단 내리지 말고 앞으로도 조심해서 하루하루 잘 적응해 보자고 다짐해 본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14일 벨로라도의 Hostel Punto B

가격: 개인실, 38유로 (5만 4천 원)

구글평점 4.7, 내 평점 4.3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수건 2개

담요/이불 유무 : 이불 있음

위치 : 시티 가운데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네, 아마도요.

나의 경험 : 구글평점 4.7은 아마도 도미토리에서 지낸 사람들의 리뷰인 것 같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도미토리에도 이 층침대가 아니라 다 1인용 침대여서 좋았다고 한다. 내가 묶은 개인실은 깔끔하고 소박하다 정도의 평. 너무 좋다는 느낌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개인실은 2인이 쓰는 곳을 혼자 쓰니 가격 대비 정말 괜찮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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