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1일 순례길 7일 차, 로스 아르코스에서 로그로뇨
2023년 9월 11일 Camino de Santiago Day 7
Los Arcos - Logrono : 27.7 km
출발 06:45/ 도착 13:20, 총 6시간 35분 걸림
비를 피할 수 없는 그날이 왔다
으악... 비가 온다. 아주 많이 온다. 건물의 가장 위층에 머물기에 천장을 때리는 빗소리가 너무 잘 들려 마음을 더 어지럽힌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7시가 다 되도록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있다. 비가 오는 걸로 이렇게 심란한 적이 내 인생에 또 있었을까. 눈앞이 깜깜해진다. 이 비는 도저히 기다린다고 멈출 모양새가 아니기에 어쩔 수 없이 출발한다. 빗물이 신발 속으로 들어가는 걸 막아줄 종아리 춤 높이의 스패츠를 착용하고 그 위에 방수 커버 바지까지 입었다. 가방을 메고 그 위로 전체를 다 덮을 우비까지 썼다. 이거야 원 무슨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처럼 철저한 장비 체크에 짧게 큰 숨을 훅훅 내쉬고 나가는 게 우스워 보이지만 나 혼자만 웅장하다.
걸음을 시작한 지 20여분 만에 엄청난 진흙탕을 만났다. 복숭아뼈까지 잠기는 끈적한 이 진흙탕에서 넘어지면 정말 진흙귀신이 될 것 같다. 같은 숙소에서 누가 먼저 나가나 눈치게임을 하다가 비슷한 시간대에 우르르 같이 나온 사람들끼리 앞뒤로 진흙탕을 건너며 어이가 없어 다 같이 깔깔 웃었다. 이 당황스러운 여정을 나 혼자가 아닌 동지들과 함께하니 심지어 즐겁기까지 하다. 다행히 10여 분간의 고전 끝에 진흙탕 구간은 짧게 끝났지만 내 신발은 구석구석 꼼꼼하게 진흙팩을 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도 나름 고어텍스라 복숭아뼈까지 잠기는 높이의 진흙에도 내 발을 마르게 지켜주었다니 와... 나이키 페가수스 너 칭찬해. 다른 고가의 신발 안 부러워! 살아있어! 감탄을 하며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고마워 나이키야, 내 양말을 젖지 않게 지켜줬어!
비가 오면 좋은 점이 하나 있다
1시간 정도를 비를 맞으며 걸었는데 엄청 쏟아지는 비가 잦아지면서 나름 걸을만했다. 오죽하면 총 7일 중 오늘이 가장 긴 거리를 걸은 날인데 가장 쉽게 걸은 날이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비? 당연히 안 오는 날보다 힘들지. 근데 비가 오면 구름이 끼고 어둑한 날씨 덕에 해. 가. 없. 다. 이게 정말 중요한 게 해가 가려지니 일단 눈도 덜 부시고 덜 더워서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와 이건 정말 신세계였다. 비도 왔는데 거진 28 km의 거리를 6시간 반에 걸었다니 이건 엄청 빠른 거다. 혼자 걸어서 내 페이스대로 걸은 것도 있고, 비가 멈춘 뒤에 언제 올지 모르니 빨리 진도를 빼두자 싶어서 서두른 것도 있지만 정말 걷기 좋았다. 어제 낮잠에 밤잠까지 실컷 자서 컨디션이 좋은 것도 있고 아마 내가 평지에서 조금 빠른 스타일인가도 싶다.
혼자 걷는 게 좋을까, 같이 걷는 게 좋을까?
출발하고 얼추 한 시간 만에 비는 멈췄지만 중간중간 보슬비는 내렸다 말았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이만한 게 어디야.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계속 걸었다. 아직까지는 무념무상 반, 생각 반을 하며 걷는 것 같다. 근데 확실히 혼자 걸을 때가 온전한 내 시간이지 같이 걸으면 서로에게 맞춰주며 걷다 하루가 다 끝난다. 서로 의지도 되고, 같이 밥도 먹고 챙겨주고 정보도 나누는 좋은 점도 많다. 특히나 내가 같이 걷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속도와 공간을 존중하기에 더 특별한 것 같다. 하지만 이 멀리 산티아고까지 와서 내면의 아무런 각성 하나도 못하고 간다면 정말 아쉬운 시간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혼자 걷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난 오늘 같이 혼자 고생도 좀 하며 걸어보는 날이 꾀나 마음에 들었다.
기념품, 참새 방앗간
로그로뇨 입성을 1시간 정도 앞두고 길거리의 작은 가판대에서 하는 기념품 가게를 만났다. 내가 찾아간 게 아니라 지나가는 길에 짠하고 버티고 있으니 기념품 마니아가 어찌 그냥 지나가리. 이제 오늘 도착해야 하는 도시도 목전에 있겠다,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기념품을 살펴본다. 한참을 보고 너무 예쁜 배지, 패치들과 손뜨개로 뜬 순례자 모양의 인형을 샀다. 당연히 언니 것까지 두 개씩 샀다. 뭔가 오늘 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줌이나 되는 기념품을 가지고 손은 무겁게, 걸음은 가볍게 로그로뇨에 들어간다. 팜플로나에 이어 나름 큰 도시라 설렌다.
로그로뇨에서의 송별회
오늘은 선생님의 산티아고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정말 함께 걷는 내내 약이건 음식이건 아낌없이 나눠주셨다. 회사 일정이 있으셔서 어쩔 수 없이 돌아가셔야 하지만 가능하면 일정을 바꿔서라도 우리와 더 걷고 싶었다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했다.
로그로뇨는 핀초바(타파스 같은)로 유명하기에 다들 씻고 핀쵸바 투어를 위해 함께 모였다. 첫 장소는 Taberna del Tio Blas. 여기서 난생처음으로 와인 슬러쉬를 마셨다! 세상에 이런 엄청난 아이디어가 있다니! 이거 한국, 이탈리아 전 세계 어디에서 팔던지 잘 통할 것 같다. 2차는 Bar el Muro에서 끌라라 한잔에 돼지 껍질 튀김과 조금의 타파스, 그리고 3차는 이제 Bar 들은 다 문 닫아서 프랜차이즈인 타코벨로 갔다. 여기서 선생님께 우리가 쓴 엽서랑 자석들을 드리며 우리의 마음을 전했다. 작은 선물이지만 우리가 그동안 감사했고 앞으로 선생님의 연배가 되어서 다시 산티아고를 걷게 된다면 우리가 선생님께 받았던 정들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음을 알아주셨으면 했다.
***기회가 된다면 로그로뇨의 Taberna del Tio Blas에서 와인 슬러쉬 꼭 드셔보시길 바란다. 순례길 통틀어서 여기서 밖에 못 먹는다. 정말 맛있다***
마지막은 버섯핀초로 유명한 Angel에서 샴피뇽 핀초에 띤또 데 베라노로 마무리. 가장 유명한 샵은 가줘야지 인지상정! 로그로뇨의 밤은 다른 도시보다 밝고 시끄러웠지만 몇 날 며칠 시골길을 걸어서 온 우리 순례자들에게는 큰 활력소가 됨은 분명했다.
내일 선생님은 한국으로 떠나시고, 미국 아저씨는 우리보다 더 멀리 걸어가시고, J 씨는 종아리 부상으로 하루 더 머물거기에 우리 모두의 길이 달라진다. 산티아고 길 위의 인연은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해야만 의미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알았나 보다 어떤 교감을 나눴는지가 중요하게 느껴진다. 운좋게 참 고마운 분들을 만나 의지 할 수 있었던 일주일이었다. 나의 첫 산티아고 가족들과 아쉬운 안녕을 한 로그로뇨의 밤이었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11일 로그로뇨의 Winederful
가격: 23유로 (3만 2천 원)
구글평점 4.4, 내 평점 4.8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샤워용 수건을 준다!
담요/이불 유무 : 이불 있음
위치 : 시티 가운데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네!
나의 경험 : 여자만 있는 6인실을 예약해서 쓰는데 (이층침대 3개) 일단 침대가 엄청 크고 넓다. 일회용 천이 아닌 제대로 된 천 시트를 제공하고 수건을 줘서 놀라웠다. 6인실 안에 널찍한 화장실이 있어서 너무 좋았고 에어컨도 우리가 조절 가능해서 시원하게 잘 잤다. 라운지도 널찍하게 소파와 테이블 여러 개가 있고 호스트가 친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