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0일 순례길 6일 차, 에스테야에서 로스 아르코스
2023년 9월 10일 Camino de Santiago Day 6
Estella - Los Arcos : 21.4 km
출발 06:10 / 도착 13:00, 총 6시간 50분 걸림
지금이야! 비가 멈출 때 무조건 출발!
새벽 4~5시까지 비가 엄청 쏟아져서 너무 걱정이 되었다. 지난 5일 동안은 정말 천국이었구나, 내가 축복받은 날씨에서 걸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다. 역시 대자연은 인간을 겸허하게 만든다. 평소 비 내리는 날을 정말 좋아하는데 순례자로서는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다. 길이 젖으면 걸음도 느려지고, 발이라도 젖는 날에는 축축한 채로 반나절을 걸어야 하는데... 그러다 물집이라도 생기면 힘들겠지? 하... 난감한 새벽이다. 준비를 끝내고 밖을 내다보니 비가 잠깐 멈춘 것 같았다. 얼른 가방에 방수 커버를 씌워 둘러메고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한다.
오늘은 처음으로 오며 가며 같이 걷는 4명 (선생님, 미국 아저씨, J 씨 그리고 나)이 같은 곳에서 같이 시작을 했다. 하이킹 경험과 속도가 너무 차이가 나다 보니 결국에는 걸음이 빠르신 어른 두 분이랑 자연스럽게 멀어져 J 씨와 나 둘이 걷게 되었다.
이라체 수도원의 와인은 다음 기회에 엄마 지금 나 손 흔드는 거 보여?
오늘 수도꼭지에서 레드와인이 물처럼 나오는 이라체 수도원을 지나는 날이라 원래는 7시쯤 출발해서 와인 공급이 시작되는 8시에 맞춰 걸어 나갔어야 했는데... 도착하니 6시 50분. 천둥 번개가 치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고 나니 와인이고 뭐고 비를 피해 가는 게 더 중요했다. 수도원을 둘러싼 풍경은 아직 어둡고, 와인은 안 나온다. 기념으로 와인이 나오는 수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 해도 너무 어두워서 플래시를 터뜨려야 그나마 새하얀 얼굴의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비록 와인은 안 나오지만 이 스팟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이라체 수도원의 웹 카메라 덕에 한국에 있는 엄마랑 카메라를 통해 내 산티아고 여정을 잠시나마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재밌었다. 이런 시스템이 있는지 몰랐는데 역시나 J 씨가 알려준 정보였다.
이라체 수도원 실시간 웹캠
https://www.irache.com/es/fuente-del-vino.html
이 사이트에 접속하면 이라체 수도원에서 물이나 와인을 마시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제 언니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놓아서 대강 몇 시 몇 분쯤에 그곳에 도착할 테니 사이트에 접속해서 있으라고 언지해놨었다. 보이스톡 너머로 언니가 "어, 어! 보인다! 너 녹색 가방 커버니?" 하고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가 나 정말 잘 걷고 있는 것 같다고, 거진 일주일을 아픈데 없이 잘 걷는 게 놀랍다고 하신다. “뭐 이 정도야~!" 하고 거스름을 떨어보지만 실은 나도 내가 이렇게 잘 걷고 있는 게 너무 신기하다.
비록 와인은 못 마셨지만 다음번에 와서 맛보면 되지 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불필요한 집착들에서 벗어나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워낙에 긴 호흡으로 하루 종일 걸어야 하는 순례자라 건강히 잘 걷는 거 외에 잡다한 것에 의미 부여를 덜 부여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 이 핑계 대고 산티아고 한 번 더 오자! 와인은 다음번에 마시기로 한거다!
점심 먹고 다시 걷는 기분은 어떤 걸까?
오늘 나 빼고 다른 세분은 로스 아르코스가 아닌 다음 마을로 가시는데 나의 목적지였던 로스 아르코스에서 일부러 나를 기다리셨다가 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하시고 떠나셨다. 내년에 마흔인 내가 한참 어린 동생같이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음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오늘의 메뉴는 빠에야와 샹그리아. 그냥 Bar 스타일의 미리 조리된 것 같은 음식이었지만 반나절을 걸은 후 먹는 음식은 뭐가 되든 맛있다. 앉자마자 일단 오늘의 열일을 한 서로를 칭찬해 주며 샹그리아를 시켜 건배를 한다.
식사를 기다리면서 순례자 여권에 쎄요를 찍기 위해 내가 4명의 여권을 모아 계산대에 갔다. 여권을 4개나 내미니까 주인아저씨가 도장을 찍다 찍다 "아니 왜, 네 손등에도 찍어달라고 하지? “하고 살짝 짜증 섞인 성을 내신다. 내가 “왜 안돼? 그래 손에도 찍어줘 그럼!”하고 손등을 내미니 표정 없던 아저씨가 빵 터져서 웃으신다. 그렇게 난 내 손등까지 합쳐 5개의 쎄요를 받아 나왔다. 다 같이 웃으면서 스페인이란 나라가 점점 더 좋아진다. 스페인은 유쾌할 때가 가장 스페인 다운 곳 같다.
그렇게 오늘의 걸어온 길, 현재 몸의 상태 등 서로의 안부를 묻고 남은 일정의 정보를 공유해 보며 한 시간가량 함께 한 점심 식사가 끝나고 나머지 세 분이 떠날 시간이다. 난 오늘 걸어온 것도 힘들었는데 이분들은 지금부터 두 시간가량을 더 걸어야 다음 마을에 도착한다고 하신다. 점심을 먹으며 이미 오늘의 긴장이 다 풀렸는데, 더 걷는 느낌은 어떤 걸까? 한숨 쉬었으니 더 수월하게 걸으시려나? 난 한 번 쉬면 못 일어날 것 같은데 여하튼 대단한 분들이시다.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진다. 조심해서 잘 도착하시고, 내일 봬요!
낮잠이 아니라 이건 기절인데?
숙소로 돌아와서 산티아고 순례길 시작하고 처음으로 낮잠을 잤다. 그것도 오후 5시부터 저녁 9시까지 4시간씩이나 자버렸다. 이건 뭐 낮잠이라고 하기엔 너무 길고 깊었던 잠이다. 기절한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6일 차라 그런지 오늘은 몰려오는 잠에 눈이 막 감겼다. 왜 정말 졸릴 때 '와~ 이 잠은 진짜 맛있게 자겠다.‘ 싶을 정도로 파도처럼 몰려오는 피곤한 잠. 오늘이 딱 그랬고 세상이 어둑해진 저녁 9시에 일어나서도 너무 잘 자서 후회도 없더라. 이렇게 하루가 그냥 가버렸다. 오늘은 로스 아르코스를 조금이라도 둘러보지도 못한 게 아주 조금 아쉽긴 하다. 가지고 있던 바나나와 과자들로 대강 배를 채운다음에 샤워를 하고 다시 잠을 청해 본다. 낮잠까지 실컷 잤으니 내일은 더 잘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묘하게 든든함을 느끼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한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9일 로스 아르코스의 Casa de la Abuela
가격: 개인실, 40유로 (5만 6천 원)
구글평점 4.5, 내 평점 4.0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수건 2개 담요/이불 유무 : 이불 있음
위치 : 시티 가운데. 큰 차이는 없음.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아니요
나의 경험 : 개인실을 예약했음에도 두 방이 화장실을 같이 쉐어 해야 하는 형태였다. 방은 크고 넓지만 쾌적한 느낌은 안 들고 좀 오래된 시골집 느낌이었다. 개인실은 3층 가장 위층에 있었는데 엘리베이터도 없음. 샤워실 작고, 물 내려가는 게 느려서 살짝 불편했지만 샤워젤, 헤어드라이어가 배치되어 있었던 점은 좋았다. 방들로 올라가는 계단과 벽화들이 예뻐서 유명한 거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