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8일 순례길 4일 차 팜플로나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
2023년 9월 8일 Camino de Santiago Day 4
Pamplona - Puente la Reina : 23.65 km
출발 06:00 / 도착 12:50, 총 6시간 50분 걸림
순례길, 생각보다 힘들긴 한가보다
산티아고 순례길 4일 차 새벽이 밝았다. 늘 10시쯤에는 자려고 노력하는데 잠들었다, 깨었다를 반복하다가도 새벽 4시경 근처에는 확실히 잠을 자고 있긴 한 것 같다. 남들에게 피해 안 가게 알람 소리를 신경 쓰며 자서 그런지 몰라도 항상 기가 막히게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고 있다. 일어나자마자 폰을 확인하는데 내가 비행할 때 만나 지금까지 연락하는 좋아하는 선배언니한테서 장문의 문자가 와있었다.
… 진짜 쉽지 않은 길이고 아직도 햇볕 강할 때라 그 먼 길 걷느라 너무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아 걱정도 많이 되는데,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면서 힘듦을 같이 나누고 서로에게 특별해진다는 거 아니까 걱정되는 마음 붙들고 있어. 그냥 우리 00 고생 많이 하고 있을 거 같아서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 고행을 하고 온 우리 00은 더 사랑 가득하고 단단하고 반짝거릴 텐데 언젠가 네가 나를 아득하게 느낄까 봐 나도 조금 더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하루야. 힘든 일정 소화하고 있을 우리 00 힘내!!
겨우 3일 걸었고 생각보다 잘 걷고 있었기에 괜찮은 줄 알고 있었는데 이 문자를 보고 내 캡슐 침대 안에서 펑펑 울었다.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고맙고 외딴곳에 와서 끝도 없어 보이는 길고 긴 길을 걸으며 내 생각보다 몸과 마음이 약해져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다. 아침부터 감동의 쓰나미가 훅 몰려오는데 그 강도가 평소보다 커서 나도 흠칫 놀랐다. '그래, 피곤했나 보구나, 나를 살피며 가자' 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달래 본다. 침대에서 그렇게 조금의 시간을 보낸 뒤, 나는 오늘도 긴 길을 걸어야 하는 순례자니 눈물을 닦고 길을 떠날 준비를 시작한다. 언니의 문자로 마음이 따뜻해졌으니 그 힘으로 또 열심히 걸어야지 다짐을 하고 하루를 시작해 본다.
혼자 걷는 산티아고, 오늘은 생각을 해보자
오늘은 혼자 걷기로 마음을 먹었다. 원래가 혼자 걸으며 나에 대해 생각을 하기 위해 온길이니까. 오늘 씩씩하게 혼자 잘 걸었다. 오늘의 난이도는 별 5개 중 2개? 그늘이 없고, 큰 언덕 하나에 30분 정도 돌길 내리막. 그래도 첫날 피레네산맥 이후로 혼자 걷는 건데 오, 잘 걷는다 싶다. 내가 의외로 평지에서도 잘 걷고, 언덕도 쉬지 않고 꾸준하게 잘 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엄청 가볍게 걷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지만 말이다. 힘은 드는데 최소한 여기 스페인은 후덥지근한 습도가 있는 곳이 아닌 마른 더위라 타격감이 훨씬 적다. 역시나 오후 12시가 딱 넘으니 해가 무섭게 더워지긴 했다. 그래도 탁 트인 풍경도 좋고, 혼자 잘 걷는 씩씩한 내 모습이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새로운 한국인과의 만남
이탈리안 엘비스가 소개해준 H 양의 이야기
한참의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던 중 앨비스라는 이탈리아인을 만났다. "너는 이탈리안인데 어떻게 이름이 앨비스가 되었니?" 물으니 자기도 안다고, 자기가 있는 지역 쪽에선 옛날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단다. 조부모들 윗세대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나 보다.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나지만 이런 미국 스러운 이탈리안 이름은 처음이라 재밌어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어, 나 저기 한국인 여자 3명 지나왔어."하고 알려주는 게 아닌가. 그동안 남자 한국인들만 만났는데 이번엔 여자분들이다! 궁금하던 차에 저 멀리서 올블랙 착장을 하신 작은 체구의 여자 한분이 올라오신다.
올블랙이라... 이건 분명히 한국인이지! 즐거운 마음에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수줍게 인사를 건네는 H양은 일을 잠시 그만두고 이곳에 와있다고 한다. 걷는 중에 정말 이상한 한국아저씨들을 만나 불쾌한 일들을 당하고 지금은 다행히 뒤따라 올라오고 계시는 한국인 모녀를 만나 함께 걷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이 멀리 좋은 길을 걸으며 안 좋은 분들을 만나 마음고생을 한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같이 속이 상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 걸으니 참 착하신 분 같은데 그런 착함을 이용하는 나쁜 한국 아저씨들이 있다니 화가 날 정도였다. 가끔씩 여기 산티아고를 동호회나 클럽 형태의 단체로 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마음 맞는 나쁜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건달같이 안 좋은 행태로 여자 순례자들을 대하기도 하나보다. 모든 세상이 그렇진 않지만 나는 정말 순진했는지 몰라도 순례길에는 나름의 목적을 가진 선한 사람들만이 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차에 H 양의 경험을 듣고 '아, 내가 운이 좋아서 좋은 인연들만 만나고, 나름 보호받으면서 걷고 있었구나 ‘를 느꼈다.
힐링을 하고자 시작한 길을 시작하자마자 사람들에 의해 상처를 받은 H 양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모든 한국인이 그런건. 아닐 거라고, 나는 좋은 사람들이랑 걷고 있다고 말해줬다. 둘이 같이 걸은지 얼마 안 되어 나타난 카페에서 신선한 오렌지주스를 사서 한 잔 건네며, 오늘도 남은 일정 파이팅하라고 말한 뒤 각자의 길을 걸었다. 조금 조심하는 모습이 보이는지라 나도 그냥 무조건 한국인 여자라는 이유 하나로 마구 친한척하고 싶지는 않았다. 산티아고에서 만나는 인연들이 특별하다지만, 각자의 공간과 시간과 속도를 서로 존중하는 게 선행되는 길인 것 같다. 모든 존중이 바탕이 되고 난 후에 길 위에서 서로의 프레임이 교차될 때 비로소 우연한 만남이 인연으로 특별해지는 순간이 시작될 것이다.
용서의 언덕 : 여기에서 용서해 주는 거 맞나?
열심히 걸어 드디어 용서의 언덕에 도착했다. 산티아고 후기들을 읽을 때 정말 많이 봤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익숙한 순례자들의 형상을 구현해 둔 철재 구조물들을 보니 뭔가 꿈을 꾸는 것 같다. TV로만 보던 연예인을 직접 본 느낌이랄까? 실감이 안 난다. 언니가 그랬다. 산티아고를 걷다 보면 모두를 용서해야 하는 구간이 있다고. 여기가 이름도 용서의 언덕이라고 하니 여긴가 싶어서 '제가 용서할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에 제가 용서를 해야 할 정도로 미워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한 제 스스로가 용서받고 싶습니다. 용서해 주세요.‘하고 빌었다.
여긴 뭔가 산티아고의 포토스팟이라고 해야 하나? 초반에 이런 유명한 곳이 처음이라 나도 사진을 꼭 남기고 싶어 지나가던 미국인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피터는 팜플로나에 4년 정도 산 경험이 있는 신기한 미국인이었다. 자기는 용서의 언덕에 벌써 4번째 올라오는 건데 늘 여기까지만 왔지 산티아고 순례를 끝낸 적은 없어서 이번에 드디어 완주를 결심해서 가고 있는 중이라 한다. 내가 서로 사진을 찍어주자 하니 자기는 많이 찍었으니 나를 찍어주겠다고 흔쾌히 내 폰을 받아 들어줘서 고마웠다. 나도 멋진 사진을 한 장 남기고 남은 길을 재촉해 본다. 나중에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해서 언니에게 물어보니 용서를 구하는 구간은 여기가 아니라고 한다. 어쩐지 너무 초반이다 싶었어. 한참을 웃고 그래도 나 용서할 거 다 한 것 같다고 농담하며 재밌는 추억으로 기억하기로 했다.
드디어 산티아고에서 호텔 개인실을 경험하다
숙소비가 왜 200만 원이 되었는지 지금부터 시작
오늘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지 4일 차에 드디어 호텔에서 개인실을 쓰는 날이라 걸음이 더 가벼웠던 것 같다. 내가 숙소비로 200만 원을 넘게 쓴 이유가 이제 조금씩 설명이 가능해지기 시작하는 날이다. 7만 3천 원(52유로)을 주고 El cerco라는 곳에 머물렀는데 일단 로비가 모던해서 느낌이 좋았다. 여러 명이 같이 묵는 숙소가 아니다 보니 사람들이 북적이지도 않고 나만 혼자 조용히 체크인을 하고 룸키를 받아 올라갔다. 생각한 것보다 방은 작았고 침대도 정말 딱 1인용 침대였지만 들어가자마자 에어컨을 켜고 누우니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개인방, 개인욕실에 샤워젤, 샴푸도 있고 수건까지 있다니 그동안 비행을 하며 정말 좋다는 호텔에서 수많은 레이오버를 했지만 오늘은 최소한의 것들만을 갖춘 이곳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곳으로 느껴진다. 짐을 푸는 것도 소음과 공간 신경 쓰지 않고 다 열어 널부러두고, 샤워도 개인욕실에서 신경 쓸 것 없이 오래 하고, 소리 죽일 것 없이 마음껏 통화도 하니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다. 3일 동안 다른 사람들과 시설을 공유하며 써오던 중 4일 차에 개인실이라, 매우 적절한 시점인 것 같다. 오늘은 제대로 긴장을 풀고 편하게 잘 쉬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전직 승무원 짬밥 나오는 혼밥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뜨거운 샤워를 즐기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오늘은 혼자 걸었기에 내 타이밍대로 먹고 싶은 시간에 나가본다. 스페인의 레스토랑은 점심과 저녁사이 브레이크 타임이 길기 때문에 조금 서둘러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으면 가게문을 닫는다. 그리고는 적어도 저녁 6시나 되어야 밥을 먹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오늘도 구글맵으로 리뷰들을 확인한 다음에 평점 4.4의 Bar Restaurante Gares로 갔다. 종업원 한 명이 야외 테이블을 포함해 안까지 혼자 서빙하는 게 보였고, 기본 테이블 세팅을 해준 뒤 메뉴판을 가져다주고, 주문을 받기까지 많은 테이블들이 오래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다. 얼른 구글맵 리뷰들을 보며 내가 먹을 음식을 사진으로 캡처해 놨다. 한 10분이 지나 테이블 세팅을 해주러 온 종업원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나는 메뉴 안 가져다줘도 되고, 띤또 데 베라노 한잔에 여기 이 사진이랑 같은 이베리코 돼지구이 바로 주문할게."라고 모든 주문을 한방에 끝냈다. 그래서 남들이 음료 주문을 시작할 때 난 벌써 음료에 메인음식까지 받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그분들이 음식을 주문할 때 난 식사가 거의 끝났다.
유럽사람들아, 이게 전직 승무원의 혼밥 짬밥이란다. 전 세계를 돌면서 눈치가 백 단이 된 나이고, 특히나 유럽은 서비스를 여유 있게 한다는 거 말해 무엇하리. 게다가 여긴 느리기로 소문난 스페인이고 시에스타 시간이 다가와 마무리하는 시간대니 내가 더 빨라야 한다. 고추튀김에 감자까지 같이 나온 이베리코 돼지구이는 신기하게 사과소스와 같이 나와서 더 맛있었다. 열심히 걸은 뒤에 맛있는 스페인 음식과 술 한잔이라니 세상에 이렇게 제대로 된 보상이 있을까.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고 하루 중 가장 반짝이는 하이라이트다.
밥을 먹고 느려진 걸음으로 숙소로 돌아가던 중 메구미를 만났다. 이제 점심 먹을 곳을 찾아볼 거라는 그녀의 말에 방금 내가 먹은 곳을 추천해 주고 잠시나마 둘이 시티를 함께 둘러봤다. 메구미는 도착 후에 캐논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그날의 도시들을 찍고 다닌다. 그런 꾸준함이 대단하다. 메구미와 헤어진 후 장을 봐서 오늘과 내일의 간식을 챙기고, 빨래도 해서 호텔 뒤뜰에 널어두었다. 오늘은 조용히 온전한 나만의 휴식 시간을 가져보며 또 다른 방식으로 걷기 후의 시간을 즐겨본다. 함께면 함께라 즐겁고, 혼자면 혼자여서 여유로운 산티아고 걷기 참 재밌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8일 푸엔테 라 레이나의 El cerco
가격: 개인실, 52유로 (7만 3천 원)
구글평점 4.7, 내 평점 4.0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수건 2개
담요/이불 유무 : 이불 있음
위치 : 바로 뒤가 슈퍼마켓, 작은 도시라 큰 차이는 없음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아니요
나의 경험 : 이후에 크고 작은 펜션이나 호텔을 많이 사용해 보니 여기가 제일 작고, 별로인 호텔이었다. 딱 혼자 자기에도 침대가 조금 작고 편하지 않았고, 가격도 이 정도면 비싼 축에 들어간다. 화장실은 정말 신식에 깔끔했다. 불평할 건 크게 없는데 칭찬할 것도 딱히 없는 이곳이 구글평점 4.7 이라니 조금 의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