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7일 순례길 3일 차, 수비리에서 팜플로나
2023년 9월 7일 Camino de Santiago Day 3
Zubiri - Pamplona : 20.25 km
출발 07:10 / 도착 14:10, 총 7시간 걸림
산티아고에서 먹는 라면
힘을 내라 팜플로나까지
오늘 아침은 선생님이 끓여주시는 라면으로 시작한다. 이탈리아에 살면서도 잘 안 먹는 라면인데 와~ 여기선 꿀맛이다. 이른 아침에 우리까지 챙겨주시고 너무 감사하다. 든든하게 먹고 나서는 길. 오늘은 배가 아주 든든해져서 걸으니 더 잘 걸어지겠지?
그런데 어랏? 팜플로나로 가는 길은 난이도가 낮다고 들었는데 계속 올라가는 길도 있고 어제보다는 더 힘들다. 수비리에서 팜플로나 가는 길엔 도로옆을 걸어야 하는 순간도 많고 숲길을 벗어날 때는 해를 피할 곳도 없다. 오후 12시가 되어 내리쬐는 해는 그 강도가 정말 차원이 달라 힘들었다. 내일은 더 새벽에 시작해서 12시 되기 전에 일정을 마쳐야겠다.
이제 겨우 산티아고 순례길 3일 차라 아직 내 페이스라는 게 확실히 정해져 있진 않지만 내 몸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건 확실한 것 같다. 빠르게 걸으시는 선생님과 걸으니 뒤로 처지지 않는 건 너무 좋았지만 내가 쉬고 싶을 때 쉬고, 내가 조금 힘들 때는 천천히도 걸어줘야 긴 하루의 체력 강약 조절이 가능할 것 같다. 오늘은 따라가느라 조금 벅찼고, 무엇보다 내 속도대로 가는 게 중요하구나를 배운다.
그래도 걷는 동무가 있다는 건 확실히 여러모로 좋은 점이 있다. 특히나 사진이 그러하다. 팜플로나로 가는 멋진 길 위에서는 어떻게 찍어도 사진이 다 예술작품 같다. 내가 걷는 뒷모습을 찍어주는 동행들 덕분에 정말 마음에 드는 사진을 남겼고 너무 고마웠다. 아마 사진이 없다면 31일을 걷는 매일의 순례길이 기억 속에서 다 섞이고 하나로 뭉뚱그려지지 않을까 싶다. 혼자 걷는다면 쑥스러워서 셀피를 찍지도 않을 거고 더 나아가 멋진 풍경과 걷는 내 모습을 사진 한 장에 담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나도 열심히 같이 걷는 두 분의 순간을 캡처해 사진으로 남겨본다.
모두가 다른 이유, 다른 계획을 가지고 오는 산티아고
소니아와 이언의 이야기
한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생님과 J 씨와 걷다가 잠시 바르셀로나에서 온 스페니쉬 소니아와 걷게 되었다. 모두가 그러하듯 부엔 카미노! 하고 인사를 하며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인연이지만 걷는 속도가 비슷하면 잠시라도 담소를 나누는 게 순례길의 묘미 같다. "어느 나라에서 왔니?" 하고 묻는 소니아에게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이 먼 길까지 왔냐고 정말 대단하단다. 소니아는 잠시 시간을 내서 일주일만 걷고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간 뒤 나중에 여유가 날 때 다시 와서 순례길 마무리를 할 거라 한다. 자기 나라에서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순례길이 있는 기분은 어떨까? 순간 그녀가 부러워진다. 소니아는 중국에서 유학까지 한 현직 침술가라고 한다. 아시아를 참 좋아하고, 내년에는 도쿄에 갈 계획이라는데 다리가 아프면 스스로 놓으려고 침세트도 다 가져왔다고 하는데 순간 아... 나 무릎 아픈데 침을 좀 나줬으면 좋겠다 생각이 훅 스친다. 물론 초면이고, 한국인 체면이 있지 그런 걸 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가서 지금 아픈 곳들 모두 침 좀 맞고 오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소니아는 평소에도 하이킹을 매우 좋아하고, 머리를 맑게 하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를 시작했다 한다.
중간 지점에 있는 큰 카페에서 소니아와는 이별을 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만나 함께 걸은 영국 데본셔에서 온 62세 이언.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전부터 꼭 걷고 싶다고 생각은 했는데 몇 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분을 기억도 할 겸 더 늦어지기 전에 이번에 걷게 되었다고 한다. 나와 영어로 대화를 하면서 여기 산티아고에서 모든 외국인들이 대부분 다 영어로 대화하니 영국인인 자기한테 너무 편하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 한국어 인사를 가르쳐달라고 해서 '안녕하세요'와 '안녕히 가세요'를 한 5분 가르쳤는데 나중에 팜플로나 핀초바 앞에서 다시 만났을 때 정말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해줘서 아주 뿌듯했다. 먼저 같이 사진 찍자고 해주는 이언, 3일을 산티아고를 걸으며 누군가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해준 건 처음이라 반가웠다. 그만큼 우리의 대화가 가볍게 사라지는 게 아닌 기억에 남기고 싶은 한순간이었길 바라본다.
나는 거대한 목적은 아니지만 마흔을 앞두고 30대를 정리하는 기회를 갖고자 이곳에 왔고, 우리 모두가 이언과 소니아처럼 각각의 사연과 목적을 가지고 길을 시작한다. 이언이 원했던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어머니의 추억을 기리고, 편한 마음으로 여정을 마무리하길 바라보고, 소니아도 안전하게 7일간의 일정을 잘 마치고 바르셀로나로 돌아갔으면 한다. 벌써 앞으로 만날 더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나의 첫 대도시 팜플로나와 헤밍웨이의 카페 이루냐
순례자 플레이모빌 들어는 봤니?
팜플로나에 도착해서 선생님이 미국 아저씨, J 씨와 나까지 한국인을 다 모아 식사를 대접해 주셨다. 한국인들이 넘쳐날 줄 알았던 산티아고에서 지금까지는 우리 넷이 만날 수 있었던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게 신기하다. 미슐랭 간판을 받은 핀초바 Gaucho에서 타파스들을 먹고 다음으로 헤밍웨이가 자주 왔다던 카페 이루냐에 갔다. 그러고 보니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등 많은 작품을 쓴 곳이 바로 이곳 팜플로나다. 게다가 우리가 간 카페 이루냐에서 집필을 참 많이 했다고 한다. 스페인에 오니 이런 대작가들의 흔적이 있는 장소도 직접 올 수 있고 이게 바로 유럽 플렉스가 아닐까 싶다.
팜플로나는 나름 대도시라 기념품 샵들도 매우 잘 되어 있었다. 카페로 이동하는 길 위의 많은 가게들 중 한 가게의 쇼윈도에서 넋을 잃고 말았다. 내가 찾은 건 바로 순례자 플레이모빌! 플레이모빌을 막 수집할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스타벅스와 콜라보레이션 했던 것과 크리스마스 데코용 자이언트 산타 XXL 플레이모빌은 샀을 정도의 약간의 관심과 애정은 있는 편이다. 그런데 이 먼 곳 스페인에서 그것도 내가 지금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와중에 귀염뽀짝한 순례자 착장의 플레이모빌을 발견하다니! 너무 즐거워서 선생님과 일행분들께 카페에서 곧 뵙겠다 하고 가게로 바로 뛰어들어갔다.
나는 이런 순간들이 너무 좋다. 작지만 확실하게 나를 행복해주는 아주 별거 아닌 기쁨들. 뭐가 가장 이쁠까 이리저리 비교를 하고 있다가 카운터 뒤편에 전시된 전통 순례자 복장을 한 플레이모빌을 발견하고, 저거 두 개요! 소리를 쳤다.
9년 전에 순례길을 걸은 친언니가 나에게 준 미션이 하나 있다. ’ 예쁜 기념품이 보이면 내 것까지 두 개씩 물어보지도 말고 살 것‘. 이유인 즉 언니가 순례길을 걸으며 마음에 드는 기념품을 볼 때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면 더 많은 게 있겠지~하며 다음을 기약하고 계속 넘어갔다고 한다. 정작 산티아고에 도착하니 그전에 봐두었던 것들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것도 많았고, 길 위에서 하나씩 사 모으는 것도 그 순간을 기념하는 좋은 방법이지 않았을까 후회를 많이 했다고 한다. 언니의 말을 떠올리며 내가 맘에 드는 이 플레이모빌을 내 것 하나, 언니 것 하나씩 샀다. 너무 기분이 좋아 카페 이루냐에 도착해 꺼내놓고 사진도 찍어본다.
아 행복해. 산티아고를 완주를 한 뒤 순례자여권과 함께 이 플레이모빌을 액자 안에 같이 넣어둬야지 싶다.
색달랐던 알베르게의 규칙
가방은 침실에 못 들고 들어갑니다
오늘의 숙소도 나름 좋은 곳이었는데 딱 하나 다른 알베르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가방을 침실에 못 들고 간다는 것. 이유인 즉 순례자들이 가방에 배드 버그 등을 달고 들어올 수 있어서 청결유지를 위함이다. 응? 그럼 내 물건들은? 가방은 공용 화장실과 세탁기가 있는 구역에 마련된 곳에 일렬로 쭉 걸어두게 된다. 처음에는 그럼 내가 뭐 필요할 때마다 내려와서 찾아야 하는데 불편한 거 아닌가 싶었는데 적응해 보니 이 시스템도 나름 좋았다. 침실은 캡슐 형태로 되어있어서 프라이빗했고, 모두가 가방을 안 가져오니 그 누구도 부스럭 거리며 가방을 정리하는 소음이 없어서 조용했다. 방안에 널브러진 개인짐들도 없어 깨끗하고 정말 말 그대로 잠만 자는 곳이 되어 쾌적했다. 중요한 물건들은 각 개인 침실 안에 달려있는 사물함에 넣어둘 수 있어 안전하고 편했다. 아직 갈길이 먼데 매번 새로운 알베르게의 구조, 시스템에 적응하는 게 조금은 생소해도 꽤나 재밌다. 31일 간 서른한 번의 짐을 풀고 짐을 싸고, 적응하고 익숙해지고 다시 떠나기를 반복해야 하니 뭐든지 있는 그대로를 의구심 없이 빠르게 받아들이고, 그러려니 하고 사용하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 이런저런 숙소에 대해 재밌는 생각을 해보며 산티아고 순례길 3일 차의 밤도 지나간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7일 Casa lbarrola albergue
가격: 19유로 (2만 7천 원)
구글평점 4.7, 내 평점 4.5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수건 없음
담요/이불 유무 : 담요 없음
위치 : 팜플로나 번화가 가운데라 음식 먹고 관광하고 돌아다니기 너무 좋았다.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네!
나의 경험 : 가방을 방 밖에 걸어놔야 되지만 시스템에 익숙해지면 편하기까지 하다. 침실을 남녀가 쉐어하는게 유일하게 걸리지만 에어컨도 틀어져 있고 쾌적하다. 전체 수용하는 사람수가 20여 명으로 너무 많지 않아서 좋았다. 라운지도 널찍하고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