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6일 순례길 2일 차,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
2023년 9월 6일 Camino de Santiago Day 2
Roncesvalles - Zubiri : 21.34 km
출발 06:15 / 도착 12:50, 총 6시간 35분 걸림
안녕~ 가방아 난 너를 멜 수가 없어
둘째 날 새벽 5시도 안 되어 눈이 떠졌다 사물함에서 짐을 꺼내 옮기고 있으니 어제 산티아고 천사 아저씨가 2층 침대에서 해드랜턴으로 날 비춰주신다.
"조심히 가요!" 속삭이며 인사를 건네시는 아저씨. 오늘 하루는 시작부터 응원을 받으며 씩씩하게 시작한다. 단체가 같이 쓰는 숙소다 보니 얼른 헤드랜턴을 끼고 낮은 조도에 후다닥 움직여 서둘러 내려갔다.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는 새벽 6시가 되어야 다음 구간으로 옮길 가방을 받아준다. 나는 5시 반에 이미 준비가 다 끝났는데도, 가방을 맡기기 위해 자원봉사자가 오길 기다려야 했다. 어제 피레네를 넘기 위해 가방을 맡기고 가볍게 걷는 것 만으로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바로 다음 날 오늘 그 몸으로 10킬로가 넘는 가방을 메고 갈 자신이 없어 오늘도 보낸다.
산티아고 출발하기 전에 가방 이동 서비스를 사용한다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저거 속이는 거 아니야?'라며 비웃었는데 크... 현실은 참담하다. 도저히 가방 메고는 내 무릎이 안 남아날 것 같아 어쩔 수 없다. 누구에게나 옵션은 있고 선택은 자신의 것. 가방의 무게와 고통을 나는 감수할 수 있지만 그 가격의 지불은 앞으로 적어도 40년은 더 써야 하는 내 무릎이 감수해야 하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가뜩이나 다쳐온 다리를 지키기 위해 난 가방을 보내기로 했다.
J 씨와 함께 걸은 재밌는 하루
어제 바로 옆 블록에 머물러 잠시 인사를 했던 한국인 J씨도 가방을 보낸다며 일찍 나와있었다. 나보다 4살 어린데 정말 밝은 친구다. 가방을 맡기고 출발하려는데 정말 세상이 어둑어둑하다. 새벽에 먼저 출발하신 미국 아저씨가 카톡으로 길이 무서우니까 꼭 다른 분들과 같이 걸으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혼자 가기에는 무서운데 다행히 J 씨도 혼자여서 서로 의논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같이 가게 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이쪽으로 가는 것 같아요" 말을 건넨다.
그래, 아주 자연스러웠어! 이렇게 우리의 동행은 시작되었다.
혼자 걸었으면 조금 무서웠을 듯한 수비리로 가는 길. 출발하고 앞에 1시간은 정말 어둠 속에 나무가 우거진 으스스한 숲 속을 걸어가야 하고 길들이 왼쪽 오른쪽 쉴 새 없이 구불구불해 혼자였으면 진짜 무서웠을 것 같다. J 씨와 함께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다. 무서운 숲길을 같이 걸은 것도 안심이 되었지만 걷는 속도도 비슷하고, 길도 척척 찾아주니 너무 고맙더라. 게다가 말도 잘하셔서 대화가 끊기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재밌게 걸었다.
한 2시간가량을 걸은 뒤 작은 카페에서 아침 식사도 같이했다. 확실히 혼자 먹는 것보다는 덜 어색해서 감사했다. 첫날 미국 아저씨가 사주셨던 식사를 기억하며 다짐했듯이 이번에 내가 누나니까 식사를 사본다. 메뉴가 진짜 많았는데 여기서 산티아고 여정 중 내 첫 또르띠아를 먹어서 너무 행복했다.
남들의 수많은 산티아고 경험담을 읽을 때마다 어김없이 빠지지 않고 나왔던 대표 아침 메뉴 또르띠아. 따지고 보면 감자 들어간 계란 오믈렛이지 특별한 건 없지만 꿈꾸었던 경험이 현실이 되는 이런 순간이 즐거워 애처럼 희죽거리게 된다. 별거 아니지만 나 참 소소하게 잘 행복해지는 사람인 것 같다. 생즙 오렌지 주스와 에스프레소도 한잔씩 마셔주고, 바나나와 샌드위치를 점심용으로 사서 J 씨 한 봉지, 나 한 봉지 가방에 넣으며 크~ 점심까지 챙기다니 우리 벌써 숙련된 순례자 같지 않나 싶어 진다. 나의 첫 Bar (스페인에선 바르라고 읽는 듯하다) 경험. 분위기도, 초이스도 동행자도 좋았다.
오, 수비리까지 걸을만하다!
워킹메이트의 중요성
오늘은 진짜 걸을만했다! 어제 피레네산맥에 비하면 50%는 더 수월한 것 같다. 숲 속을 계속 걷기에 오르락내리락 언덕들은 있지만 다 걸을만했고 딱 마지막 1시간 정도 하산길이 가파른 경사에 돌길이라 여기서 난이도가 많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어제 피레네산맥 하산하는 길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돌길에 경사 있는 마지막은 조심 또 조심하며 걸어도 무릎에 찡한 통증이 오기 시작하더라. 잠스트 무릎보호대와 발목 보호대를 둘 다 차고 오길 잘했다. 보호대를 다 차고도 통증이 오기 시작하니 없다면 어땠을까... 산티아고에서 무릎, 발목 보호대는 필수 같다.
마지막 내리막을 앞두고 천사 아저씨를 만났다! J 씨와 함께 아까 바에서 사 온 샌드위치와 바나나를 먹고 있을 때였다. 아는 한국인을 만나니 어찌나 반가운지 누가 보면 우리가 가족인 줄 알 것이다. 역시 잘 걸으시는 분이라 우리보다 한 시간 반정도 늦게 출발하셨는데도 결국에는 따라잡으셨다. 이분이 우리를 앞에서 끌어주고 가시니 뒤쳐지지는 않더라. 아저씨는 보통 페이스를 가지신 분들 보다는 확실히 빠르시다. 그래도 좋아! J 씨는 천사아저씨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나도 호칭을 어떻게 불러드리지 싶다가 J 씨를 따라 선생님이라고 불러드리기로 했다. 그렇게 마지막은 한국인 셋, 선생님과 J 씨와 나 이렇게 나란히 같이 내려와 수비리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이런 게 좌석 업그레이드 되는 그런 느낌인가
숙소에 울려 퍼지는 통증을 견디는 소리
우연히 J 씨와 내가 묵는 숙소가 같았다. 숙소는 큰 이층 집을 개조한, 정원이 16명 밖에 안 되는 작은 알베르게다. 원래 6명이 혼합으로 묵는 곳을 예약하고 갔는데 2명만 쉐어하는 방 한자리가 비었다 해서 단 돈 4유로를 더 내고 총 20유로에 호주에서 온 여자분과 쉐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게 웬 떡이야. 다른 방은 이층침대인데 내가 묵게 된 방은 단층의 개인 침대였고, 문을 닫으면 그냥 프라이빗 룸이고 공간도 널찍했다. 이런 기분이 공항에서 비행기 좌석 업그레이드 되는 그런 느낌이겠구나 싶을 정도로 오늘 나의 숙소 경험이 확 업그레이드되었다.
전체적으로 이 알베르게 참 마음에 든다. 밖에 작은 잔디밭도 있고 빨래 너는 곳도 너무 잘 돼있고 와... 화장실에도 샴푸에 비누, 바디샤워까지 구비된 너무나 깨끗한 곳. 꼭 친구네 집에서 하루 자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쉴 수 있는 라운지에 10인용쯤은 되는 널찍한 나무 식탁과 가죽 소파들까지, 진짜 앞으로 내가 예약한 다른 곳들이 여기 이 알베르게 수세이아 같다면 매일이 천국 같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같이 걸은 J 씨와 4유로에 빨래를 같이 돌리고, 날이 좋아 모든 빨래를 햇살 밑에 널어놓아 본다. 나도 모르게 슬쩍 빨래값을 미리 낸 J 씨가 고마웠다.
방들은 2층에 배치되어 있어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하는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정말 윽윽 소리가 절로 나온다. 스쾃 처음 한 다음날의 느낌처럼 그냥 모든 다리가 내 의지와는 다르게 제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넘어지면 안 되니 팔힘으로 손잡이를 잡고 줄로 암벽 타듯 계단을 올라간다. 나 말고도 J 씨도, 다른 사람들도 걸어 다닐 때 나와 같은 비슷한 소리를 낸다. 너무 웃기면서도, 아픈 게 나 하나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모두가 다 내 동지같이 짠하게 느껴진다. 계단에서 고생하는 서로를 만날 때마다 애정 가득한 눈인사를 나눈다. '그 아픔 나도 이해해요' 말 안 해도 아는 우리들의 코드가 있는 것 같다.
정말 조심해야 하는 산티아고의 첫째, 둘째 날
토니의 이야기
나와 한방을 쓰게 된 호주인 토니는 한쪽 다리를 절면서 방에 들어왔다. 내가 너무 놀라서 괜찮냐고, 오늘 그 악명 높은 수비리로 내려오는 길에서 삐었구나! 했더니 어제 다쳤다고 한다. 본인은 일 년 전부터 산티아고를 준비해 왔고, 평소에도 하이킹을 자주 했는데 어제 뭔가를 밟고 삐끗한 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자기도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 오늘은 조금 걸어보다가 아픈 걸 참을 수 없을 때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 수비리에 도착했다 한다. 정말 얼마나 속이 상할까. 토니의 얼굴에서 그 상심이 느껴져 같은 순례자로서 나도 마음이 아팠다.
나한테도 그렇듯이 산티아고라는 길이 일생일대의 큰 도전이고 이 길을 위해서 많은 공부와 준비와 어찌 보면 금전적, 시간적 지출까지 감수하고 오는 건데 바로 첫날 부상을 당하다니. 일 년간 준비했던 모든 계획이 잘못된 스텝 하나로 물거품이 되었는데 그 좌절감이 설명이나 될까. 내가 의사가 뭐라 했냐 물으니 3~4일은 쉬는 게 좋다고 했고, 자기도 조금씩이라도 걸으며 힘들면 택시를 타는 식으로 다음 구간으로 움직일 거라 한다. 그 열정이 정말 대단하다.
내가 같은 상황이었으면 첫날에 이미 마음이 무너져 더 이상 산티아고를 즐길 수 있는 기분이 아니었을 것 같다. 이 길은 고통을 받으려고 온 게 아니라 행복하려고 온 거니까. 게다가 아주 좋은 몸과 마음 상태라도 산티아고는 그 여정 자체로도 이미 힘들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상황을 불행으로 안 받아들이고 상황 그 자체로만 파악하고 앞으로 어떻게 걸을까를 고민하는 토니를 보며 그 강인함을 배운다. 얼른 나아서 길 위에서 만나길 바라본다.
띤또 데 베라노, 끌라라로 드는 축배
오늘도 잘 걸으셨습니다!
점심은 씻고 빨래 널고 늦은 4시경에 Bar Valentin에서 선생님과 J 씨, 나까지 셋이 만나 먹었다. 원래 이 집의 폭립이 그리 맛있다던데 우리가 너무 늦게 갔는지 그 품목이 품절이라 escalope라고 서양 돈가스 같은 얇은 고기 튀김을 먹었다. 메인과 함께 참치 올리브 샐러드와 감자튀김이 나오는데 오~ 진짜 맛있었다. 스페인에서만 마실 수 있는 띤또 데 베라노도 마시고 끌라라도 시켜 오늘 잘 걸은 서로를 짠하며 축하해 준다. 선생님은 연간 J 씨의 스페인에 대한 지식에 놀라워하시고 재밌어하시며 우리의 식사도 대신 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이제 나아질 일만 남은 걸까
오늘은 어제보다 덜 힘들었고, 어제보다 잘 걸었다는 생각에 참 뿌듯한 하루였다. 비록 어제부터 돌덩어리가 된 내 허벅지는 아직도 산을 오를 때 생각만큼 올라가 주지는 않고, 걸음마다 악 소리가 나게 아프지만 험난한 수비리 하산길을 다치지 않고 내려와서 다행이었다. 알고 보니 첫날보다 둘째 날인 론세스바예스 - 수비리 코스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친다고 한다. 첫날 가장 험하다는 루트인 피레네를 넘었다는 안도감에 둘째 날 방심하기도 하고, 몸이 첫날의 후유증으로 근육이 다들 뭉쳐있는 데다 마지막 돌길까지 더해져 다칠 확률이 극도로 높단다. 다행히 안 다치고 참 잘 내려왔다. 같이 걷는 사람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느낀 게 재밌게 이야기하며 와서 그런지 몰라도 어제보다 시간도 더 빨린 간 느낌이다. 오늘도 잘 걸었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6일 수비리의 Suseia
가격: 20유로 (2만 8천 원)
구글평점 4.8, 내 평점 4.9
수건 유무 : 개인 수건은 없지만 화장실엔 손 닦는 수건 정도는 있음
담요/이불 유무 : 담요가 하나씩 제공
위치 : 수비리의 안쪽인데 마을이 작아서 다 비슷한 거리이다.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100% 네!
나의 경험 : 여긴 너무 평점 좋고, 관리를 하는 사라라는 여자분이 천사 급으로 친절하셔서 정말 예약을 일찍 해야 한다. 너무 쾌적하고 모던하고 좋은 점이 엄청 많지만 그중에서도 정원이 16명이라 정말 조용하다. 꼭 다시 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