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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신고식 : 높디높은 피레네산맥을 넘어보자

2023년 9월 5일 순례길 1일 차,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

by 몽키거
2023년 9월 5일 Camino de Santiago Day 1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25.2 km
출발 05:45 / 도착 13:45, 총 8시간 걸림


1시간 만에 근육 뭉친 허벅지, 너 진짜 배신이다

새벽 4시경에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같이 쓰는 공간이다 보니 피해를 안 주기 위해 내 짐을 들고 로비로 나와서 챙겼다. 너무 일찍 일어난 거 아닌가? 하며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새 5시 반이다. 어둠 속에서 해드랜턴 빛만을 의지해 나갈 준비를 하는 첫날이라 아직은 생소하고 느린 것 같다. 얼굴에 선크림용 팩트를 대강 찍어 바르고 드디어 출발이다.


새벽 5시 50분의 생장


어제 시끌벅적했던 마을의 모습과는 다르게 어둡고 조용하다. 나는 앞 뒤로 적어도 한두 명의 사람들과 같이 걸을 줄 알았는데 마을을 벗어나 언덕길을 시작할 때 까지도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렇게 사람이 없는 게 맞는 걸까? 하는 순간 저 앞에 걸어가는 누군가의 희미한 해드랜턴 빛이 보인다. 그래, 내가 맞는 길로 가고 있긴 한 거구나. 다행이다. 한 20분을 걸었을까? 누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

"00 씨? 맞네! 혹시나 해서 불러봤어요." 어제 대화를 나눈 미국에 사시는 아저씨다. 따로 연락도 없이 이렇게 길 위에서 다시 만나다니 신기하고 동시에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언덕에 언덕이 이어짐과 동시에 내 걸음이 점점 느려지고 말수도 함께 줄어들었다. 평소에도 운동을 하신다는 아저씨가 느려져가는 내 걸음을 맞춰주시는 것 같아서 원래 페이스대로 가시라고, 곧 따라잡을게요 하고 아쉽게 인사를 했다. 모두가 다른 속도와 페이스를 가지고 있으니 기념비적인 산티아고 순례길 첫날에 남의 짐이 될 수는 없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론세스바예스

1시간이 지나도 계속 언덕이다. 그리고 내 왼쪽 허벅지가 큰 쥐가 난 후의 느낌처럼 굳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내가 아무리 준비운동 없이 시작했다고 해도 지금 너무 중요한 커다란 허벅지 한쪽 가동범위가 안 나올 정도로 몸이 놀랄 일인가. 당황스러웠지만 이거 다리가 엄살을 부리는구나 살짝 웃겼다. 7시가 되니 동이 트고 해드랜턴을 벗을 수 있었다. 9월 말이 돼 갈수록 해가 점점 길어질 테니 해드랜턴 잘 가지고 다녀야지!


피레네산맥, 평지가 있긴 한건가요?
예쁜데 힘드니까 예쁘다고 머리로 전달이 안되는 피레네 풍경


뭐지? 이거 걸어도 걸어도 언덕만 계속 나온다. 너무 힘들다. 그런데도 나보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를 제치고 앞으로 쭉쭉 나가신다. 내가 이렇게 할머니들보다 못 걸을 일인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평소에 튼튼한 다리로 정말 온갖 운동 다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는데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정말 다행히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어떻게든 기어서라도 가겠지 싶더라. 한창 비행을 할 때 비행기가 이륙하면 언젠가는 착륙한다, 늘 이런 마음가짐이었다. 인생사가 그렇듯 모든 것에는 끝이 있으니 이 길 또 한 그러하리라 굳게 믿고 걸어본다.

어제 언니랑 통화를 하는데 자기가 9년 전에 쓴 다이어리를 보면 피레네를 9시간 걸려 넘었다고 기록해 놨다 했다. 나는 "에이~ 25.2 km 면 거리가 긴 것도 아닌데 그렇게 걸린다고? 난 아마 7시간 안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은데?"라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이거 쉽지가 않다. 다행히 날씨가 정말 맑아서 좋은 풍경을 걸으면서 비 걱정 없이 걷고는 있지만 바람이 많이 불고, 몸이 힘드니 진귀한 풍경도 눈으로는 보이지만 마음으로 즐기지는 못하겠더라. 바람이 너무 거세다 보니 애플와치가 계속 이런 노이즈에 30분 이상 노출되면 청력이 손상될 거라고 쉬지 않고 메세지로 경고를 할 정도였다. 걷는 내내 방송에 서 강풍 주의를 알려주러 나온 기자들의 마이크에서 나는 것처럼 펄럭펄럭 거친 바람소리가 내 귀에 가득했다. 그래도 시원해서 좋았다. 언덕길을 걸으며 나는 땀을 바로 식혀주는 바람이 고맙기까지 했다. 후덥지근한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이렇게 바람도 해도 피할 수 없는 피레네산맥을 걷고 있다니 실감이 안 나지만 나는 여기 있다.


반가운 나의 첫 푸드트럭

걷기 시작하고 2시간이 지나 오리손 산장을 거쳤고, 4시간이 지나서야 첫 푸드트럭이 나왔다. 저~ 멀리서 하얀색의 트럭을 발견하고 꺅 소리를 질렀다. 너무 반가웠다.

드디어 푸드트럭이라는 걸 이용해 보는구나


발견은 빨리 했는데 실제로 점같이 보이던 푸드트럭에 도착하기까지 20분은 더 걸어야 했다. 그만큼 여기선 모든 게 보이는 것보다 멀다. 4.5유로를 내고 바나나 한 개, 삶은 계란 한 개, 플라스틱병에 들은 조그만 오렌지 주스를 하나 사 먹었다. 걷는 게 너무 힘들어 입맛은 없었지만 다시 걷기 위해선 연료가 필요하겠지 이런 단순한 생각에 모두 먹었다. 남들은 30분도 쉬어간다는데 5분도 채 안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 갈길이 멀고 한쪽 다리도 말을 잘 안 들으니 서둘러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처음으로 만난 푸드트럭아, 행복했다. 널 발견했을 때 나온 비명은 정말 오래간만에 경험하는 순수한 즐거움과 행복에서 나온 거라 내가 순간 어린아이가 된 듯한 느낌이었단다. 고마워!


이런 뷰에서 계란을 먹을 일이 또 있을까


님아, 그 길로 가지 마소
엄청난 실수, 가파른 길을 선택하고야 말았다

정말 걸으면서 쉴 수가 없었다. 앉으면 못 일어날 것만 같아서였다. 이미 말을 안 듣는 다리로 털썩 앉는 것도 힘들고, 계속되는 오르막에 쉬고 싶을 때는 그냥 멈춰 서있었다. 그나마도 경사가 가팔라 서있는 내가 마이클잭슨이 춤을 추듯 한참 앞으로 기울어져 보일 정도였다. 이건 산행이 아니라 암벽을 타는 느낌이다. 5시간 반이 지나 어떤 미국인 부부가 "여기서부터가 이제 스페인이야." 하고 나바라 지역이 쓰여있는 돌비석을 내게 인식시켜 줬다. 내 키보다 큰 거대한 비석인데 힘들어서 바로 코앞만 보고 가는 나는 하마터면 무심코 지나칠 뻔했다. '아! 오늘 프랑스령에서 스페인령으로 넘어가는 거였지!' 이제야 그 사실이 떠오른다. 고맙다고, 하마터면 놓칠뻔했다고 부엔 카미노라 인사를 나누고 멋지게 커플사진을 찍어드렸다.


나바라 지역이 시작됨을 알리는 지점


이어 계속 걷는데 어느 순간 탁 트인 평평한 지역에 사람들이 이곳저곳 앉아서 쉬고 있는 게 보였다. 드디어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구간이구나를 직감했다. 내려가는 길이 엄청 넓고 편해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가장 커 보이는 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게 실수라는 건 10분도 채 안되어 깨달았다.


하산할 때 꼭 오른쪽으로 가세요.
그게 완만한 길입니다

절대 왼쪽길로 가지 마세요
엄청 가팔라서 다칩니다


산티아고 가기 전에 특히나 첫날 피레네산맥에 대해서 가장 많은 글을 읽었다. 집에서 남의 글을 읽을 때야 '응, 당연히 나는 완만한 길로 갈 거야, 사람들이 위험하다잖아!'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한 6시간을 내 몸이 이리 힘들었던 적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걷고, 세찬 바람에 따귀를 서너 시간 맞다 보면 생각의 회로가 어떻게 되나 보다. 정말 글 읽었던 기억이 하나도 안 나고 그냥 가장 잘 닦인 큰 길이 메인길이겠지 싶어 왼쪽으로 꺾게 된 것이다. 하필 몇몇 사람들도 앞 뒤로 좀 보였다. 그래서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아뿔싸! 걷기 시작한 지 몇 분이 지나자 경사가 아주 급격해진다. 이거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이 맞나 싶은 정도로 크고 뾰족한 험한 돌들 천지다. 너무 어이가 없어 사진을 찍어두고 싶었으나 여기서 핸드폰을 떨어뜨리면 적어도 액정 나가겠다 싶을 정도로 아찔한 경사였다. 게다가 정신 잠깐 놓으면 발목 나가기 쉽겠다 할 정도로 발 한걸음 한걸음을 어디에 잘 놓아야 하는지 초집중을 해야 했다. 이런 돌길을 한 30분 내려갔나? 흙길에 도달하니 구글맵에서 내가 경로를 벗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내 앞뒤로는 사람이 없었다. 영어를 잘하는 이탈리안 20대 청년을 이때 만났는데 겁도 없이 나만 따라온다. 내가 경로에서 벗어난 것 같다고 하니 “그러니?” 리액션만 하고 자기도 같이 찾아볼 생각을 안한채 나만 기다린다. 이 사람에게 도움을 받긴 글렀구나 싶어 오던 길을 되돌아 올라가려니 어제 슬쩍 인사만 한 한국인 아저씨가 같은 길로 내려오고 계셨다.


두어시간을 내리 가파르기만 한 하산길


천사와의 만남

"저 죄송한데요, 이 길이 아니라고 나오는데요 맞나요?" 하며 걸음을 멈추고 여쭤보니 "네, 이 길 맞습니다." 하고 앞질러 가신다. 뭔가 전문가 같은 포스가 확 풍겼다. 아! 이분은 첫 번째 산티아고가 아니시구나! 그래! 이분만 따라가면 살겠다 싶어 뒤에서 열심히 쫓아갔다. 워낙 빠르셔서 숨이 찼지만 가파른 숲 속에서 이 분을 놓치면 난 도움 안 되는 이 외국인 친구와 둘만 남겠구나 싶어 최선을 다했다. 결국에는 점점 멀어져 가는 그분을 따라갈 능력이 안되어 놓치고 말았지만 인연인지 신기하게도 4인씩 배정이 되는 론세스바예스의 공립 알베르게에서 옆 침대 메이트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중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어디 사냐고 물으셔서 외국 산다 말씀도 드리고, 다리가 갑자기 아파서 놀랐다는 이야기를 하니 도움이 될 거라고 근육에 바를 크림도 빌려주시고, 마그네슘 약에 혹시 모르니 베드버그 병원처방받은 약도 소분해 주셨다. 그리고 외국살이 하니까 그립지 않냐고 한국에서 가져오신 호떡빵을 두 개나 나눠주셨다. 그 자리에서 바로 먹는데 정말 꿀맛이다. 한국에서 이것저것 챙겨 오시는 것도 일이셨을 텐데 힘들게 가져오신 것들을 처음 보는 내게 덥석 나눠주시는 게 너무 감사했다. 산티아고에서 느끼는 한국인의 정이 이런 거구나 마음이 따뜻해진다.


스페인에서 먹는 호떡빵이라니! 나눔받은 마그네슘 약과 배드버그 약


론세스바예스 전설의 커뮤니티 디너

론세스바예스의 공립 알베르게는 정말 유명하다. 모두의 첫날, 가장 힘들다고 하는 피레네산맥을 넘으며 영혼이 탈탈 털린 모든 순례자들의 첫 숙소가 되는 곳이다. 내가 머문 2층에는 양갈래로 나눠져 섹션당 40-50 명의 사람들이 머무는데 침대 자체가 파티션이 되어 4명씩 프라이빗 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사물함도 잘 되어있고, 남녀가 나눠진 샤워장도 깨끗하고, 뜨거운 물도 잘 나와서 불편함은 없었다.

하지만 왼쪽 허벅지 결린 게 아직도 아파서 바지를 벗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인데 이층 침대 위칸으로 배정을 받아 조금 아쉽긴 했다. 첫날에 무엇을 침대 위에 챙겨놔야 하는지도 몰라서 열댓 번은 내려왔다 올라갔다를 반복하는데 감각이 없어진 다리로 오르내리는 게 정말 무서웠다. 내 다리가 내 다리 같지 않아 떨어질 것만 같아서 정말 정신 똑바로 차리고 팔에 힘을 주어서 팔 힘으로 오르고 내렸다.


스프와 파스타, 식전빵과 와인까지 미리 준비된 오늘의 양식


드디어 기다리던 식사시간. 워낙 규모가 큰 공립 알베르게여서 식당도 3곳으로 나눠 운영이 되었고 나는 La Posada에서 아침에 헤어진 미국아저씨를 만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12유로에 3코스, 야채수프와 초리조가 들어간 파스타는 한 테이블에 같이 앉은 9명이 함께 나눠먹고, 메인은 치킨과 생선중에 선택, 나는 치킨을 먹었다. 식사에 와인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평소보다 왜 이리 와인이 달고 맛있는지 이게 등산하고 먹는 밥이라 꿀맛이구나 싶었다. 프랑스인 청년이 선뜻 나서서 같은 테이블에 앉으신 어른들부터 음식을 척척 나눠드리는 모습도 좋았고, 아직은 첫날이라 서먹서먹한 테이블의 느낌이 그냥 다 귀여웠다. 디저트로 아이스크림 콘도 나와 마무리까지 완벽했다.


메인으로 선택한 치킨과 디저트인 아이스크림 콘


힘들었다, 근데 아직은 뭘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론세스바에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한 건 오후 1시 45분, 총 8시간이 걸렸다. 오늘은 첫날이라 그런지 해냈다! 느낌보다는 그냥 얼떨떨하기만 했다. 아직 짐을 푸는 것도 어색하고 이걸 앞으로 30일을 더 한다는 게 그냥 아득한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게 걱정조차 안 된다. 아마 오늘 끝도 없는 피레네 산맥에서 애를 쓰며 노력을 해도 종종걸음인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았나 보다. 그래도 시작을 했다. 가장 힘들다는 그 구간을 해냈으니 신고식을 치르긴 한 거구나 싶다.

어제 팜플로나에서 생장으로 가는 버스에서 봤던 아시안 여자아이가 내 침대 바로 옆구역 같은 2층에 자리 배정을 받았다. 침대 가림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장 가까이 자는 사람이 되었다. 이름은 메구미. 의외로 먼저 한국인이냐고 물어봐주고 말을 걸길래 식사하러 가기 전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신기하게도 나랑 같은 나이에 서른아홉에서 마흔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생각도 하고 기념도 할 겸 왔다는 이유가 같았다. 물어보니 나보다 1시간을 늦게 시작했는데 거진 같은 시간에 도착을 했다니 엄청 잘 걷는 친구 같다.

이제 잘 자는 일만 남았다. 뭐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벌써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산행에 놀란 하루를 놓아줄 밤이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5일 Roncesvalles Pilgrims Hostel

가격: 14유로 (2만 원)

구글평점 4.0, 내 평점 4.0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수건 없음

담요/이불 유무 : 담요 없음

위치 : 론세스바예스 초입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네!

나의 경험 : 단체가 같이 쓰는 건데도 시설이 널찍하고, 깨끗하게 잘 유지가 되어 있었다. 다 같이 먹는 커뮤니티 디너도 12유로(1만 7천 원)로 가성비 좋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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