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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기도

마드리드의 곰아, 내 소원도 들어줘

by 몽키거

2023년 9월 3일 마드리드


가는 여정 동안 동행이 되어주시고
갈림길에서는 저희의 인도자가 되어주시고
피로로부터 저희의 휴식처가 되어주시고
위험으로부터 저희를 지켜주시고
가는 여정에 저희의 쉼터가 되어주시고
더위에 저희의 그늘이 되어주시고
어둠 속에 저희의 빛이 되어주시고
좌절로부터 위로와 안식을 주시고
계획을 위해서는 이루고자 하는 강인함을 주소서
당신의 보호로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고
여정 뒤에는 기쁨과 함께 무사히 집으로 도착할 수 있도록
당신의 은총을 내리소서

- 로스 아르코스 산타 마리아 대성당의 기도문 중


몇 달간 준비해 왔던 산티아고 순례길이 내일 시작이다. 백 미터 달리기를 앞두고 두근두근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 좋은 긴장감이 든다. 배불뚝이 내 가방도 함께 간다. 가는 길이 나에게 교훈을 주리라, 무엇을 버리고 가야 하는지 알려주겠지. 순례자의 기도를 읽어보며 마음을 다져본다.


소원을 들어주는 마드리드의 곰

생장으로 출발하기 전 마드리에 며칠 머물렀다. 남편과 함께 순례길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여행객처럼 조금이나마 즐겨 보았다. 마드리드야 비행할 때 여러 번 왔지만 이렇게 남편이랑 같이 온 건 처음이고, 곧 40여 일간 못 볼 생각을 하니 뭘 해도 참 애틋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온 마드리드에서의 첫날은 날씨가 정말 맑고 화창해서 참 좋았다. 먹고 싶었던 음식가게들을 찾아다니는 중간에 잠시 솔광장에 들렸다. 바로 소원을 들어주는 곰과 마드로뇨 나무 동상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이게 어쩌다 시작된 지는 모르겠지만 마드리드의 상징인 이 곰의 뒤꿈치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진회색이어야 하는 발뒤꿈치만 닳고 닳아 금색이 되어 있다.


뒷꿈치만 금색으로 닳은 마드리드의 곰 동상


브뤼셀의 세라클레스 동상이나 프라하의 네포 동상 등 각 나라별로 소원을 들어준다는 많은 동상들을 봐왔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늘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바라는데 오늘은 '산티아고 순례길 건강하게 잘 다녀오게 해 주세요' 이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곧 시작하는 고되고 긴 여정이 걱정이 되긴 했나 보다. 내 코가 석자라고 늘 바라던 가족들의 안위보다 내 앞가림이 더 급했던가, 소원을 빌고도 스스로가 많이 웃겼다. 그래, 산티아고 중요하지! 곰 동상에 소원도 빌었으니 건강하게 잘 다녀와 보자!


여보, 마지막 잎새 그거 아니야

우리 신랑은 평소에도 내가 하자는 건 대부분 다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난 3일간 마드리에서는 꼭 내일 죽을 사람 대하듯 내 작은 요구 하나하나 다 들어주려고 했다. 안 그래도 되는데... 내가 어디 죽으러 가나요, 원하던 순례길 가는 겁니다.


마지막 날에는 비가 정말 많이 쏟아졌다. 밖에 나가자마자 퍼붓는 장대비에 5분도 안 돼 바지가 허벅지까지 젖을 정도였다.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늘 맛있게 먹는 비니투스 Vinitus의 꿀대구를 마드리드 매장에서 순례길 전 마지막 만찬으로 먹고 싶었고, 그런 나를 위해 발이 젖는걸 세상 싫어하는 사람이 비를 뚫고 나와 함께 레스토랑에 가주었다. 그래, 이런 게 찐 사랑이지! “나는 안 가도 되는데~" 하며 못 이기는 척을 했지만 내심 기분은 좋았다. 길거리에서 파는 천 원짜리 달고나라도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은 그때 딱 먹어주면 세상 행복한 사람이 나니까. 마드리드에서 나의 마지막 만찬으로 먹고 싶은 건 꿀대구 말고는 없었고, 뭐 신랑이 이리 대우해 주시는데 마다하지는 않겠어요.


Vinitus의 꿀대구와 함께 클라라 한 잔, 순례길 전 나의 마지막 만찬


길 위에서 완벽해지기

내가 꼭 필요하다 생각해 넣은 가방 속의 물건들은 길을 떠나기 전에 그 진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순례자들은 성별부터 나이, 배경과 취향과 성향 다 다르다. 게다가 우리가 출발하는 날짜와 계절, 날씨도 모두 다르고 그에 따른 반응과 적응하는 속도도 다르다. 이 큰 불확실성 속에서 단 하나 같은 사실은 우리는 모두 순례길 위에 있는 한 명의 순례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끝이 없던 순례길 가방 싸기 미션은 나에게 나다운 게 제일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이미 준 건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더 많다고 완벽한 준비가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 위에 내 두발을 디뎌봐야 비로소 완벽하다는 느 낌을 받을 것만 같다. 나에게 이 기회를 허락하심에 감사하며, 길 위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게 늘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자 다짐을 해본다.


순례길, 나만의 의미를 찾아보는 여정

물론 나 같은 경우에는 순례 전에는 마드리드, 순례 후에는 런던으로 작은 여행을 하지만 생장에서부터 시작될 산티아고 순례길은 절대적으로 관광도 아니고 여행도 아닌 순수한 여정이다. 하느님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정말 겸허한 마음으로 한 걸음씩 내딛으리라 결심한, 내가 선택한 길이다. 내가 서른아홉에서 마흔으로 넘어가는 인생의 지점에서 지난 30대의 정리와 동시에 새로운 40대의 다짐을 하는 하나의 의식처럼 길 위에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해보고 싶다. 그동안 살아온 삶도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보고 싶은 삶도 계획해 보고, 후회했던 일들과 칭찬해주고 싶은 일들도 떠올려보며 나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간으로 만들어야겠다.


막상 도착해서 걷기 시작하면 "아 힘들다, 힘들다" 생각이 더 많이 든다고 하던데, 물론 한 일주일은 나도 그들의 경험과 별반 다를 것 같지는 않지만 의식적으로 매일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고 일단은 결심해 본다. 아직 스스로를 굉장히 젊고 한창일 때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forever young spirit을 더 오랫동안 유지할 방법들도 생각해 봐야지! 생각 같아서는 외국어책도 몇 권 가져가 길 위에서 끝냈으면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다는 끝이 없을 것 같다. 결국에 나는 그저 길을 걷는 순례자이니까 말이다.


열심히 잘 걸어보자!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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