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맥시멀리스트의 순례길 가방 싸기 (3)

출발 이틀 전에 새 가방을 사다

by 몽키거

2023년 9월 1일


오늘 드디어 집을 떠나 마드리드로 향한다. 어제까지도 집에서 산티아고에 가져갈 물건들을 택배로 받고 있었다니 아직도 무거운 가방을 실감 못하고 있는 모습에 기가 찼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지고 가고 싶은 것들은 너무 많고, 기회가 되는 한 마음에 드는 물건들로 가져가고 싶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하지 않는가, 일생에 한 번 뿐일 수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불편함을 겪고 싶지는 않았고 가능한 성능들도 좋고 도움이 되는 것들로 챙겨가고 싶은 마음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오늘도 이것저것 빠진 것 없나, 가서 후회하지 않도록 마지막 확인들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결혼식 준비와 같은 나의 산티아고

정말로 오늘 이 생각을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준비하는 건 꼭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과 같구나. 바로 이런 느낌이 꼭 같았기 때문이다.


한번 더 한다면 준비를 정말 잘할 것 같다


내가 결혼식 준비를 막 시작했을 때, 꿈꾸는 것도 많았고 내 머릿속에 컨셉도 한 장 한 장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있었다. 나름 준비도 재밌었고, 드레스 입어보는 것도 즐거웠던... 하지만 결혼식이 가까워지며 초대할 사람들 명단을 만들고 연락하고, 가족들의 예단에 당일 미용실도 정해드려야 하는 등 은근히 복잡해지는 일들이 많았다. 자잘한데 내 손이 닿아야만 하는 것들 말이다. 그래서 결혼식 마지막 주는 그냥 빨리 당일이 와서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싶었다. 정작 당일에는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이것저것 생각할 틈도 없이 끝나서 뭐랄까 맛과 향을 즐길 수 없는 비싼 식사를 한 느낌이랄까? 지금 산티아고도 얼른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결혼식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길은 모든 순간들을 제대로 맛 보리란 것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중에 본식 사진도 다 받고 여유가 좀 생겼을 때가 돼서야 크... 내가 결혼식을 한 번 더 한다면 진짜 기깔나게 잘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웨딩드레스도 더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를 수 있을 것 같았고, 결혼식 식순도 더 잘 구성하고, 무언가 이벤트나 멘트들도 잘 생각해서 다듬을 것 같고, 지인들에게 결혼 전 후에도 좀 더 잘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튜디오 촬영 때 헬퍼 이모님을 더 잘 알아보고 고용하거나, 본식 때 헬퍼 이모님께 야무지게 부탁해 둘 상황들 등 한번 해보고 나서야만 알 수 있었던 부분들이 많았다. 산티아고를 준비하는 지금은 여러 생각들로 넘치지만 순례 길을 다녀와봐야만 비로써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부분이 넘치고 어떤 부분이 부족했는지 몸으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순례길 여정을 마치는 10월이 되면 내 결혼식 끝나고의 기분과 같이 득도해있지 않을까 싶다.


이틀 전에 받은 새 가방

마지막 가방을 싸놓고도 정말 터질 것 같은 볼륨감에 나는 10L가 더 큰 가방을 주문했다. 어차피 메고 가는 가방 크기가 조금이라도 여유 있으면 음식도 넣고, 무언가를 더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있음에 마음이 더 편하지 않을까 싶어 부족하느니 여유 있는 가방으로 가는 게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가방은 출발 이틀 전인 그저께 도착했고 결론은 내 원래 가방으로 가기로 했다.


아마존에서 급하게 사서 받은 오스프리 카이트 46L는 내 가방 카이트 36L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고 크기만 더 커 보이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물건이 더 들어가긴 하는데 공간이 눈에 띄게 여유 있는 것도 아니고, 메어 보았을 때 가방이 아빠옷을 입은 것처럼 나에게 지나치게 커 보였다. 이런... 실수다 실수야. 하지만 환불을 하는 한이 있어도 직접 사서 물건을 넣고 비교를 해보지 않았다면 후회했을 것 같다. 직접 내 눈으로 나와 안 맞음을 확인했으니 나는 길을 걸으며 내 선택에 더 확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걸로 충분히 새 가방은 그 역할을 했다. 신랑에게 환불을 맡기고 가는 게 영 탐탁지는 않지만 나는 곧 이탈리아를 떠나 순례길을 시작해야만 한다.


출발하기 직전까지 택배를 받은 유별난 스스로를 눈감아 주기로 했다. 결혼식과 같이 순례길은 나에게 미지의 영역이고, 여정을 하며 받은 교훈은 깊이 새겨두면 되니까 걱정하고 대비하는 건 괜찮다고 생각하고 싶다. 조금 창피한 발상인지는 모르지만 모든 건 아이템발이다 생각하고 조금 더 좋은 것, 마음에 드는 것으로 준비하면서 오는 심미적인 안정감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힘든 길을 가면서 무언가를 안 사 와서 후회하느니 중간에 누굴 주더라도 가져가서 행복하련다.


두 번째 산티아고에서는 더 잘할 자신 있습니다

짐들에 대한 확신이 줄어들수록 빨리 순례길로 떠나고 싶었다. 내가 뭐든 살 수 있는 이곳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내 짐은 더 늘어날 것이고 여기에서 벗어나야지 나의 비움이 시작될 것 같았다. 건강한 몸과 마음 딱 두 가지만 가지고 산티아고를 걸을 수는 없는 걸까? 아마 순례길을 걸으며 만나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살짝이라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번 순례길이 끝나면 "다음 순례길은 정말 끝내주게 잘 준비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뭐든지 경험을 해야지만 확신할 수 있는 일들이 있고, 산티아고는 분명히 그중에 하나이다. 출발하기도 전에 맥시멀리스트인 내가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많이 고민하고 덜어내려 했지만 결국 나는 내 원래 모습 그대로, 맥시멀리스트로 순례길을 시작하게 되었다. 약도 골고루 챙기고, 양말도 넉넉히 챙기는 등 물건을 여유 있게 챙기면서 동시에 내 불안은 줄어들었다. 남들은 넘친다 하겠지만 그분들이 내 가방을 들어줄 것은 아니지 않은가.이고 가든 지고 가든, 나눔을 하든 간에 그건 길 위에서 습득하고 배워나가기로 했다.


아, 그래서 이 맥시멀리스트 가방의 최종 무게는 12kg다.

비밀이야, 쉿!

우리 같이 잘 걸어보자, 친구들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