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맥시멀리스트의 순례길 가방 싸기 (2)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게 가능할까 불가능할까

by 몽키거

2023년 8월 25일


누군가 그랬다
산티아고를 걷는 가방의 무게는 내 죄의 무게라고

그렇다면 나는 아주 죄가 많은 죄인 중의 죄인이구나. 벌써 10kg가 넘었고 이 무게는 내 핸드폰, 이어폰, 보조 충전기와 노트, 당일에 가지고 다닐 물과 음식 무게를 아직 합치지 않은 무게이다. 진짜 큰일이다.


조언에 따르면 가방의 무게는 내 몸무게의 10%를 안 넘는 게 좋다고 한다. 좋다는 말인 즉 이상적이고, 가장 효율적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50kg 대 중반인 나는 많아도 6kg를 넘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열과 성을 다하는 진정한 맥시멀리스트인 나에게 산티아고 가방 싸기는 시련이다. 여행을 갈 때도 챙겨 가는 게 원체 많은 사람이라 늘 수화물을 여유 있게 구매하는 편인데 산티아고 순례길은 시작도 하기 전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지금' 변하라고 한다.

가기 전부터 시험에 든 것 같다.


대체 무엇을 넣은 거지?

남들은 가방을 아주 얄팍하니 잘만 만들던데 나는 남들과 다른 무엇을 더 넣었길래 이리 무거울까? 짐을 다 펼쳐놓고 하나하나 무게를 재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예행연습으로 인해 아팠던 무릎과 발목이 걱정인지라 나는 뭐라도 해서 줄여야 한다.



펼치고 보니 한가득인 내 물건들은 얼핏 보아 다 나름의 쓸모가 있어 보였다. 옷도 욕심 없이 티셔츠 두벌, 바지 두 벌이 끝이었고 심지어 잠옷도 포기했다. 다음날 입을 옷을 입고 잔다는 사람들의 후기도 꽤 봤기에 없으면 없는 대로 익숙해지겠지 싶어 과감히 포기한 거다. 다른 의류라고 한다면 양말 4켤 레에 양말 라이너 2개, 브라탑 2개에 속옷 2장이 전부. 아, 아침저녁으로 꾀나 춥다고 해 경량패딩, 경량잠바에 바람막이도 챙겼다. 보호용으로는 등산 스틱, 무릎과 발목 보호대, 모자와 얼굴 스카프, UV 장갑 정도가 다다.


중요한 사실은 이 중에서 매일 한 세트는 입고 출발 하니까 옷을 입고 무릎 발목보호대에 등산스틱도 하는 걸로 쳐서 얼추 1.3kg 정도는 전체 무게에서 빠지게 되어 그나마 9kg 남짓이 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내가 길을 걸으면서 마실 간단한 음식과 물 1리터 정도를 들고 시작한다면 다시 원점이 되는 무게다.


여자이고 싶으면 더 늘어나는 무게

이상한 곳에서 가장 무게가 많이 나간 건 세면, 화장 도구였다. 무게가 1kg가 훨씬 넘었다. 긴 머리를 위한 샴푸와 린스를 챙기고, 넉넉한 용량의 선크림에 하루를 마무리할 때 깨끗이 씻어낼 클렌징 티슈와 클렌징 폼도 넣었다. 그리고 미니 드라이기도 넣었다. 나는 긴 머리를 젖은 상태로 두어본 적도 없고, 머리카락을 바짝 말리는 걸 좋아한다. 게다가 다른 분 팁으로는 빗길에 젖은 신발이나 옷이 덜 말랐을 때 정말 유용했다고 한다. 그래, 그리고 솔직히 화장 품도 좀 넣었다. 팩트와 작은 셰도우와 볼터치 정도? 지친 산티아고 중간중간에 대도시들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좀 사람같이 하고 몇 시간이나마 이쁘고 싶은 여자의 마음이랄까. 이건 순전히 자기만족이다. 나는 연예를 한창 할 20대도 아니고 누구에게 이뻐 보일 필요도, 생각도 없는 곧 마흔 살인 결혼한 아줌마다. 그래서 아주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이건 내가 즐겁기 위해서였다. 아악! 약간의 화장품... 정말 포기하고 싶지 않다.


벽돌보다 무거운 세면도구 가방과 충전지와 빨래망, 바느질도구 etc.
게다가 건강하게 다녀오려고 이약 저약도 챙겨본다. 근육통 크림, 피로를 풀어준다는 회복 드링크 파우더, 방광염 걸렸다는 분의 글을 보고 겁먹어서 산 크렌베리 드링크 파우더.

이러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다. 기본으로 없으면 안 될 배낭과 침낭, 우비의 무게만 벌써 거의 3kg (빈가방이 1.8kg, 침낭 0.8kg, 우비 0.25kg이다)이다.


정답이 없는 산티아고 순례길 짐 싸기


순례길에 관심이 있고 나서부터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블로그의 글과 유튜브의 비디오들을 보며 사람마다 참 다르구나 싶었다. 어떤 분은 미니 헤어드라이기를 반드시 가져가라고 하고, 어떤 분은 절대 가져가지 말라고 한다. 어떤 분은 우산을 아주 잘 썼다 하고 어떤 분은 그럴 바에 비 올 때 다리를 가려주는 스패츠를 꼭 가져가라 한다. 또 어떤 분은 하루의 피로를 풀기에 땅콩 마사지 볼을 가져가 너무 후회 없이 잘 썼다고 하니... 이렇게 남들에게 꿀템이었던, 꼭 가져가길 추천하는 것들을 하나 둘, 모으다 보면 그것들 만으로 가방의 반 이상도 더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기로 한 것도 내 결정이고, 무엇을 가지고 갈지도 내 결정이다. 남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이해불가한 내 짐들이 나에게는 꼭 맞고 필요해 정말 가져오길 백번 잘했다 싶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걷기 전에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확실히 가방을 재정비하긴 해야겠지만 그 길을 걷지 않은 사람으로서 무언가를 빼놓고 가서 후회할까 봐 하는, 이 '혹시'하는 생각이 계속 나를 붙잡는다. 내가 정말 힘들다면 중간중간에 알베르게나 호스텔에서 기부도 하고 올 수 있으니 길 위에서 그 쓰임새가 명확해지지 않을까.


과연 내 가방을 최종에 몇 kg으로 완성시킬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조금은 불안한 마음에 짧은 한숨 혹 한번 세게 쉬어보고 일단 꺼내놓은 모든 물건을 주섬주섬 다시 담아 놓아 본다. 과연 마지막에는 이 불가능할 것 같은 가방 줄이기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지 어디 한 번 지켜봐야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