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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시멀리스트의 순례길 가방 싸기 (1)

어느 날 내 다리가 나를 배신했다

by 몽키거

2023년 8월 23일


산티아고 순례길을 위해 다음 주에 마드리드로 떠난다. 다음 달도 아니고 다음 주다! 마드리드에서 며칠 있을 것이지만 어쨌든 집을 떠나는 건 다음 주.

올해 산티아고를 걷고 싶어서 알음알음 사고, 모으며 대비한 것들이 한 트럭 같은 느낌이다. 처음에 텅 비어 흐물거리던 가방도 이제는 들어 젖힐 때 억 소리가 나는 무게감을 자랑한다. 이런... 벌써 10kg에 육박하네? 큰일이다.


어, 그냥 연습이야, 연습!

신랑에게는 산티아고행 고백을 늦게 했지만 실은 작정하고 준비한 건 올해 2분기 지점이었다. 3-4월 정도에 나는 이미 몇 년 전 언니와 서로의 생일 선물이라고 사준 오스프리 등산 가방을 밖에 내두고 짐을 조금씩 넣어가며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신랑에겐 "언젠가는 걸을 길이니 운동 삼아서 걸어보고 싶어"라고 어쭙잖은 핑계를 대었지만 산티아고행 신랑 세뇌의 시작이었으리라.

고작 집 안에서 워킹패드 위를 걷는 거였지만 30분씩 시작했던 게 어느새 2시간으로 늘어났고, 4kg 남짓하던 가방의 무게도 두어 달 뒤엔 8kg가 되었다. 나름 걸을만했고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날은 있었어도 못 걷겠다 싶은 날은 없었다. 어떤 날은 2시간을 넘어 더 갈 수도 있는 느낌. 물론 하루 6-8시 간을 기본으로 걸어야 하는 산티아고 길이지만 나는 연습을 하고 익숙해지고 있다는 기분만으로도 자신감을 얻었다. 그런데....


무릎이랑 발목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처음 한 달은 뭐 안 걷던 사람이 걸으니 몸이 조금 삐꺽 대느라, 걷는데 적응을 하느라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발목이 싸하고, 무릎을 누가 툭 툭 치는듯한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막 아파서 못 걷는 건 아닌데 신경은 쓰이는? 그런 미미한 통증만 있어서 이참에 비싸게 주고 산 잠스트의 무릎보호대 와 발목 보호대를 실험해 보는 좋은 기회다 싶기만 하더라. 이때까지만 해도 아주 긍정적이었지. 그리고 잠스트는 명성에 맞게 걷는 동안 생기는 어느 정도의 작은 통증들을 잊게 해 주었다.


내 무릎과 발목을 책임질 삼총사 : 발목보호대, 무릎보호대, 등산스틱


그런데 문제는 6월에 들어서 더 심해졌다. 이제는 가방을 메고 걷는 순간 말고도 일상생활에서 어? 소리가 나올 정도로 무릎이 콕콕 쑤시기 시작했다. 그냥 집안에서 방으로 걸어 다닐 때에도 무릎이 아프고 발목도 시큰했다. 파스도 붙이고, 운동을 3-4일 쉬어도 봤지만 여전했다. 약국에서 염증을 낫게 해 주는 약을 사 먹고 크림을 바르다가 이거 안 되겠다 싶어서 7월 중순부터는 운동을 아예 멈췄다. 몸이 다쳐서 그 길을 제대로 못 걷는다면 운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5년의 승무원생활도 버틴 최대의 강점, 튼튼한 내 다리가 날 배신했다

튼튼한 내 다리, 허벅지와 종아리가 중심을 딱 잡아줘서 남들은 힘들다는 승무원 생활을 5년 이상 하면서 허리 한번 아픈 적이 없던 나였다. 게다가 운동 잼병도 아니고 오히려 운동을 엄청 좋아해 운동회에서 반대표는 다 도맡아 했던 운동 자부심도 가득한 나였다. 탁구, 테니스, 스쿼시, 달리기 뭐든지 남들 보다는 일찍 배우고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다리가 나를 배신하다니! 그것도 일생일대의 큰 결심을 하고 평생 한 번일 수도 있는 장기간 산티아고 순례길 앞에서 타이어 터진 차처럼 퍼져 버리다니 믿기 힘들었다. 내 몸이 나를 실패시킨 경험은 처음이라 당혹스러웠고, 표현하기 어려운 실망감 같은 것도 느꼈다. 사람들마다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다던 코로나 백신 접종 3회 모두 무증상에, 코로나에 걸린 2번의 경험도 좋은 컨디션에 웃으며 보냈던 나였다.


솔직히 내 튼튼한 다리라면 산티아고는 쉬울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걷기 연습은 무거운 가방에 적응 좀 해볼까 반 재미로 시작했는데 이렇게 우습게 아프기 시작해서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이거 내가 곧 40대라서 그런 건가? 어리고 건강한 20대, 30대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게 맞는 거겠지 되지도 않는 위안을 해보며 어디에서든 이유를 찾고 싶었다. 연습은 과연 필요했던 걸까?


님아, 큰길 앞두고 안 하던 거 하지 마오

모든지 개별차가 심한 게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말랐다고 몸 가벼워서 더 잘 걷고, 조금 무게가 나간다고 뒤로 처지는 게 아닐 거다. 내가 나이 핑계를 대 고는 있지만 60대, 70대 어르신 분들도 젊은 사람보다 더 꾸준하고 안정적으로 걸으시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나의 경험을 들자면 일단 가기 전에 안 하던 것들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차피 산티아고 길 위에서는 상태가 어떻든 많이, 아주 많이 걸어야 한다. 그것도 한 달 동안 연이어 끊임없이 걷게 된다.

나도 차라리 이 모든 경험을 산티아고에서 도착해서 부딪힐 걸 조금 후회가 된다. 건강한 내 몸을 온전히 가져가 길 위에서 내 몸을 알아가고 한도를 시험해 보는 게 나에게는 더 맞는 길이었을 것을 시행착오를 통해 알게 되어 아쉽다.


그래서 지금은 한 달째 운동 없이 집에서 푹 쉬고 있다. 운동을 그만두고도 3주 정도는 매일매일 무릎과 발목이 시큰해 이러다 이거 가기 전까지 안 낫는 거 아니야? 겁이 났지만 한 달이 지나니 통증도 감소하고 이제는 아주 가끔 미미한 느낌만 있는 걸 보니 역시 쉬는 게 답이었나 보다. 그나저나 짐 무게가 연습 때보다 더 무거워져서 식은땀이 난다. 이러다 첫날에 퍼지는 거 아닌지 걱정이 되지만 일단은 가방에 다 담아두어 보았다. 36L 등산 가방이 추석에 아주 잘 먹은 사람의 배처럼 빵빵했다. 뭐 하나 더 넣을 자리도 없다. 나는 빼도 박도 못하는 맥시멀리스트인 게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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