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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 혼자 산티아고 걸으러 가도 돼?

4주년 결혼기념일에 산티아고 순례길행 고백하기

by 몽키거

2023년 8월 22일


산티아고 순례길, 훌쩍 떠날 수 있는 곳이라면 얼마나 좋아?

산티아고를 가는 사람들은 비행기+기차로 이동하는 시간들을 포함해서 짧아도 한 달 이상을 잡는다. 800km에 달하는 멀고 먼 길을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들여 걸어야 함에 시간과 금전적인 부담과 한국에서 맡고 있는 직장이나 가족을 떠나 있는 부재에 대해 대체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길 위에서 만나는 한국인들은 대부분이 방학을 이용한 대학생들이나 휴학생, 직장을 그만둔 사람들 또는 이직을 앞두고 잠시 틈이 난 사람들, 자영업자 또 는 퇴직을 하신 분들이 주류라고 한다. 그만큼 시간의 구애가 가장 큰 걸림돌인 건 사실이 아닐까.


여보, 나 혼자 산티아고 가도 돼?

몇 년 전 신랑과 첫 만남으로부터 10주년 기념으로 산티아고를 함께 걷자고 물어봤는데 당찼던 내 제안만큼 신랑의 거절도 당찼다. 계속 생각이 들던 차에 더 늦기 전에 마흔 살을 기념하며 만 39살 생일 즈음 혼자라도 떠나고 싶다고 했다. 4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아 매년 찾는 레스토랑에서였다. 서로 기분 좋은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이때다 싶어 돌직구를 날렸던 것이고 다행히 신랑은 대답은 YES였다. 내가 얼마나 가고 싶어 하는지 알기에 조금이라도 아프거나 다치면 자기가 데리러 가게 바로 이야기해야 하고, 지체 없이 짐 싸서 같이 돌아온다는 조건으로 승낙을 해주었다. 내가 그동안 틈틈이 산티아고 노래를 부른 게 효과가 있긴 한가보다. 눈치를 봐서 휴가 받아야 하는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돌봐야 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라 신랑의 승낙과 동시에 나의 산티아고 행이 확정되었다. 그렇다 나는 이탈리아에 사는 백수로써 이번에 그 빛을 봤다.


"신랑 밥은 어떻게 하고 가니?

나는 너무 가고 싶었던 산티아고 순례길행을 확정하고 바로 예약에 돌입했다. 조금씩 윤곽이 잡혀가며 가까운 몇몇에게만 그 소식을 알렸다.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자인 우리 언니야 너무 좋아하지만 우리 엄마는 첫마디가 "신랑 밥은 어떻게 하고 가니?"였다. 역시나 우리 엄마다운 질문이었다. 너무나 다행인게 우리 신랑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self-sufficient 한 사람이다. 해군 파일럿으로 복무를 오래 했어서 혼자 자신의 루틴을 챙기고 준비하는데 익숙한 사람이라 나 없이도 잘하고, 내가 옆에서 다 챙겨줘야 하지 않아서 좋다. 그리고 불규칙한 비행 스케줄로 내가 없어도 엄청 바쁠 것이다. 바쁜 일상 속에 내 부재가 그에게 큰 공백으로 다가오질 않길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행복한 이탈리아의 배짱이

결혼을 하고 이탈리아로 삶의 터전을 옮겨오면서부터 일을 그만두었다. 그전에 참 즐거웠던 승무원으로서의 생활이 그립긴 하지만 결혼한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다시 기회가 온다고 해도 나는 일을 포기하고 이 사람과 결혼할 것이다. 지금까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응원해주고 지원해 주는 신랑덕에 단 한 번도 내가 일을 안 하기에 자존감이 바닥을 친 적은 없다. 오히려 산티아고를 준비하며 요즘은 내가 이탈리아의 백수인 것이 참 즐겁고 고맙다. 남들보다 홀가분하게 내가 원하는 것들을 차근차근 준비할 물리적인 시간과 심리적인 여유 둘 다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할 때, 원하는 장소로, 원하는 기간만큼 순수한 모험의 길을 떠나는 게 가능한, 내가 속한 나의 세상과 응원해 주는 가족들이 있어서 나는 이미 많은 걸 가진 행복한 사람임을 다시 한 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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