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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여권아, 앞으로 잘 부탁해

2023년 9월 4일, 마드리드에서 생장 가는 날

by 몽키거

새벽 5시. 마드리드의 숙소에서 기차역으로 가는 택시 픽업을 기다리며 가방을 메어 본지 한 1분 만에 벌써 허리가 뻐근하다. 이 가방을 풀로 착장하고 절대 걷지 못할 거는다는 확신이 든다. 안되겠다, 짐을 덜어서 보내야겠다. 아우 벌써 허리가 아프네... 신랑 비행시간이 나보다 일러서 먼저 마드리드 공항으로 보내고 혼자 여유 있게 샤워하고 준비를 했다. 이제 시작이다!


팜플로나 기차역에서 정신 차리기
기차역에 알사 버스 바로 있지 않습니다
팜플로나 기차역과 팜플로나 고속버스 터미널


마드리드 아토차역에서 기차가 40분이 넘게 연착된 데다 팜플로나의 기차역과 고속버스터미널역까지는 버스를 타고 20분을 가야 하는 거리라는 걸 뒤늦게 발견하고 식은땀이 났다. 조금만 더 넋 놓고 있었으면 나 팜플로나 기차역 도착해서 "프랑스 생장 가는 플랫폼이 어디 있죠?" 이렇게 여유 있게 물어볼 뻔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하늘이 주신 구글맵이 있으니 급하게 검색해 본 뒤 기차역 나오자마자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9번 차를 타고 버스터미널에 잘 내렸다. 생장으로 가는 알사버스는 매일 하루에 한 번, 오후 12시에만 있으니 어휴... 놓쳤다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여행을 갈 때 늘 이동 루트를 잘 확인하는 편인데 왜 평소의 나답지 않게 이런 걸 놓치고 생각 않고 있었다니.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지금부터 더 조심하면 되지. 정신 차리자!

*** 팜플로나 기차역에서 생장 가는 버스 바로 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다른 시내버스를 타고 고속버스터미널로 20분 정도 이동해야 해요! 그러니 버스 기다리는 시간, 버스 타고 이동하는 시간도 넉넉히 계산해서 여유 있게 가세요 ***


생장 가는 알사버스 경험담
이왕이면 앞쪽 그리고 오른쪽 창가에 타기
드디어 버스가 도착했다. 너무 설렌다.


버스로 1시간 45분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아침부터 택시, 기차, 시내버스에 이어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라가는 버스를 타려니 속이 좀 울렁거렸다. 멀미가 크게 없는 편인데도 이게 피곤한 건가 아니면 나이가 드는 건가 미미하지만 신경이 쓰일 정도의 멀미에 ‘아, 멀미약 하나 사서 먹을걸' 싶었다. 그 와중에 바깥 풍경은 또 보고 싶어서 계속 내다보는데 이런... 오른쪽에 탈걸 후회가 되더라.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올라가는데 오른쪽이 내려다보기 훨씬 좋은 자리였다.

기분이 꼭 홍콩에서 버스 타고 빅토리아 피크 올라갈 때 왼쪽 창가가 좋은지 오른쪽 창가가 좋은지 따지는 그런 거. 거진 2시간을 가니까 이왕이면 버스 줄도 미리 앞에 서서 기사님이 버스 아래 짐칸 문 열어주실 때 얼른 짐 던져 넣고, 창가에 앉아서 편하게 가는 게 좋다. 그리고 오른쪽 자리보다 더 중요한 거는 앞에 타기. 차 안에 대강 50-60명이 타는데 모두가 순례자들이다. 그 말인즉 내리면 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순례자여권을 받으러 순례자 사무실로 간다는 것. 한 명당 10분 정도 설명을 듣고 발권되는 순례자 여권이기에 내가 천천히 걸어가 뒤에서 기다리게 되면 1시간도 넘게 기다릴 수 있게 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나는 차가 도착해 멈추기 전에 구글맵을 찍고 내리자마자 가방을 찾아 빨리 걷기 시작했다. 그 차 안에 동양인은 나 포함해 2명, 한국인은 내가 유일했는데 다들 내려서 다리 스트레칭하고 서로 담소를 나누는 사이 나만 휙 자리를 뜨는 느낌이었다. 한국인인 저는 먼저 가서 여권 받을게요!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순례자 사무실까지는 빨리 걸어 10분 정도의 거리라 생각보다 가까웠는데 순례자 사무실이 가파른 언덕 끝에 있어서 걸으며 '어라?' 하는 느낌이 났다. ‘힘들다! 와... 나 10분도 안 걸었는데 이렇게 숨차서 내일 당장 26km를 걸을 수 있을까?'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앞으로 걷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뭐. 모두가 다 같은 길을 가는 거고 처음 온 사람들이 훨씬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준비 없이도 50대, 60대 심지어 70대 분들도 다 문제없이 걸으시고, 실제로 오늘 오며 가며 뵌 분들이 반 이상은 백발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셨다. 겁먹지 말고 가자!


동화 속 나라에 들어온 것 같은 귀여웠던 생장
드디어 순례자 여권을 받다
내일 떠나는 순례자들을 위한 연회를 하듯 축제 분위기의 생장


유럽감성 물씬 나는 돌길에 돌다리, 빼곡하게 들어선 중세시대 느낌의 돌과 나무로 지은 수많은 집들. 나에게 생장의 첫 느낌은 '동화 속 헨젤과 그레텔이 살법한 동네'였다.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지 모르겠지만 알록달록한 깃발들이 거리에 걸려있었고, 지나치는 사람마다 내일 시작될 모험에 들떠있는 살짝의 흥분된 느낌과 웃는 얼굴에도 단단한 결심들이 보이는 듯했다. 조용하면서도 단단하고 당찬 마을의 느낌이 참 좋았다.

빠르게 올라와 순례자 사무실에 도착하니 내 앞에 여덟 명 정도가 서있었다. 좋아, 이 정도 숫자면 아주 양호하지! 오후 2시에 문을 열고 20분이 지나 바로 내 순서가 되었다. 순례자 여권은 2유로. 발급을 도와주는 다국어를 쓰는 봉사자분들이 5분이나 있어서 꼼꼼하게 여러 자료를 주시며 설명을 해주셔도 10분이 채 안돼 끝났다. 여권을 받고 첫 도장을 쾅 찍어주시는데 기분이 얼떨떨하다. 출발하기 전에 여권을 만들면 뭔가 시작이다 느낌이 들 줄 알았는 데 의외로 덤덤했다. 그래도 내가 지금 말로만 듣던 생장에서 순례자 여권을 손에 쥐고 있다는 게 생소하지만 살짝 자랑스러웠다. 쑥스럽지만 순례자사무실을 배경으로 여권 들고 사진도 한 장 남겨본다.


나의 첫 산티아고 순례자 여권과 첫번째 쎄요


산티아고가 한국인들에게는 많이 사랑받고 유명한 길이라 한국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오늘은 딱 2분만 만났다. 한분은 말을 많이 섞고 싶어 하지 않으신 것 같아서 인사만 가볍게 나눴고, 한분은 미국에 사시는 아저씨인데 순례자 사무실 줄 바로 뒤에 계셔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순례자 여권 발급도 한자리에서 같이 받았다. 한국사람 많이 없는 외국의 도시에 사는 나로서는 오래간만에 나누는 모국어로의 대화가 즐겁기도 하고, 같은 목적과 여정을 앞두고 공유할 수 있는 주제가 있어서 더 재밌었다. 참 감사하게도 이후에 같이 옮긴 장소에서 식사를 사주시려 하셔서 내가 같이 낸다고 하니 "어디에서 봤는데 산티아고에서 어린 친구들에게 밥 한 끼 사주는 게 그 사람들에게는 큰 기억이 된다고 해요." 하시며 멋지게 내주셨다. 내가 어린 나이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보다 연장자께서 어린 동생 대접해 주시는 게 오래간만이라 쑥스럽지만 보살핌 받는 느낌이 싫지만은 않았다. 나도 나보다 어린 친구와 산티아고 여정 중 길동무를 하는 일이 생기면 꼭 이분처럼 한 끼를 대접해야지 다짐했다.


드디어 생장 삐에 드 뽀흐에 도착하긴 한 거구나
생각보다 여정이 길어서 피곤하다.

마드리드에서 묵었던 숙소에서 아토차 기차역으로 택시 15분, 기차로 팜플로나까지 3시간 간 후 시내버스 타고 20분 걸려 버스 터미널로, 버스 타고 프랑스 생장까지 1시간 45분. 총 5시간 20분의 여정에 택시, 기차, 시내버스, 고속버스를 연달아 타니 지친다. 12kg의 가방을 여기저기 이동하며 들고 다녀보니 아이고 허리야... 31일 여정 전체를 가방을 보내고 다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아니 이럴 거면 진짜 크고 넉넉한 가방을 가지고 오는 건데 말이야! 내 36L 가방은 닫기가 힘들 정도로 아주 빵빵한 게 곧 터질 것 같다. 내일은 가장 난이도 높은 피레네산맥을 넘는 날이라 짐은 보내고 보조가방만 들고 가기로 결정. 내일 들고 갈 물건만 빼었는데도 가방이 다시 꽉 차있는 건 뭐지? 여하튼 이번이 내 첫 산티아고이니 모든 게 완벽할 수가 없지. 다음에 오면 훨씬 큰 가방을 가져오리라 생각해 본다.


마드리드에서 코감기가 좀 걸려온 것 같은데 오늘 기침을 하니 허리가 아프다. 아마 피곤하긴 한가 보다. 무겁다고 비타민이나 영양제 하나도 안 들고 왔는데 들고 올걸 하는 아쉬움이 스친다. 오늘 6시에 까르프에서 장본 것을 마지막 일정으로 숙소에서 샤워하고 쉬었다. 한 것도 없는데 글을 쓰고 나니 벌써 8시 반이다. 얼른 자고 내일 새벽에 잘 일어나 보자!


순례자 사무실에서 다양하게 챙겨주신 정보들. 내가 생장에 있다니!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4일 생장의 Makila

가격: 30유로 (42000원)

구글평점 4.7, 내 평점 4.5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수건 없음

담요/이불 유무 : 담요가 하나씩 제공 (복잡하게 침낭 안 꺼내 쓰고 좋았다.)

위치 : 바로 오른쪽이 순례자 사무실, 바로 왼쪽이 하코트랜스 가방 이동 서비스 사무실. 큰 까르푸도 차도 따라 걸어 12분 거리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네!

나의 경험 : 나는 4인실에 모두 단층 침대인 여성전용 룸을 썼고, 침대마다 커튼, 조명, 충전단자가 잘 돼있어서 좋았다. 화장실은 방 옆에 따로 만들어져 있었고, 샤워실은 4명만 쓰는 룸 안에 작지만 깨끗하게 되어있어 편했다. 침대도 크고 여유 있고 무엇보다 여자들만 있으니 산티아고 시작 전날 마음이 훨씬 덜 쓰이고 조용하고 편했다.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아주 조용하고, 시설들도 깔끔하고 신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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