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9일 순례길 5일 차,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에스테야
2023년 9월 9일 Camino de Santiago Day 5
Puente la Reina - Estella : 21.99 km
출발 06:50/ 도착 13:00, 총 5시간 50분 걸림
어제는 개인실이라 코 고는 걱정도 안 해도 되니까 에드빌 PM을 먹고 일찍 잤다. 내가 아는 모든 약 중에 잠이 확실히 오는 건 미국에서 사 오는 Advil PM이 정말 최고다. 에드빌 PM을 먹고 잔날은 꼭 꿈을 꾸는 것 같다. 이 산티아고에서 어이없게 SK 최태원 회장님과 면접을 보고 취직한 꿈이랑 곧 결혼하는 친구의 딸이 보이는 꿈을 꿨다. 아무리 꿈을 꾼다고 해도 잠은 푹 잔 느낌이라 다행이다. 6시 50분에 준비 끝, 오늘도 출발이다.
오늘은 앞에 오르막길이 꾀나 긴 게 있었고, 중간에도 계속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는 길이다. 평지가 쭉 이어진 부분이 거의 없어서 그저 쉬듯이 걷자~ 하는 편한 길은 많이 없었다. 그래도 나름 5일 되었다고 걷는 게 많이 익숙해졌다. 첫날부터 아팠던 허벅지의 뭉친 통증도 많이 옅어졌고 이튿날부터 쑤셨던 울리는 듯한 무릎 통증도 조금은 나아졌다. 역시 운동으로 결린 근육들은 운동으로 풀어줘야 하나보다.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 오늘이 아니었어?
오늘은 수도꼭지에서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이라체 수도원을 지나는 날인 줄 알고, 와인이 나오기 시작한다는 8시에 맞춰 일부러 늦게 아침 7시쯤에 출발을 했다. 그런데 한 시간을 걸어도 이라체 수도원이 보일 기미가 안 보인다. 슬슬 해가 뜨고,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와인은 정해진 양만 나오기에 많은 사람이 와인을 가져가면 동이 나 못 먹는 경우도 있다 들었기에 엄청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급해진 마음에 내 눈에는 모든 사람들이 경쟁하듯 빠른 걸음으로 서두르는 것같이 보였고 쫄리는 마음에 나도 경보하듯 빨리 걸었다. 와인을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걷는 것 외에 몇 안 되는 색다른 경험이니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해는 밝게 떴고 아침 8시 반이 되어 첫 카페에 도착했다. 순례길을 관통하는 지점에 사랑방처럼 자리 잡은 이 카페에서 나와 같이 걷는 J 씨와 어제 만난 H 양, 한국인 모녀 순례자까지 모두가 아침 식사를 하고 계셨다. 이리 반가울 수가. 어머님께 인사도 드리고, 얼른 오렌지주스와 크림빵을 사서 '한국인 테이블'에 앉았다. 급한 마음에 앉자마자 J 씨, 이라체 수도원 곧 나와요?" 하고 물으니 “누나 그거 내일이에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순간 머릿속에 댕~하는 종소리가 울린다. 어이가 없으면서 동시에 내가 오늘 놓친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몰려온다.
J 씨는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어 든든하다. 꼭 산티아고 순례길을 적어도 2번은 온 사람처럼 길도 잘 알아서 늘 신기하다. 아무리 봐도 첫 산티아고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오늘 언덕은 이래저래 높다고 하네요. 한 시간 뒤에는 이제 내리막 시작이에요., 언덕 두 개만 넘으면 끝이에요., "오늘 걷는 길 뷰가 그렇게 좋대요." 이렇게 말을 하는데 어떻게 첫 순례길인데 그리 잘 아냐고 물으면 오기 전에 공부했어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이건 정말 신이 주신 능력 수준이다. J 씨랑 걸으면 꼭 산티아고 순례길 가이드랑 함께 걷는 게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다. 어제와 오늘 다른 숙소에서 다르게 일정을 시작했는데도 이렇게 만날 사람은 길 위에서 다시 만난다. 그리고 J 씨는 언제 봐도 너무 반갑다.
산티아고에서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아침 식사 후 2시간 정도를 더 걷다가 J 씨가 "누나, 저기 보이는 곳에 한국인이 운영하시는 호스텔 겸 Bar인데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판다고 유명해요." 하고 가이드처럼 언지를 해주신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당연히 가야지!
Albergue de Lorca의 Bar 안으로 들어가니 한국인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로 맞아주셨다. "우리집 또르띠아가 정말 맛있어요."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아서 "네! 그럼 두 개 주세요!"하고 초리조가 들어간 것과 일반 또르띠아를 시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조금 뒤 또르띠아를 건네주시는 주인아주머니가 폰으로 사진을 한 장 보여주신다. 이분들 맞죠?" 사진을 들여다보니 나와 J 씨의 사진이다.
알고 보니 우리보다 걸음이 빨러 늘 앞서 가시는 선생님이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지나가시며 이 사진 속의 남매가 오면 맛있는 또르띠아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라고 미리 계산하신 것. 크아~ 너무나 스윗하신 제스처에 우린 바로 녹았다. 드라마 같이 어찌 우리가 여기 멈출 줄 아시고 계산을 해두셨단 말인가! 바로 당장 사진을 찍어서 선생님께 잘 먹겠습니다~하고 문자를 보냈다. 정말 이렇게 스윗한 서프라이즈를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받을 줄 몰랐는데 정말 심쿵했다. 게다가 여기 또르띠아 정말 맛있는 게 나중에 두고두고 기억에 날 맛이었다. 한국인 사이 말고도 원체 평이 좋은지 그새 북적북적 해진다. 다른 분들도 앉을 기회를 주기 위해 서둘러 먹고 다시 우리의 길을 재촉해 오늘의 종착지 에스테야로 들어왔다.
*** Albergue de Lorca ***
31일간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여기보다 맛있는 또르띠아를 다시 본 적이 없으니 지나갈 때 정말 꼭 들리셨으면 한다. 특히나 초리조가 들어간 또르띠아 너무 맛있다.
최고의 호스텔에서 최고의 삼겹살 파티
오늘의 알베르게는 정말 유명해서 늘 풀 북킹인 아고라 호스텔이다. 무려 구글맵 평점이 4.8이라는데 이게 가능한 점수일까 싶은 곳이었다. 실제로 사용해 보니 4.8이 합당한 정말 최고의 호스텔이었다. 모던하고 깨끗하고, 라운지나 식당이나 모든 시설이 순례자 맞춤같이 기구들을 싹 갖추고 있었다. 오늘은 다행히 1층 침대를 받아 기분도 좋았다. 어제 처음으로 호텔을 써보고는 솔직히 '아~ 전체 일정을 다 호텔 개인실로 잡을걸' 생각이 들었는데 무려 3개월 전에 모든 숙소를 다 예약했을 그 당시에 내가 얼마나 구글 평점을 잘 비교하고 리뷰를 봐가며 신중하게 골랐는지, 정말 좋은 오늘의 호스텔을 보며 잘했구나 싶다. 게다가 오늘은 정말 신기하게 선생님, J 씨, 미국아저씨, 나까지 모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은 알베르게에 묵는 날이다. 선생님의 회사 일이 있으셔서 딱 일주일만 걸으시고 되돌아가시는 일정이신데 그 모든 일정이 끝나기 전에 이렇게 다 같이 머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도 너무 신기하다. 부엌이 너무 잘 되어있어서 오늘의 식사는 선생님이 요리사가 되어 성대한 삼겹살 파티를 열어주셨다.
선생님은 아스파라거스에 마늘, 양파 구이에 삼겹살을 초벌까지 해가시며 정말 내가 먹은 인생 최고의 삼겹살을 구워주셨다. 어쩜 삼겹살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다른 차원이 맛있음이었다. 고기를 구워주시는 선생님이 “신기하지 않아? 여기 스페인 삼겹살은 고기 굽는 냄새가 안 나네?" 하시길래 생각해 보니 이미 머리카락 깊이 배어있어야 할 고기 냄새가 한참을 부엌 안에 있었는데도 없었다. 오~ 이거 우리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앞으로 산티아고 순례길 걸으시면서 고기 구워 드시는 분들도 꼭 확인해 보셨으면 좋겠다. 신기해.
팜플로나 아시아 마트에서 사 오셨다는 한국 고추장까지 곁들어 알싸한 마늘 한 점 넣고 먹는 쌈은 크... 말해 무엇하리 천국이다. 밥을 다 먹고는 계란 넣고 라면까지 끓여주셔서 스페인 에스떼야에서 한국식 만찬을 제대로 즐겼다.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식사 후에 와인도 한 병 마셔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잠시 나와 숙소 근처의 작은 서점에 가서 선생님의 마지막 날에 드릴 조그마한 배지들과 자석, 엽서를 샀다. 각자 휴식을 가질 시간에 로비에서 선생님 몰래 미국 아저씨와 J 씨를 불러 엽서에 돌아가며 메시지를 남겼다. 아직 선생님의 산티아고는 이틀이 더 남았지만 우리가 한 곳에 묵는 날은 오늘이 유일하니 작게나마 미리 송별회 선물을 마련해 본다. 오늘은 선생님의 엄청난 요리 실력으로 내 배가 여기가 한국인지 스페인지 헷갈릴 정도로 찐한 한국의 맛과 정으로 가득 채워져 하루를 마무리한다. 너무 행복했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9일 에스테야의 Agora hostel
가격: 18유로 (2만 5천 원)
구글평점 4.8, 내 평점 4.8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수건 없음
담요/이불 유무 : 이불 없음
위치 : 도시 가운데, 근처에 슈퍼도 있다.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무조건 네!
나의 경험 : 정말 쾌적하고 모던하고, 31일 중 부엌 시설이 가장 잘 갖춰져 있던 곳. 개인실이 있는 줄 미리 알았다면 개인실을 예약했을 것 같다. 저녁에 잘 때 에어컨이 없어 조금 더웠지만 샤워실, 로비 시설, 호스트의 친절함까지 모든 게 최상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