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7일 순례길 13일 차, 부르고스에서 오르닐로스델카미노
2023년 9월 17일 Camino de Santiago Day 13
Burgos - Hornillos del Camino: 20.87 km
출발 07:18 / 도착 12:43, 총 5시간 25분 걸림
날씨가 우리를 놀리네
오늘은 하루종일 부슬비가 내린다. 지난날들은 비가 왔다 안 왔다 했는데 오늘은 멈춤 없이 온종일 내린다. 다행히 신발이 젖을 정도는 아니고 앞 발가락만 살짝 축축해질 정도였다. 장대비가 쏟아지지 않는 게 어디냐 이 정도면 감사하지 싶어 걷는 내내 컨디션이 좋았다. 그렇게 긍정적인 마음으로 열심히 걸았건만 오늘의 알베르게에 도착하고 나니 비가 멈추다 못해 하늘이 아주 맑게 개었다. 인생이란 게 다 그렇지 뭐... 하늘을 바라보자니 헛웃음이 난다. 어느 정도로 날이 맑아졌냐면 모자와 선글라스 없이는 너무 뜨겁고 눈이 다 부신다. 우리가 뭐 어쩔 도리가 있었겠어? 오늘 하루 열심히 잘 걸었고 잘 도착했으니 감사하자.
오늘 아침에는 J 씨가 약속했던 것보다 늦게 나왔다. 걸을 때 사용하는 스틱을 숙소에 두고 온 걸 한참 나와서야 깨닫고, 되돌아가 가져와야 했기 때문이었는데 산티아고 순례길 13일 차, 슬슬 긴장이 풀리는 시기인가 보다. 틈틈이 서로 한 번씩 일깨워주고, 조심해야겠다.
오늘길도 난이도로 치면 하였다. 대부분이 평지에 길이도 짧았고, 나름 즐기면서 걸었다. 이렇게 쉽고 짧았던 길을 5시간 넘게 걸리다니 이래서 비가 무서운 거다. 우리 딴에는 문제없이 잘 걸은 것 같은데 의외로 시간이 많이 지체된 건 오직 비라는 자연의 힘 때문이다. 아마도 중간에 한 번씩 우비랑 가방도 정리할 겸 바에 두 번이나 들려서 지체된 것도 있을 거다. 여하튼 잠깐씩 들린 바에서 맛있는 아침과 간식들을 먹어서 행복했으면 된거야.
어제는 잠을 정말 깊고 길에 잘 잤다. 10시 반에서 새벽 6시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통잠을 자서 컨디션이 좋았던 것 같다. 역시 개인실은 가격은 조금 더 나가도 피로해소도 되고 힐링도 되고 여러모로 제값을 한다. 아마 그 전날 공용 숙소에서 잠을 설친 게 피로가 쌓였었는지 눕자마자 잠이 들어 아침에 일어나다니 쉬길 잘 쉬어서 그런가? 다른 사람들은 물집도 생기고 이곳저곳 아프기 시작한다는데 난 흔한 물집 하나 없이 정말 쌩쌩하다. 여하튼 참 복도 많단 말이야. 너무 다행이다. 끝까지 잘 유지를 하길 바랄 뿐이다.
순례길 위의 작은 성당에서 펑펑 울었다
비를 맞으며 오늘 길의 절반 정도를 지났을 때 작은 성당이 보여 세요를 받으러 들어갔다. 나는 몰랐는데 H 양이 아마도 여기가 수녀님들이 만드신 목걸이를 주는 곳 같다고 한다. 아는 분이 부탁을 했었다고 하나 받아가겠다고 하는데 실 메달을 그냥 건네주시는 게 아니라 받을 사람의 이름을 묻고 한 명 한 명 손을 잡고 기도를 해주신다. H 양이 수녀님의 기도를 받는 모습을 보는데 눈물이 찔끔 났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경건한 마음이 들었지만 눈물이 날 줄은 몰랐다. 그녀를 보고 나도 따뜻한 기도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게 수녀님께 물어봤다.
"저도 기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수녀님이 당연하다며 너무 편안한 얼굴로 웃으시며 나에게 줄 메달을 조심스레 준비하시고 내 이름을 물어보셨다. 그 순간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쏟아져 나오는 눈물에 내 이름을 말하지도 못했다. 그냥 그 순간이 너무 따뜻해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처가 씻기는 느낌이었다.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겨우 이름을 말하자 수녀님은 또박또박 내 이름을 다시 새기신 다음 정확한 발음으로 내 이름을 부르시며 영어로 기도를 시작하셨다.
믿음의 기적, 성모 마리아는
당신의 곁에서 평생 동안 너를 보살펴 주시며
위험과 질병으로부터 지켜주실 것이고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나의 무사한 여정과 안녕을 바라주시는 수녀님의 고요한 목소리에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화려한 성당의 분위기에 압도된 것도 아니고 정말 길 위의 작디작은 소박한 성당인데, 한 수녀님의 따스함에 감동과 위안을 받은 순간 나는 애처럼 울었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아무 조건 없이 내 안위를 걱정해 주시고 나의 안녕을 바라다니... 이런 아가페적 사랑은 종교에서만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오랜만에 종교라는 커다란 울타리 안에서 순수하게 사랑받은 경험은 참 소중하고 감사했다. 영혼이 온화해지는 이 경험을 언니와도 함께하고 싶어 수녀님께 일주일 뒤 스페인에 도착해 순례길 여정을 시작할 언니를 위한 기도도 받았다.
성령이 충만한 순간이었다고 할까? 지금 내가 인생에 힘든 시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고민을 깊이 해가며 풀어야 할 숙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나름 내 삶의 편한 지점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유난히 마음이 동했다. 나의 울음은 슬픔도 아닌, 고통도 속죄도 아닌 안도감이었던 것 같다. 사랑받음에 감사함, 내가 지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경험하는 모든 것에 대한 경이로움과 행복. 한마디로 모든 게 평온했다. 내가 순례길 위해서 무언가를 찾아야지 단단히 각오하고 온 것은 아니지만 오늘 성당에서 받은 기도를 통해 느꼈던 타인에게 받은 위로와 따뜻함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통틀어 가장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 같다. 내가 다음에 다시 산티아고를 걷게 된다면 꼭 수녀님을 다시 뵐 수 있길 바라본다. 지금 이 순간 순례자인 나를 위해 해주신 순수한 기도에 더 큰 용기가 생겼다. 힘을 내어 남은 거리도 씩씩하게 걸어 오늘의 목적지 오르닐로스 데 카미노에 도착했다.
점심, 그리고 저녁도 먹어야 힘이 날 것 같아요
대왕 빠에야 너무 멋지잖아
오늘 점심은 숙소 옆 작은 구멍가게에서 파스타와 보로네제 소스를 사다가 요리를 했다. J 씨는 바로 다섯 걸음 앞에 마주 보고 있는 알베르게에 묵기 때문에 내가 숙소에서 파스타를 만들어 같이 먹기로 했다. 원래는 이렇게 점심 한 끼만 제대로 먹으면 저녁은 가볍게 과일만 먹어도 되는데 요즘엔 순례길이 길어지며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지 저녁에도 배가 고프다. 그래서 오늘 저녁은 J 씨 알베르게의 다 같이 먹는 커뮤니티 디너를 신청했다. 대왕 빠에야라는데 기대된다.
오늘의 점심 볼로네제 파스타는 별거 안 들어가 있지만 언제 먹어도 맛있는 실패하기가 더 힘든 토마토 베이스 파스타다. 내가 외국에서 유학을 한다면 파스타로 연명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파스타는 세상에서 가장 쉽고 맛있는 음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 있던 메구미에게도 나눠주고 J 씨, 오늘부터 함께 걸은 H 양과 함께 단출하지만 즐거운 식사를 했다. 내가 파스타를 만든다니 그새 내 음료까지 사서 준비해 둔 센스 있는 J 씨. 귀여운 동생 덕에 호강한다.
각자의 휴식을 갖으며 나는 언니와 신랑과 긴 통화를 하며 하루에 대한 보고를 해본다. 우리 신랑에게 오늘 교회에서 경험한 일을 이야기하며 무조건적인 사랑은 종교에서만 가능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니 자기가 주는 사랑도 무조건적이지 않냐고 한다.
“음, 아니야. 나도 배우자인 신랑을 사랑해야 한다는 거, 둘이 서로 사랑을 해야만 이어질 수 있는 관계이니 부부는 반 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 “
라고 대답하니 샐쭉한 반응이 돌아온다. 이봐, 나의 반쪽아. 오늘 너의 부인이 매우 홀리한 느낌이니 오늘은 언쟁을 안 하겠어. 사랑한다!
알베르게 Meeting point에서 13유로에 먹은 커뮤니티 디너는 대성공이었다. 기본으로 나오는 야채샐러드와 와인도 맛있고, 엄청나게 큰 팬에 만들어져 나온 대왕 빠에야는 두 그릇을 먹을 정도로 맛있었다. 25명 정도가 앉을 수 있게 길게 붙인 식탁에서 모두가 한가족처럼 밥을 나눠 먹으니 더 맛있는 것 같다. 역시 밥은 함께 먹을 때가 제일 맛있다.
다행히 나는 한국인 동생들이 있어서 긴 하루를 끝내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내 모국어로 같이 말하고 그날의 감상을 나누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메구미가 조금 안쓰러웠다. 아무리 차가워 보이고 강단 있는 아이여도 늘 누군가와 영어로 대화를 나눠야 하고, 우리끼리 한국어로 말할 때 얼마나 답답할까. 밥을 먹던 중간에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나도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영어를 주로 사용하지만 아무래도 더 깊은 공감대를 나누기엔 태어나고 자란 문화와 언어를 이길 수 없다. 그래도 늘 아쉬운 티 안 내고 영어로 끝까지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면 메구미는 속까지 단단한 사람이라는 걸 느낀다. 다른 나라 사람이고 더욱이 속내를 알기 힘든 일본인이지만 그 강인함이 참 큰 매력이다. 나도 저런 단단함을 배우고 싶다.
9월의 숙소 예약 대란
전부 예약 끝낸 과거의 나를 칭찬해
오늘 오후에는 난리가 났었다. J 씨와 H 양이 머리를 맞대고 숙소 정보를 공유하며 가능한 모든 날의 숙소를 예약하고 있다. 때로는 전화로, 이메일로, 와츠앱으로 연락을 해가며 정신이 없어 보인다. 요즘 이렇게 모든 순례자들이 숙소를 예약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모두들 급성수기인 여름을 지난 요즘 9월에 숙소를 구하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 상상도 못 했고 대비도 못했다. 여기 오르닐로스 데 카미노에서도 숙소가 없어 다른 마을로 더 가던지 돌아가는 사람을 오늘 무려 5명이나 보았고 모든 알베르게에는 똑같은 문장을 단 안내판을 문 앞에 걸어놨다.
Completo
내가 무려 3달이나 앞선 6월에 31일 여정의 모든 숙소(산토베니아 데 오카 한 곳 빼고) 예약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안 하는 걸 권유했다. 대부분 팜플로나까지 3일만 예약한다며 걷고 싶은 만큼 걸으려면 예약을 안 하는 게 낫다, 무슨 일이 생겨서 못 걸을 수도 있으면 어떡하냐 등등 부정적인 의견이 더 많았다. 그런데 말이지 사람이 정말 무한한 힘을 가진 게 목표가 정확히 있고 나에게 그게 유일한 선택지라면 다 걷게 돼있더라.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길 13일 차인 오늘까지도 내가 예약해 둔 모든 숙소에 매일 잘 도착해서 편하게 쉬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공립에 줄 서야 해서 서둘러 걸어가거나, 오늘처럼 비를 맞고 도착한 마을 전체가 다 풀이라 다른 마을로 이동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 내 경험을 통해서 말하건대 숙소 예약에 대해서는 마음이 가는 대로 준비해도 된다고 본다. 뭐가 정석이다, 이건 맞다, 저건 틀리다 이런 모든 의견 무시하고 성향에 따라 준비하면 된다. 이건 누가 대신 걸어주지 않는 '나의 산티아고'니까 말이다. 나는 불확실성을 싫어하기에 아마 다시 태어나도 히피로는 못 태어날 것 같다. 특히나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걷는 거 다음으로 중요한 게 자고 쉬는 건데 오늘밤 내 몸을 뉘일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가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다음에 산티아고를 다시 걷는다 해도 또다시 여정 전체의 모든 숙소를 예약하고 걱정 하나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걸을 것이다.
저녁에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크~ 미리 전체 숙소 예약을 한 과거의 나를 칭찬한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17일 오르닐로스 델 카미노의 El Alfar de Hornillos
가격: 13유로 (1만 8천 원)
구글평점 4.5, 내 평점 4.0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없음
담요/이불 유무: 없음
위치 : 오르닐로스가 정말 집 몇 채 있는 작은 마을이라 다 똑같다. 근처에 물이랑 간단한 요깃거리 살 수 있는 점포하나 외에 아무것도 없다.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아마도요.
나의 경험 : 나무 바닥에 오래된 시설, 화장실 변기와 샤워시설이 같이 있어서 누군가 볼일을 보면 난 샤워를 못한다. 시설만 보면 그동안 지낸 곳 중에 제일 별로인데 가격 대비로 치면 만족한다. 하지만 침대가 조악해 2층으로 올라가려면 침대 전체가 흔들리니 주의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