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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택시 탄 날

2023년 9월 21일 순례길 17일 차, 까리온데로스콘데스에서 레디고스

by 몽키거
2023년 9월 21일 Camino de Santiago Day 17
Carrion de los Condes - Ledigos : 23.2 km
택시 타고 다음 구간으로 점프한 날


걸어야겠어!

내 알람이 울리기도 전인 6시 30분, 벽을 통해 들리는 다른 순례자의 알람 소리에 일어났다. 역시나 예보에서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쏟아지는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오늘은 택시를 타기로 결정한 날이라 더 잤어도 되는데 미미한 소리에도 자연스레 눈이 떠지다니, 나름 2주 넘게 해온 패턴이라고 몸이 기가 막히게 알고 반응을 한다. 사람은 습관으로 만들어지는 동물이니 이렇게 산티아고에서 매일 조금씩 하는 것처럼 운동이나 다이어트나 공부 등 이제는 무엇을 해도 실패 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내년이면 마흔이고, 누구나 아는 이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처럼 이렇게 몸을 통해 배워야 비로소 이해가 간다. 옛날 어르신들 스타일로 말하자면 '맞아야지 정신 차리지 ‘식인 거다


걸어야겠어!


지금까지 씩씩하게 16일이나 잘 걸어 놓고 이제 딱 절반이 넘은 시점에서 오늘 구간이 길고, 발가락이 아프고, 비가 온다는 이유로 택시를 탄다는 게 영 마음에 걸린다. 자존심 상하는 느낌이랄까. 너무 찝찝해서 걷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걷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굳어지며 서둘러 준비를 했다. 택시를 타러 모이기로 한 장소가 하필 내가 묵는 숙소의 1층 카페라 내가 가버리면 그 친구들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지만 나중에 밥을 사던, 택시비를 내주던 어떻게든 만회할 길은 있다고 생각해 일단 길 나설 준비를 한다.


준비를 마치고 계단을 걸어 로비로 내려가는데 발가락이 너무 아프다. 이건 어제보다 더 아프다. 그래도 마음을 고쳐먹었으니 한번 가보자! 하고 숙소 문을 여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고 있다. 발가락 아픈 것도 참고 가보려는데 장대비를 보는 순간 내 마음의 불이 확 사라진다. 이런... 몸이 아프니 마음도 같이 아프다. 발가락 하나 아픈 게 전체 여정에 지장을 주는 게 속상했다. 몸에서 가장 작고 하찮은 부위인 새끼발가락이 내 일생일대의 모험을 좌지우지하는 거, 내 몸이 내 앞길을 막는 이 상황이 속상하다. 근데 이미 아픈 거 어쩌겠어. 오늘은 이 날씨에 이 발가락으로, 바도 화장실도 없는 구간을 4시간 넘게 걷지는 못하겠다. 날씨라도 좋던가, 발이라도 안 아프던가, 하다못해 바라도 자주 있어 화장실 걱정 안 하고 걸을 수 있던가. 이건 뭐 워스트 3관왕의 덫에 제대로 걸린 것 같다. 이 상황에 무리하면 걷는 것 자체가 행복할 것 같진 않았다.


순례자라면 당연히 걸어야 하는 거리를 건너뛴다는 생각이 아직도 용서가 안되긴 했지만 이왕 택시를 타기로 한 거 스스로에게 이 경험에서 좋은 교훈을 배워보자고 다독여본다. 많은 순례자들이 각자의 고통과 상처와 물집을 가지고도 길을 걷고 있을 걸 생각하니 나도 걸어야 할 것만 싶지만 지금은 내 몸을 돌보는게 우선인 것 같다. 지금까지 안 아팠던 것에 감사하고, 오늘 하루 푹 쉬고 더 잘 회복해서 더 행복하게 잘 걸을 내 모습을 생각하자! 이미 아픈걸로도 신경 쓸게 많은데 속상해하지 말자. 하루 쉬어도 돼!


순례길에서 택시 잡을 때 알아둘 점
산티아고에는 택시가 많이 없다
산티아고 택시는 예약 필수다 (원하는 시간 아무 때나 막 탈 수가 없다)
산티아고 택시는 비싸다


오늘 타기로한 택시도 J 씨가 바에 물어봐 받은 번호로 왓츠앱을 통해 미리 예약해 둔 거다. 20분 거리에 46유로, 한화 6만 5천 원에 잡았다. 그것도 택시 기사님의 시간에 맞춰 뜬금없는 11시 40분에 우리를 데리러 오신단다. 아침 일찍 체크아웃이었던 동행들에 맞춰 일찍이 카페에서 만나 아침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두 시간 정도를 보냈다. 이야기 나누는 내내 오늘 걸었어야 했다는 심란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불행 중에 다행인지 카페의 커피가 기가 막히게 맛있어서 기분이 좀 풀린다.


커피가 왜이리 맛있는지 웃프다


알베르게, 너마저 이렇게 아름답다니
아니 왜 밥도 맛있고 그래
과일, 물, 어메니티까지 왜 이리 좋은거야

택시를 타고 오늘의 도착지인 레디고스에 도착했다. 차로 2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우리는 5~7시간 정도를 매일 걷는 거구나... 오늘은 다른 동행들도 같은 숙소 La Morena에 묵는데 도미토리 건물과 개인실로 건물이 나눠져 있었다. 개인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올라갔는데 알베르게가 모던하고 너무 예쁘다! 지금까지 17일 중에 제일 예쁘고 깔끔한 방이었고, 안에는 물과 과일이 있고 샴푸, 컨디셔너, 풋로션 키트에 심지어 베개 위에 초콜릿까지 있다. 뭐야 이거 산티아고 알베르게계의 5성급 호스텔이다! 바닐라 향의 에어 프레쉬너까지 있는 게 달콤한 향이 기분 좋다. 바닐라향 내가 정말 좋아하는데 말이야, 무언가 심란한 내 맘을 풀어주려는 맞춤 숙소 같았다.

‘이렇게 멋진 숙소는 오늘 힘겹게 걸을 뒤 상으로 받았어야 했는데…’

멋진 숙소를 보고 즐거움보다는 아쉬움이 먼저 몰려왔다.


오늘은 밥도 더 맛있구나


동기들과 짐만 풀고 나와서 El Palomar라는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스페인은 시에스타와 브레이크 타임 때문에 때를 잘 맞춰 점심을 먹지 않으면 저녁까지 기다려야 하니 서둘렀다. 그런데 뭔 일이야, 숙소도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여기 점심도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첫 코스는 내가 좋아하는 라따뚜이다. 물론 스페인식이긴 하지만 야채가 듬뿍 들어간 건강한 맛의 맛 좋은 토마토 야채 스프라니. 몸이 그냥 녹아내린다. 양도 많아서 이거 하나 먹고 나니 배가 부르다. 두 번째로 나온 음식은 돼지고기구이, 샐러드와 함께 나무랄 데 없는 맛이다. 식사 내내 심난해하는 내 모습을 보고 동생들이 이왕 여기 택시 타고 잘 온 거 잊자 잊자 하며 와인잔을 부딪혀 준다. 내가 더 어른스러워야 하는데 미안하고, 그들의 익살스러움이 고맙기까지 하다. 오늘은 비록 내가 좀 다운되어 있지만 이 친구들한테 위로를 받고 힘을 내는 만큼 나도 이들이 힘들 때 열렬한 응원단이 되어주리라 다짐한다. 이들 덕분에 웃을 수 있었던 감사한 식사 자리였다.


침대가 정말 넓고 편했다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우니 창밖으로 활짝 게인 환한 날씨가 보인다. 오늘 평소 걷던 길을 안 걸었으면 더 힘이 넘쳐야 하는데 반대로 더 졸리고 피곤해서 그대로 잠에 들어버렸다. 아마 내가 내 감정과 씨름하느라 지쳤나 보다. 다행히 나의 고민을 날려줄 정도로 너무 맛있는 낮잠이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잖아
오늘의 적은 내 발가락이었을까 나였을까

오늘 하루는 나에 대해서도,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며 지나간다. 시간이 지나면 화도 후회도 아쉬움도, 대부분의 감정은 해소가 된다. 단지 앞으로는 얽매여있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일단은 움직이며 계획해 둔 일들을 하며 다른 에너지로 대체를 해나가는 강인함을 키우기로 했다.

여하튼 오늘은 걷기를 포기하고 쉬어가는 나 자신이 후회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날도 게이고 나와 같은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일정을 소화한 다른 순례자들을 보았을 때 내가 실패한 것 같은 허탈함과 동시에 부러움, 후회 등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배웠다. 길을 걸으며 내가 한 선택에 적어도 후회는 하지 말자는 것.

이번에 택시를 타고 점프를 하며 아마도 다음에 산티아고에 다시 와서 비슷한 상황이 생긴다면 아파도 걸으리라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적어도 택시를 타고 점프를 했을 때 내가 이런 후회의 감정을 가진다는 걸 배웠으니 다음에 안 하면 되는 거다. 무언가 이번이 나의 유일한 산티아고일 것 같지가 않다. 아마도 난 산티아고 순례길을 매우 즐겁게 걷고 있나 보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21일 레디고스의 La Morena

가격: 개인실, 55유로 (7만 8천 원)

구글평점 4.4, 내 평점 4.5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2개 있음

담요 / 이불 유무 : 있음

위치 : 주위에 작은 슈퍼조차 없는 동네. 너무 작아 위치랄 것도 없다.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이 동네에 머문다면 백 프로 다시 옵니다.

나의 경험 : 마을이 조금 더 크거나, 주위 인프라가 좀 있었다면 여긴 만점이다. 작은 마을이라 너무 아까울 정도다. 샴푸 린스 등 어메니티 너무 잘 되어있고, 방도 크고 침대도 침구도 호텔처럼 푹신푹신하고 쾌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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