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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의 절반, 하프 포인트를 지났습니다

2023년 9월 22일 순례길 18일차,레디고스에서 베르치아노델레알카미노

by 몽키거
2023년 9월 22일 Camino de Santiago Day 18
Ledigos - Bercianos del Real Camino : 25.91 km
출발 06:35 / 도착 13:50, 총 7시간 15분 걸림


오늘은 날씨도 좋고 높낮이 없는 편했던 길이지만 이놈의 새끼발가락은 너무 아파서 걷는 내내 발바닥 전체에 힘이 바짝 들어가고 불타는 느낌이다. 확실히 발가락이 낫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라 걷는 내내 걱정이 되었지만 별수 없지 뭐. 오늘은 나름 기념비적인 산티아고의 절반 지점, 하프 포인트를 지나는 날이니 힘을 내어 걸었다.


요즘에 힙한 왁스 세요
이탈리안 마테오가 만들어주는 왁스 쎄요


1시간 반정도를 걸어가다 길가에 작은 부스를 열고 왁스 세요를 만들어주는 마테오를 만났다. 그냥 지나칠뻔했는데 예리한 눈매를 가진 J 씨가 알아봐서 기대했던 왁스 세요를 받을 수 있었다. 세요는 숙소나 식당, 기념품 샵등에서 순례자들이 여권에 찍어 모으는 도장을 말하는데 요즘에는 일반 스탬프를 찍어주는 도장 말고도 왁스를 녹여 옛날 느낌의 인장을 찍어주는 게 유행인 것 같다. 블로그의 산티아고 후기에서 많이 눈에 띄어 내가 산티아고 계획을 세우면서 꼭 하고 싶었던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고, 이곳 말고도 여기저기 루트와 시간에 따라 다른 분들이 서너 곳에서 하는 것 같았다.


산티아고 순례와 관련된 다양한 왁스 모양들


지금 내 다이어리와 여권에 다양한 색깔을 조합해 멋진 인장을 찍어주는 마테오가 이탈리아 사람이라서 짧지만 이탈리라아어로 대화도 나누고 재밌었다. 정말 많은 선택지 중에서 나는 여자 순례자와 조개, 화살표 모양을 골랐다. 내가 너 한국인 사이에서 조금 유명하다고, 블로그에서 미리 보고 오는 거라고 하니까 엄청 쑥스러워한다. 마테오의 왁스는 산티아고를 상징하는 다양한 모양으로 준비가 돼있어 고르는 재미도 있고, 예쁜 색들을 조합해 도장을 찍어주는 센스 있는 마테오의 감각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다. 기대했던 만큼이나 예쁜 결과물에 일행 모두 만족하며 마테오에게 도네이션으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바로 옆에 있는 바에서 또르띠아와 카페 콘 레체로 아침을 먹고 나니 해가 떴다.


아침에 정석 또르띠아와 카페 콘 레체


Half way point of the Camino
어서 오세요, 이제 절반 오신겁니다!


든든하게 아침도 먹은 김에 열심히 걸어 도착한 산티아고의 중간 포인트 지점은 생각보다 더 멋있었다. 18일 차에 절반을 걸어왔다니 처음에는 이게 가능한 걸까? 싶었던, 끝이 없을 것 같이 길어 보이던 길도 줄어들긴 하는구나 싶다. 같이 걷는 친구들이 있기에 이 포즈 저 포즈도 해가며 서로 사진과 영상도 찍어줄 수 있어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겼다. 정말 동행이 있다는 건 든든하다.

절반지점에 오면 뭔가를 느낄 것도 같았는데 신기하게도 '와! 내가 절반이나 해냈어!' 이런 짜릿함이 없는 건 왜일까? 걷다 보면 우리는 매일매일을 걸어야 하는 순례자고 완전히 끝내기 전에는 내가 어디쯤 왔냐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님을 깨닫는다. 아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을 하고 대성당을 봐야지만 나의 긴 여정이 끝났구나 실감이 날 것 같았다. 그냥 오늘도 정해진 길을 잘 끝내야지 하는 덤덤함이 더 큰 나를 보며 그새 많이 무던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엄청 감성이 풍부한 편인데 길을 걸으며 조금은 전보다 차분해져 감을 느낀다. 흥분과 기대로 가득 차 부풀었던 마음속 공간들이 오늘 하루와 지금의 나에게 집중하려는 노력으로 채워져가고 있다. 순례길 초반에 앞서가던 마음들도 붙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지금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 있어서 감사한 것들에 만족하고 행복하려고 신경을 쓴다. 길 위에서 시작할 때와는 조금이라도 달라진 나은 버전의 내가 되어가고 있길 바랄 뿐이다.


사하군 히에로의 갈레타를 아시나요?
천국에서 나는 향 같았던 갈레타


하프웨이 포인트를 지나 사하군에 들어와서 증명서를 받으러 가는 길에 갑자기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났다. 빵인지 과자인지 버터 가득한 냄새가 길거리를 가득 채우는데 정말 만화에서 보듯이 냄새에 이끌려 킁킁거리며 어디인지 찾아갔다.


Galleta Sahagun de Hierro


아주 작은 가게 안에서 두 아주머니가 과자를 굽고 계셨고, 유럽 같지 않게 시식을 하게 해 주셔서 그 인심에, 그 맛에 반해 한 봉지를 사들고 나왔다. 2유로에 10개 정도 든 과자를 사들고 너무 행복했다. 내가 좋아하는 홍콩 에그롤 맛에 식감은 단단한 버터와플인 게 딱 내 스타일이다. 아껴뒀다가 내일 걸을 때 당 떨어지면 먹어야지! 과자가 안 부서지게 배낭의 제일 위, 머릿 쪽 수납포켓에 잘 넣어본다. 이런 작은 일들이 나중에는 큰 추억이 되겠지? 냄새 따라 들어간 우리 일행과 함께 소소한 기억거리 하나가 더 추가된 것 같아 웃음이 났다.


음... 이게 증명서라면 나는 안 받을래
종이 위애 올려진 펜으로 그냥 쓱쓱 이름을 써준다


Santuario de la Virgin Peregrina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의 중간지점까지 걸었다는 증명서를 받으러 언덕길을 올라갔다. 헌데 나한테는 이게 시간낭비가 아니었나 싶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첫 번째는 종이재질이 바뀌어서 옛날 엔틱느낌의 얼룩한 바탕무늬가 그냥 백지로 바뀌었다. 두 번째는 원래 옛날 펜글씨 폰트로 예쁘게 이름을 프린트 해주던 게 이젠 안내소에 앉아있는 여자분이 그냥 볼펜으로 대강 이름을 써주는 걸로 바뀐 게 너무 별로였다. 내 앞의 다른 순례자들이 받아가는 걸 지켜봤는데 대학생 글씨체 같은 아주머니의 손글씨에 나는 받는 걸 포기했다. 무료로 해주는 것도 아니고 몇 유로를 받고 받아가는 증명서인데 미리 프린트된 쌓여있는 종이 한 장에 볼펜으로 써주는 글이라... 그냥 산티아고 완주 후에 제대로 된 증명서로 충분할 것 같았다. 무언가 산티아고 순례길과 관련된 이런 시설들이 더 좋은 쪽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는데 살짝 퇴보한 것 같아서 아쉬웠다.


아시는 분이 몇일 전에 받은 증명서. 볼펜으로 쓴 이름과 날짜가 영 걸린다


오늘 날씨는 적당히 맑고 구름도 적당해 너무 쨍하지 않은 해 밑에서 걷기 참 수월했다. 그래도 발가락이 너무 아파서 오른쪽 발은 긴장을 백배하고 걸었다. 알베르게에 와서 보니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았고, 바늘로 실을 한번 더 통과시켜 보았는데도 물이 안 나와서 이제 나으려나 싶었는데 저녁이 되니 다시 물이 찼다. 어휴 2일만 더 걸으면 언니를 레온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니 곧 나의 완벽한 비상약세트가 오니 조금만 더 버텨보자 싶다. 26 km 한번, 19 km 한 번만 더 걸으면 언니가 온다! 내일은 좀 덜 아프길, 쌩쌩하기만 한 왼발에 비해 너무 고생하고 있는 오른발이 조금만 더 힘내주길 바라본다.


산티아고 순례길 1위 음식

오늘의 알베르게 Bercianos 1900에서는 4인실을 선택해서 같이 쓰는 분들이 여자분들이길 바랐는데 어쩌다 보니 남자 둘과 쓰게 되어 마음이 그리 편하진 않다. 이게 다 오픈된 더 많은 인원들이 쓰는 곳이 아닌 4인만 쓰는 프라이빗한 방이라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바로 옆 큰 방이 라운지처럼 쉴 수 있는 공간도 있고, 테이블도 많아서 거기서 일기도 쓰고, 통화도하고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1층에는 4인실인 내가 머무는 방 하나라 이 라운지를 독점하고 쓰는 것 같아 좋은 점도 있었다


여기 음식은 고메 수준이다


오늘의 숙소는 레스토랑이 정말 멋졌는데 약간 인더스트리얼 느낌의 힙한 바 느낌으로 인테리어가 돼있었다. 멋진 가죽 소파도 있고, 하이체어도 있고, 사람들이 이곳저곳 둥지를 틀고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며 편한 시간을 보내는 분위기다. 우리는 메뉴 델 디아를 먹었는데 선택지도 많았고, 무엇보다 음식이 정말 정말 맛있었다. 먹은 게 너무 맛있어서 저녁에 같은 메뉴를 한번 더 사 먹었을 정도. 이곳을 산티아고 음식 1위로 정하기로 했다! 두 번째로 맛있었던 곳은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자다에서 먹은 코스메뉴였고, 여기서 먹은 병아리콩 쵸리조 스프, 소고기 구이, 디저트 케이크가 1위! 같이 먹는 동생과 각자 다른 메뉴를 시켜 나눠먹기로 했는데 멜론 프로슈토와 미트볼까지 모든 게 맛있었다. 순례길 걸음 뒤에 좋은 음식은 마음의 피로까지 녹여주는 큰 위안이 됨을 다시 느낀다. 잘 먹었으니 또 잘 쉬고, 내일 또 잘 걷자!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22일 베르치아노 데 레알 카미노의 Bercianos 1900

가격: 4인실, 22유로 (3만 천 원)

구글평점 4.2 내 평점 4.2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없음

담요/이불 유무 : 없음

위치 : 마을 초입, 마을 자체도 작아서 큰 차이 없다.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아마도요

나의 경험 : 레스토랑이 분위기도 좋고 맛있어서 너무 좋았던 곳. 바로 뒤 알베르게에 머문 동생들도 점심 저녁을 모두 이곳에 와서 같이 먹었다. 지나가는 길이라도 들려서 음식은 먹고 갈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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