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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리하스, 순례길 중 가장 완벽했던 아침식사

2023년 9월 23일 순례길 19일 차, 베르치아노에서 만실라

by 몽키거
2023년 9월 23일 Camino de Santiago Day 19
Bercianos del Real Camino - Mansilla de Las Mulas : 26.17 km
출발 06:30 / 도착 12:40, 총 6시간 10분 걸림


또리하스(Torrijas), 너 내 거 하자
나 떨려... 또리하스 처음 먹어봐


오늘 La costa del Adobe라는 식당에서 순례길 19일 중 가장 완벽했던 아침 식사를 해서 너무 행복했다! 진짜 마드리에서나 바르셀로나 갈 때 늘 먹어야지 계획했는데도 은근히 만나기가 힘들었던 스페인식 프렌치토스트 또리하스(Torrijas)를 먹었는데 대박. 이거 너무 맛있잖아! 겉은 꼭 크렘뷜레의 윗부분처럼 바삭한데 속은 크리미하다고 느낄 정도로 부드러워서 아침을 먹으며 계속 "어머 어머"를 외쳤다. 시나몬향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게 정말 잘 어울려서 하나 더 먹을까 하다가 이미 시킨 다른 음식들 때문에 겨우 참고 나왔다는 사실. 이 가게는 정말 장사 잘되는 곳인가 싶은 게 모든 메뉴들이 한가득씩 매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게 그만큼 금방, 많이 팔리는 것 같았다. 산티아고 순례길 내내 본 적 없었던 또르띠아에 살사를 얹은 메뉴도 있어서 하나 시켰고, 애플파이에 코르타도 커피까지 너무너무 즐거웠잖아.

레스토랑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산장처럼 포근한 느낌에 주인아주머니가 "우와~" 소리를 내며 음식을 보고 감탄하는 우리를 친절하고 즐겁게 대해주셔서 더 기분 좋았다. 왜 사람마다 유난히 정이가고 마음에 드는 장소가 다 다르듯이 음식 데코 돼있는 스타일이나 높이, 조명, 널찍한 간격의 테이블과 분위기등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게 내 타입이었다. 순례길에 있는 흔한 타입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개성 있는 카페 타입이라 몽환적인 느낌까지 들었지 뭐야. 내가 어디 이태원 분위기 좋은 맛집에 와서 요즘 힙하다는 음식들 시켜놓고 친구랑 수다 떠는 기분이 나서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였다. 그만큼 행복했다. 이런 재미난 곳을 알아봐서 간 것도 아니고 지나다가 아침 먹을까? 해서 우연찮게 들어간 거니 산티아고 순례길 참 재밌어 진짜. 여긴 반드시 다시 돌아와야겠다!


오늘은 발가락 상태가 괜찮아져서 걷기가 수월하다. 정말 다행이다. 요 며칠 오른쪽 발등이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조금 조이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지만 발가락 안 아픈 게 어디야. 게다가 하루 종일 찻길을 따라 뻗어있는 직선길만 걸어서 난이도도 최하라 몸도 마음도 편하게 수다 떨며 잘 걸어왔다.


나무 위의 신발


한참을 걷는데 H 양이 저 나무에 걸려있는 신발을 보라고 하길래 응? 했는데 정말 커다란 나무에 신발 한 켤레가 가지런히 걸려있는 게 아닌가! 뭐지? 요즘은 하도 스트릿아트도 많으니까 무슨 설치 작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신발이 깨끗하고 새것 같다. 같이 걷던 사람이 불평을 하니 친구가 "너 그러거면 그냥 걷지 마!" 하고 신발을 뺏어 던져버린 걸까, 아니면 필요가 없어서 누군가 저 멀리 날려버린 게 걸린 걸까 등의 나름의 이론을 펼쳐본다. 산티아고, 참 별의 별게 다 있는 길이군 그래.


반주에 취하다

오늘은 이상하게 화장실이 자주 가고 싶었던 날이라 정말 가능한 물을 안 마시며 걸으려고 노력했다. 종착지인 만실라에 먼저 도착한 J 씨와 레스토랑에서 바로 점심을 같이 하기로 했기에 가방을 그대로 멘 채 오늘의 숙소가 아닌 레스토랑 Casa Tono로 바로 갔다. 너무나 더워서 일단 시원한 띤또 데 베라노를 한잔씩 시켜 벌컥벌컥 마시니 빈 속에 취기가 확 올라오는 게 알딸딸하니 기분이 좋았다. 나와 같이 걸은 H 양도 상황이 비슷한지라 둘이 같은 정도로 취해서 많이 웃었다.


계란에 치즈, 빵. 나중에는 감자까지 마구 주신 아주머니


J 씨가 미리 골라둔 레스토랑은 늘 믿고 따라가는 편인데 오늘도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우리가 점심 메뉴가 제공되는 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한 거라 음료부터 시키고 앉아있었던 건데 아주머니가 같이 먹으라고 삶은 계란으로 만든 매콤 새콤한 달걀요리에 빵에 감자요리까지 주셔서 감사하게 먹었다. 이렇게 스페인의 시골을 걷다 보면 인심이 좋으신 분들도 만나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오늘의 만찬


시간이 돼서 음식 테이블이 차려진 방으로 들어가 주문을 하고 얼마 있자니 전 좌석이 지역 사람들도 꽉 찼다. 여기가 정말 유명한 곳이구나 한눈에 보이는 게 일찍 안 왔으면 밖에서 한참을 기다릴 뻔했다. 역시나 J 씨의 검색력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든든해 정말!

오늘 첫 코스로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먹었고, 두 번째 코스로는 연어구이와 샐러드를 선택했다. 이 외에도 선택지가 정말 많고 다양해서 나중에 같이 조인한 메구미와 다른 동행들 모두가 각기 다른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식사를 했다. 근데 디저트가 또 지금까지 세트 메뉴에 나온 것들 중의 탑을 갱신했다는 거 아니야. 치즈케이크, 플란, 커피케이크 등 선택지가 많았는데 하나씩 시켜본 게 모두 홈메이드에 크기도 크고 필라델피아 치즈 가득 들어간 듯한 부드러운 푸딩과 케이크 중간의 느낌으로 정말 맛있었다. 게다가 보통의 점심 메뉴에 같이 제공하는 와인은 레드 아니면 화이트인데 여긴 로제도 선택할 수 있어서 오래간만에 로제 와인을 곁들여 먹은 식사는 더 즐거웠다. 뭐야 뭐야 산티아고 길 위에는 왜 이리 맛있는 집들이 많은 거야! 서프라이즈로 작은 행복을 느끼며 다니는 이 길 위에서의 경험들이 참 좋다.


모든 개인실이 이 가격에 이 정도 시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의 숙소 La Pensione de Blanca의 개인실은 30유로다. 개인 화장실까지 방안에 있는 호텔 형태인데 30유로인 건 정말 괜찮은 가격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공간도 가방도 내려놓고, 내 짐들을 풀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했다. 가장 좋았던 건 들어가자마자 살짝 나는 왁스 냄새라고 할까, 무언가 소독을 제대로 한듯한 우리 엄마가 막 집 청소한 냄새가 나서 '아, 손님들 오기 전에 다 깨끗이 쓸고 닦고 하시는구나'를 느낄 수 있어 안심이 되었다.

며칠 전 같은 30유로에 고시원 같은 방에서 우울했던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의 호스텔을 떠올리니 이거 너무 비교가 된다. 이 숙소는 전실이 개인실이기에 도미토리의 왁자지껄한 소음도 없고 참 조용해서 좋았다. 산티아고의 모든 호스텔이 30유로고, 이 정도의 적당한 시설과 공간을 제공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 생각을 해본다. 60유로도 주고 머물러봤고, 앞으로 걷는 길에는 70유로에 예약한 숙소도 있는데 나는 오늘 딱 이 정도 가격에 이 정도 시설이 면 정말 좋겠다 하며 쓸데없지만 아쉬운 소망을 가져본다. 그만큼 가심비가 너무 좋아 맘에 들었다는 말이다. 여기 꼭 묵으세요!


내일 우리 언니 온다!

내일은 드디어 우리 언니가 스페인에 오는 날이다. 언니가 온다는 사실은 내 순례길의 3분의 2가 이미 지났음을 의미한다. 내일이 산티아고 순례길 20일 차라니! 첫 3일 정도를 걷고는 '이걸 대체 몇 번을 반복해서 걸어야 언니가 온다는 거지? 그날이 오기나 할까?' 하며 그저 멀게 느껴지고 막막했는데 그날이 너무 빨리 왔다. 실감이 안 날 정도로 내가 산티아고에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니 뭔가 기분이 묘하다.

살면서 난생처음으로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하기 싫다, 좋다 등의 감정 낭비 없이 지금에 집중하고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경험을 하고 있다. 일어나는 것도 쉽고, 슉슉 준비해서 나감에 한 끗의 주저함이나 의문 없이 그냥 하는 거. 이 기분이 그동안 한 번도 못 느껴본 완벽한 수긍과 집중의 상태인데 너무 재밌고 행복하다. 왜 큰 대회를 앞두고 몸풀기를 하고 있는 김연아 선수에게 "지금 무슨 생각해요?" 하고 물으니 김연아 선수가 “뭘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고 했던 그 장면이 생각난다. 내가 지금 하는 일에 한 점의 의문 없이 그냥 하는 게 참 좋다. 세상에 걱정거리 하나 없이 내 마음이 어지럽지 않고 지금 난 스페인에서 자유 그 자체다. 이게 너무 좋은데 과연 집에 돌아가서는 어떤 느낌일지가 오히려 그게 궁금해지네... 어쨌든 시간 정말 빨리 간다. 언니가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마지막 3일 정도는 가까워지는 게 아쉬워서 걸음도 더 느려졌다는데 나도 그러려나? 이제 며칠 뒤면 나도 알게 될 테니 기다려보자.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23일 만실라 데 라스 물라스의 La Pensione de Blancas

가격: 개인실, 30유로 (4만 3천 원)

구글평점 4.3 내 평점 4.4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있음

담요/이불 유무 : 있음

위치 : 마을 가운데, 작은 디아 마켓이 걸어서 5분 정도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네

나의 경험 : 개인실치고 가격도 저렴, 청소 깔끔하게 되어있고 크기도 적당. 모든 산티아고의 개인실이 30유로에 이 정도라면 딱 좋겠다 싶을 정도로 가성비, 가심비 좋았던 곳. 도미토리 없이 모든 룸이 다 개인실이라 조용해서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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