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4일 순례길 20일차, 만실라 데 라스 물라스에서 레온
2023년 9월 24일 Camino de Santiago Day 20
Mansilla de Las Mulas - Leon : 18.56 km
출발 06:20 / 도착 10:50, 총 4시간 30분 걸림
오늘은 레온에서 우리 언니 만나는 날
아침 6시 20분에 숙소를 떠났다. 오늘은 걷는 중간중간 카페도 적당히 배치되어 있고(카미노 닌자 앱으로 확인 가능), 총거리도 20 km 미만으로 짧아 부담이 덜한 날이다. 게다가 산티아고 순례길 중에서 두 손가락에 안에 꼽히는 대도시 레온으로 가는 날! 오래간만에 문명과 사람들의 북적거림을 느낄 수 있는 대도시로 들어가는 것도 설레는데 친언니가 레온에서 만나는 날이라 벌써 걸음이 빨라진다.
9년 전 2014년에 이미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언니는 지금 내가 이 길을 걷게 된 가장 큰 동기를 제공한 사람이고 9년 내내 산티아고를 걸으라고 잔소리를 해온 장본인이다. 인생에서 잊지 못할 경험이고 정말 설명할 수 없는 행복한 감정들을 많이 담아 올 것이라고 "가라! 가라!" 엄청 불을 짚였고 나는 지금 그 길을 걸으며 언니가 해왔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실은 내년인 2024년에 만으로 마흔이 되는 걸 기념해서 길을 걷고 싶었는데 언니가 자신이 휴가를 싹 몰아서 2주 정도를 받아 둘 테니 열흘 정도나마 같이 걷자고 설득을 해 6월에 급하게 계획을 짜고 9월인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거다. 언니는 오랜만에 순례길을 다시 걸을 생각에 너무나 신난다고 하니 그런 언니를 보며 나도 덩달아 즐겁다. 무엇보다 내가 외국에서 승무원생활을 하기 시작한 2012년부터 지금까지 약 11년간 언니와 멀리 떨어져 지냈고, 길어야 1년에 겨우 한 달 좀 넘게 집에 머물고 언니는 일을 하니까 정말 주말에 얼굴 보는게 다였다. 이번에는 레온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11일간의 여정을 같이하고 런던에서 일주일을 함께 하기로 했으니 와~ 지난 11년간 우리가 이리 24시간 내내 오래 붙어있게 된 건 또 처음이다. 이래저래 의미가 많은 산티아고길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은 길도 아주 편해 4시간 40분 만에 레온에 도착했다. 아침 10시 50분에 이미 레온 대성당 앞에 있었으니 대체 얼마나 빨리 걸은 건지. 워낙에 큰 대도시라 시에 들어와서도 한 30분 정도는 더 걸어야 센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당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고, 가우디의 초기 건축물 중에 하나인 보티네스 저택도 보고, 언니를 위해서 여행자 사무실에 들러 크레덴셜도 받아놨다. 그리고 스페인의 초콜릿 브랜드로 유명한 발로르(Valor)에서 만든 카페에 들러 추로스를 먹으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가져본다.
그러고 보니 순례길 중 처음으로 먹는 추로스다. 의외로 스페인이라고 모든 곳에서 추로스를 팔진 않아서 이렇게 20일을 걷고 대도시 레온에 도착해서 맛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정말 유명한 마드리드의 산히네스 추로스보다 여기 레온의 발로르에서 먹는 추로스가 훨씬 맛있었다. 찍어먹는 초콜릿도 마드리드와 다르게 여러 가지를 제공해서 이것저것 찍어 맛보는 것도 재밌었고 개인적으로 연유맛이 나는 하얀 소스가 정말 맛있어서 만족스럽다. 이따가 언니가 도착하면 언니 데리고 다시 와야지 싶다. 같이 걸은 H 양과 J 씨와 오랜만에 정말 맛있는 아이스커피까지 시켜서 추로스 한 접시를 끝내고는 조금 뒤에 언니가 기차역에 도착하면 다 같이 점심을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나저나 여기 발로르 카페에서 추로스와 아이스아메리카노 조합 정말 추천! 약간 산도 있는 진한 커피를 아이스커피로 해서 마시니 정말 깔끔했다. 맛있는 곳은 널리 알려야 해!
언니, 내 동지들을 소개해줄게
숙소에 가방을 두고 짐을 풀기도 전에 어느새 언니가 도착할 시간이다. 기차역에 거진 도착해서 언니가 도착한 모습을 비디오에 담으려 카메라를 켜고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언니도 나와 같이 카메라를 켜고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둘이 생각하는게 똑같다는게 웃겨 빵 터져 계속 웃었다. 집에서 인천공항으로, 인천에서 아부다비로, 환승시간 보내고 아부다비에서 마드리드로, 마드리드에서 기차 타고 레온으로 먼 길을 온 언니. 너무 반갑고 내 군대가 생긴 것처럼 든든해졌다. 가방만 숙소에 내려둔 다음에 같이 걷는 동생들이 골라둔 일식 레스토랑 Udon에서 다 같이 모여 점심을 먹었다. 언니가 그동안 나와 함께 걸은 사람들에게 좋은 식사 한 번은 꼭 사주고 싶다고 해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언니도 J 씨, H 양과 식사 자리를 통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내가 좋은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추억들을 만들며 걸었음에 감사하다고 했다.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산티아고에서 누군가를 만나 같이 걸어야지!' 이런 마음가짐으로 오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한, 나 혼자만의 모험이지만 걷다보면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내가 고마워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내게 신세를 지는 사람, 내가 신세를 진 사람 등 많은 관계가 형성된다. 다행히 나는 운이 좋아서 선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20일이 지난 지금 오며 가며 매일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 보이면 궁금해지는 동갑내기 친구 일본인 메구미와 착하고 재밌는 두 동생 J 씨와 H 양이 20일이 지난 지금 레온에서도 친구와 동행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한다. 무엇보다도 나를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우리 언니가
"직접 보니 들은 것보다 친구들이 더 선하고 좋아 보인다. 함께해서 참 고맙네."
하고 이야기해 주니 뭔가 더 뿌듯하다. 언니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구나, 나 참 좋은 사람들 만나서 행복하게 잘 걸었네! 이런 확인이랄까.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 너 자라.
내일부터 9년 만에 다시 순례자로 돌아갈 때다
식사 이후 언니와 둘이 레온을 둘러보았다. 같이 레온 대성당도 들어가고, 언니가 사고 싶었던 조개모양의 패치도 사고 한가한 오후를 보냈다. 그리고 아까 너무 맛있어서 언니랑 다시 가야지 했던 발로르 카페에 들러 추로스를 또 먹었다. 언니도 맛있다고 인정! 생각보다 레온의 센터는 기념품샵 몇 개 외에는 레스토랑으로 가득 차있어서 둘러보기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언니는 9시 정도에 잠이 들어버렸다. 나도 뭐 한 거 없는 하루 같았는데도 저녁 10시가 다 되어서야 샤워를 했으니 은근히 바쁘긴 했나 보다.
언뜻 창 밖을 보니 레온 성당에 불이 들어온 모습이 보였다. 그 주황 불빛이 너무 예뻐서 후다닥 혼자 보러 내려갔다. 야경 중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국회의사당의 모습을 가장 좋아하는데 레온 대성당도 그 "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더 좋았던 건 부다페스트의 의사당은 강을 건너 보는데 이 레온 대성당은 바로 땅 위에 있어 나와 연결된 있다는 것, 앞으로 걸어가 이 예쁜 빛에 쌓인 거대한 성당을 손으로 만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더 신비로웠다. 언니가 피로하지만 않았다면 깨워서 내려와 같이 있고 싶었다. 이걸 같이 못보다니 너무 아쉽지만 만 하루 반을 이동한 언니가 좋은 컨디션으로 도착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싶어 내버려뒀다. 언니는 2019년에 우리가 부다페스트에서 밤에 의사당을 보며 토카이 한 잔에 살라미와 치즈를 먹었던 기억을 참 좋아한다. 지금 이 레온 대성당의 야경을 함께 보며 커피라도 한잔 한다면 우리가 가진 야경에 관련된 추억 하나를 더 만들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내일 새벽에 우리가 출발할 때 레온 대성당의 불빛이 이대로 켜져 있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다. 그렇게 된다면 언니랑 5분 정도는 가만히 그 앞에 앉아 지금 내가느끼는 이 대성당의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다. 제발 그럴 수 있길 바란다.
방에 돌아오니 언니는 정말 깊이 잠들어있었다. 내가 가방을 싸느라 부스럭거려도 모르는 것 같다. 그래 잘 수 있을 때 자둬라, 내일부터 엄청 걷기 시작해야 하니까. 내가 지난 20일을 걸으며
"너 9년 만에 이렇게 긴 시간, 긴 거리 걷는 거 안 쉬울 것 같은데?" 라며 곧 걸을 언니 걱정을 많이 했는데. 언니는 되려
"야, 회사에서 왜 경력직을 뽑는지 보여줄게. 나 산티아고 이미 다 걸은 사람이야!" 하고 자신만만해왔다.
그래, 내일 너 얼마나 잘 걷는지 보자! 일단 잘 도착해서 너무 다행이야. 레온에서의 하루는 천군만마를 얻은 뿌듯함과 그 천군만마가 야경도 못 보고 일찍 잠이 든 밤으로 기억될 것 같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24일 레온의 Principia Suites
가격: 개인실, 58.5유로 (8만 4천원)
구글평점 4.3 내 평점 4.4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있음
담요/이불 유무 : 있음
위치 : 레온 대성당에서 1분 거리. 초 가운데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 네
나의 경험 : 스위트 룸같이 방도 진짜 넓고, 부엌, 전자레인지, 냉장고, 식기 모든게 갖춰진 곳. 무엇보다 레온성당이 걸어서 1분이고 창문으로 성당의 꼭대기가 보인다. 시설도 모던하고 새것 같아서 다시와도 여기 머물고 싶다. 단지 비대면으로 북킹닷컴 대화나 왓츠앱으로 현관과 방의 비밀번호를 알려주는식의 체크인이 진행돼서 어른분들은 조금 곤란하실 것에 대비하시길. 한 한국인 중년 커플분들도 같은 곳에 묵으셨는데 인터넷이 안되셔서 아예 못 들어오고 계셨다. 영어를 쓰기 때문에 내가 대신 내 왓츠앱으로 그분 체크인을 도와드렸다. 일반 호텔보다 나는 이곳 시설이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