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5일 순례길 21일 차, 레온에서 산 마르틴 델 카미노
2023년 9월 25일 Camino de Santiago Day 21
Leon - San Martin del Camino : 24.5 km
출발 06:15 / 도착 11:55 , 총 5시간 40분 걸림
이렇게 지루한 길 처음이야
오늘은 언니와 처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날이다. 지난 20일 동안 산티아고를 걸으며 쌓은 나의 걷기 내공을 보여주리라 생각했지만 정말 지긋지긋하게 지루한 길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1시간 정도 시티를 빠져나와야 했고, 몇 시간이 지나도 끝이 없는 고속도로 옆의 자갈길을 따라 걸었다. 오늘은 보통 12시나 되어야 뜨거워지던 해도 아침 10시부터 내리쬐는게 다 걷고 나서도 한동안 얼굴이 화끈할 정도였다. 스페인의 날씨는 정말 종잡을 수가 없다.
길이 너무 재미가 없어서 오늘이 두 번째 산티아고의 첫날인 언니에게 이유 없이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어라? 내가 지금까지 걸은 길들이 이리 지루하진 않았는데 좀 그렇네...'
아무래도 오래간만에 동생과 산티아고 좀 걷자고 먼 길을 건너온 언니가 신경이 쓰이긴 하나보다. 이왕이면 숲도 있고, 좋은 카페들도 있고 짠~하며 내가 보여줄 부분이 있어 우리 언니가 즐거웠으면 했는데 길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오늘 정말 지치게 걸어왔다.
게다가 아니 왜 이렇게 길 위에 사람이 많지? 평소에 한참 앞이나 한 참 뒤에 한두 명만 겨우 있었던 순례길인데 오늘은 적어도 앞 뒤로 열댓 명씩 우루루떼로 걷는 느낌이다. 레온이 거점이 되는 큰 도시라 사람들이 늘어날 수도 있겠지만 이러다가 사리아에 도착해서는 나란히 줄을 서서 걷는거 아닌지 모르겠다. 특히나 오늘은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다. 어째 순례자, 순례길 분위기가 하루만에 휙 바뀐 듯한 이상한 날이다.
마지막 1시간은 정말 일직선 길에서 저 멀리 삐쭉한 건물하나가 보이는데 당최 거리가 좁혀지질 않았다. 걸어도 걸어도 저 건물은 그대로 멀리 있는 것 같아 나중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에이~ 보지 말자' 하고 걸어올 정도로 오늘 너무너무 재미가 없었고 모든 길이 멀게 느껴졌다. 다행히 언니는 9년 만에 이곳에 돌아와 오늘 처음 걸은거 치고는 매우 잘 걸었다. 아직 여독도 안풀렸을 텐데 중간에 퍼지지 않고 야무지게 잘 걷는 걸 보는데 그게 뭐라고 내가 다 뿌듯하다.
그래, 오늘은 조금 재미없던 길이었지만 앞으로 더 나아지지 않겠어? 오늘 우리 잘 걸었다!
2014년과 2023년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다를 수밖에
오늘의 점심은 나와 언니가 지내는 숙소 La Huella에 동기들이 모여 모두 함께했다. 맛집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J 씨조차 "여긴 아무것도 없는대요?"하고 포기한 동네가 이곳 산 마르틴 델 카미노다. 언니와 나, J씨와 H 양 그리고 메구미까지 5명이 함께해 서로 인사도 나누며 재밌는 식사를 했다. 15유로의 메뉴 델 디아로 코스 요리를 먹는데 언니는 가격에 놀란다. 9년이 흘렀음을 감안하고 코로나 이후의 인플레이션도 생각했을 때 그리 놀라울 정도의 가격 상승은 아닐 텐데 언니의 산티아고에 대한 기억은 9년 전에 머물러있으니 모든게 다 새롭고 신기하다고 한다.
"와~ 요즘은 한 끼 식사가 보통 2만 원이야? 한 끼만 먹는다고 해도 다른 물이나 간식 사 먹으면 30일 걸어도 식비만 돈 백만 원이네."
9년 전에는 비행기표를 제외한 숙소와 식비를 다 합쳐도 백만 원이었다고 하는데 세상이 무섭게도 빠른 속도로 비싸게 변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언니가 만들었던 추억은 공립 알베르게에서 묵으며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어울려 만들어먹던 파스타, 샌드위치등 아날로그의 소박한 기억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나만 봐도 편의를 위해 31일 간 예약한 숙소 가격만이 200만 원을 넘고, 식비도 얼추 150만 원에 기념품들 사기, 무거운 물건들 동키로 미리 보내기를 하며 비행기값, 기차 값까지 치면 500만 원은 그냥 쓴 것 같다. 언니는 걸으며 먹을 샌드위치도 전날에 미리 준비해서 가지고 다녔다고 하는데 지금 나와 내 동행들은 걷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무언가를 사 먹는다. 점심도 언니는 요리를 했다면 우리는 근처 맛있다는 평점 좋은 레스토랑을 검색해 2만 원 남짓의 메뉴 델 디아 코스 음식을 먹는다. 세대가 바뀐 건지, 돈의 가치가 바뀐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산티아고의 스타일 자체가 바뀐 건지 이번이 처음인 우리에게는 이렇게 다니는게 너무나 당연하게 돼버렸다.
그나저나 세 가지의 코스가 나오는 메뉴 델 디아에 언니는 푹 빠졌다.
"와~ 음식을 첫 코스, 두 번째 코스, 디저트까지 고를 수 있고 양도 많고 맛있다야. 이 정도면 하루에 한 끼 제대로 먹고 나름 좋은데? 나 때는 이런 것도 있는지 몰랐어. 너무 좋다야."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오늘 하루 재미없던 길의 경험을 맛있는 코스 음식이 조금이라도 상쇄해 주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다행히 오늘 묵는 알베르게는 아주 새 건물에 모던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좋았다. 첫날이라 피곤했을 언니와 좋은 숙소에 묵어서 다행이다. 계단이나 복도, 식당 모두 널찍하고 참 깨끗한 데다 건물 곳곳에서 기분 좋은 향기가 나는게 주인분이 신경을 많이 쓰신게 느껴진다. 이 동네에서 또 머물게 된다면 고민 없이 다시 선택할 곳이다. 이제는 나 혼자만 묵는게 아니기에 은근히 내가 고른 숙소에 대해 우리 언니 감상이 어떨지가 궁금해진다. 그러고 보니 우리 언니는 남은 10일간의 일정을 계속 개인실에서 머물겠네. 언니가 하는 말이 예전에는 개인실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래 이 산티아고 촌사람아, 내가 9년 전과 다른 멋진 산티아고를 보여줄게! 잘 따라와라! 내일은 언니와 걷는 길이 오늘보다는 더 재밌는 길이길 바라본다.
오늘의 산티아고 숙소 리뷰
2023년 9월 25일 산 마르틴 델 까미노의 Albergue La Huella
가격: 개인실, 68유로 (9만 7천 원)
구글평점 4.6 내 평점 4.5
제일 중요한 수건 유무 : 있음
담요/이불 유무 : 있음
위치 : 마을 초입이지만 마을이랄게 없다.
다시 와도 여기 예약할 건가요? 이 마을에 머문다면 네
나의 경험 : 정말 주위에 아무것도 없어서 마을 자체는 스킵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가 없으나 숙소 자체는 모던하고 깨끗하다. 엄청 조용하고 1층 레스토랑에서 다양한 음식을 팔아서 좋았다. 뒷마당에 큰 수영장도 있고, 펜션에 놀러 온 느낌이랄까. 방도 군더더기 없이 아주 깔끔하고 베란다가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