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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타올 Dec 15. 2022

몹쓸 '이효리 병'... 양파밭을 사게 된 이유

삽질하면서 배운 땅 찾기 영업비밀

▲ 작은 산이 보이는 풍경에 반해서 땅을 샀다. 


'이효리 병'에 걸렸단 사실을 깨달은 건 땅 찾아 삼만리, 부동산 투어를 시작하면서였다. 도심과 가까운 시골에 집짓기 적당한 땅을 물색하며 생활정보지, 블로그, 온라인 카페를 탐독했다. 구글맵, 거리뷰의 전문가로 거듭났지만 2D의 한계는 분명했다. 운전을 기출문제집으로만 배운 것처럼 찜찜했다. 실전 경험이 필요했다.


하루는 작정하고 연차를 냈다. 사기충천하고 나선 길이지만 이번 생에 땅 쇼핑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동네의 어색한 공기에 발끝까지 잔뜩 주눅이 들었다. 읍내 부동산 주변에서 맥없이 서성였다. 평소에 땅 좀 만지는 부자 언니라도 알아 뒀더라면... 척박한 인간관계가 원망스러웠다.


서둘러 나오느라 생각 없이 주워 입은 스트라이프 티셔츠에 고무줄 바지라는 옷차림도 꼴사납게 거슬렸다. 금은보화 주렁주렁 사모님 스타일까지는 아니어도 반짝이는 물건 하나쯤 걸쳐야 했는데.


하기야 장신구라고는 큐빅도 안 박힌 18K 결혼반지뿐인데 그마저도 애 낳고 굵어진 손마디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애꿎은 손가락만 배배 꼬고 있는데 마침 문을 나서는 부동산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준비한 멘트를 뱉어낼 타이밍이다. 저, 저기, 땅 있나요? 

 


글로 배운 땅 찾기


드디어 대망의 부동산 인조가죽 소파에 엉덩이 붙이고 믹스커피 홀짝이며 상담을 시작했다. 단정한 나의 용모를 위, 아래로 스캔하던 사장님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땅은 사서 뭐 하시려고?' '집 지으려고요.' '그래요? 젊은 사람이 기특하네.'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기세가 올랐다. 땅 사는 온갖 요령을 글로 배워 섭렵한 상태였다. 갈고 닦은 이론을 바탕으로 땅땅거리는 부자 언니와 사모님에 빙의해 브리핑을 시작했다.


제가 찾는 땅은요. 첫째, 논‧밭 아닌 집을 바로 지을 수 있는 건축법상 대지여야 하고요. 둘째, 주변에 축사와 사격장 같은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가장 중요한 셋째는 마을과 가깝고도 떨어진 곳에, 외롭지 않으면서도 프라이빗한 사생활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주변에 다른 집들은 절대 없고 산과 나무를 조망하며 자연을 품안에 담을 정도의 소박한 땅을 찾고 있답니다. 아 참, 로컬 마트나 편의점이 도보 10분 거리에 있으면 더욱 좋겠고요. 찡긋.


"음. 마당도 넓고?"

"네!"


"마당에다가 콩도 심고, 강아지들도 막 여러 마리 키우고?"

"너무 좋죠."


"집 주변이 나무로 쫙 둘러싸여 있어서 아늑하고."

"어머나! 정확해요. 있을까요?"


"있지 그럼."

"정말요?"


"거기 효리네 집이 딱 그렇게 생겼더구만."

"네에?!"


"테레비에 나오는 제주도 이효리네 집. 제주도에 가야지 왜 여길 왔어요?"


땅을 파고 들어가서 두더지가 되고 싶었다. 이날 늘어놓은 '브리핑'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궤변이었냐면, 손석구와 박보검을 황금비율로 믹스한 훈남인데 나 아닌 다른 여자에겐 얼음처럼 차가운 순정파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입었지만 검소하며, 억대 연봉은 우습게 벌면서 집안일과 육아를 도맡아 하는 그런 평범한 남자 같은 땅 찾아요, 라는 기괴한 판타지였다.


그런 남자도, 땅도 없다. 물론 돈이 무척 많다면 찾을 수 있겠다. 땅은 (어쩌면 연애도) 자본주의 최전선에 있으니까.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


돈도 없고 이효리도 아닌 나는 부지런히 부동산 '도장 깨기'하는 비장한 심정으로 발품을 팔았다. 다행히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기상천외했던 땅 찾기 희망 사항은 그저 싸고 쓸 만한 땅 찾습니다 선에서 합의점을 찾았다.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던 한 가지는 바로 '전망'이었다. 지난했던 삶의 터전을 되새겨보니 대체로 동향 아파트에서 살았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남향 아파트는 빽빽하게 세우지만 동향으로는 자투리에 한두 채 짓는 게 보통이다. 덕분에 동향 아파트에는 의도치 않게 뻥 뚫린 풍경이 펼쳐지고, 취향을 저격당했다.


여태 전망, 풍경 운운하는 걸 보면 '이효리 병'은 완치되지 못한 상태였다. 눈에 차는 땅은 비쌌고 싼 땅은 성에 안 찼다. 그나마 보편적으로 괜찮은 땅도 선뜻 동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3년이 흘렀다. 버는 돈은 변함이 없는데 땅값은 해가 다르게 올랐다. 땅이고 집짓기고 포기해야 하나 싶었던 그즈음이었다.


여지없이 분수에 딱 맞는 별로인 땅을 보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사업 수완 뛰어난 부동산 사장님은 근처에 대규모 주택단지를 조성하는데 한 번 들러 보자고 제안했다. 먹고 죽어도 전망 좋은 땅을 고집했기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단지는 쇼핑 목록에서 진즉 제외했다. 자꾸 권하는 사장님의 호의에 마지못해 개발 예정이라는 넓은 밭을 둘러보는데, 이럴 수가. 내가 찾던 곳이 바로 여기라는 느낌적인 느낌이 바로 이 느낌인 것이다. 

 

▲ 내 맘을 빼앗았던 작은 산이 보이는 풍경이다.


느낌에 올인


일찍이 집짓기에 나선 온라인 선배들은 입을 모아 '느낌이 오는 땅을 사라'조언을 건넸다. 의대도 아닌 인문대를 6년씩이나 다니며 배울 만큼 배운 지성인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니, 차라리 손바닥에 땅 지 자 쓰고 영험한 기운을 받으면 신령님이 점지한 땅이 뿅 나타날 것이니라 하시죠. 임금 왕을 새긴다면 '나라님'이라도 될 수 있겠네요? 얼씨구 코웃음 쳤다. 그런데 정말이었다.


땅 가운데 자리 잡은 나지막한 작은 산이 선사하는 '느낌' 하나로 주변의 축사와 예비군 훈련장, 비합리적인 가격까지 모든 게 용서됐다. 생각해보니 수십 곳의 땅을 보고도 망설였던 건 완벽한 땅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탓이었다.


아파트와 달리 주택은 필요한 시점에 원활히 매매하기가 쉽지 않다. 땅의 위치, 집의 디자인 등에 따라 호불호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변두리 시골 땅에 취향대로 지은 집은 그저 삶의 터전일 뿐 가치 오르는 재산으로서 지위를 잃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순간의 결정이 자칫 '빼박'이 될 수 있다는 부담감이 자꾸 경계심을 작동시켰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40여 년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빼박'은 결혼이었다. 그 되돌리기 어렵고 중차대한 결정의 과정에서 완벽함과 환불 여부에 대한 몸사림이 있었던가. 서로의 연애사를 훤히 아는 동기 놈과 결혼까지 하게 된 건, 대패 삼겹살 구워 먹다가 마주한 뿌연 연기 사이로 불현듯 오고 간 느낌적인 그 느낌 때문이 아니었더냔 말이다.


땅을 선택하는 문제는 마치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이성과 논리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의 영역이었다. 결심을 굳혔다. 


▲ 마당에서 볼 수 있는 산의 풍경에 반해 땅을 사고 작은 집을 지었다.


제정신이었다면 못 샀을 양파밭


약간의 문제는 남아 있었다. 결제라는 마지막 단계를 통과하려면 통장 앞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남편을 움직여야 했다. 


게다가 '그 남편'은 자기 아내가 수년간 연차를 쏟아 부어 비밀리에 땅을 보고 다니다가 기어이 픽한 값비싼 '양파밭'을 구입하는데 전 재산을 털어 넣을 작정이라는 소식을 방금 전에 알게 되어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상태라는 것이었다.


절절한 손 편지로 감정에 호소도 해 보고,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며 투쟁도 벌였으나 남편은 철옹성이었다. 빤한 월급쟁이 사정에 영리한 투자로 자산을 늘려가도 시원찮은 마당이다. 향후 가치가 있을지 없을지 모를 땅에 전부를 올인하자는 주장은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이왕지사 정상 범위를 벗어난 김에 좀 더 가보기로 했다. 남편에게 이른바 파국 발생 예고장을 날린 것이다.


요지는 대략 이러했다. 만약 당신의 비동의로 인해 양파밭 구입에 실패한다면 본인은 사시사철 당신을 원망할 것이고 결국 우리 관계는 파국을 맞을 것으로 사료되는 바이다.


훗날 양파밭의 주인이 된 남편은 '파국이다' 읊조리던 서늘한 나의 '눈깔'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고 이를 갈며 회고했다. 분명한 건 '제정신'이었다면 감히 땅을 사는 일에 그리 진심이지 못했을 것이란 느낌적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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