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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타올 Dec 15. 2022

첫사랑에게 '김치 싸대기'... 멍든 채 다짐했다

버스맨과 레드캐슬에 얽힌 이야기


어쩌다 집 짓고 지 팔자 지가 꼰 전말의 원흉은 사춘기를 보낸 '효녀네 집'이었다. 은밀하게 일탈을 자행하면서도 선은 지키는 염치 있는 '효녀'가 되기까지 그 집의 공이 컸다.


쭈글쭈글한 학창 시절을 필터로 기억 보정해 준 고마운 집이지만 도무지 참지 못할 구조적 결함이 있었다. 대문이 낮아도 너무 낮은 것이다. 160cm 안 된다고 방심하거나 머리 조심 경고를 잊었다간 여지없이 눈앞에서 별을 본다.


어떤 자가 왜 때문에 대문을 그따위로 만들었는지 연유를 알 순 없지만 덤벙대기로 치면 남 부러울 것 없던 나는, 낮고 작은 대문의 단골 희생양이었다. 지치지도 않고 박치기를 당할 때마다 교양과 학식을 총동원해 애꿎은 대문 앞에 험한 말을 쏟아 냈다.


꼴도 보기 싫던 그 대문이 단박에 '최애'로 돌변한 건 '버스맨'을 우리 동네에서 목격한 이후부터이다.


사랑은 버스를 타고


'버스맨'이란 7080 세대의 '인싸 훈남'이다.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남녀공학 사각 지대로 밀려난 불운한 청소년에게 버스는 이성을 만나는 최적의 '핫플'이었다. 아무래도 미팅, 소개팅은 발각될 경우 학사 조치를 각오해야 하는 배짱이 필요해 부담스럽다.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소녀들에게 버스맨은 교회 오빠와 더불어 첫(짝)사랑의 양대 산맥 정도였다고 봐야 합당하다. 버스에서 만난 썸남을 향해 '저 이번에 내려요' 멘트 던지는 TV 광고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사랑은 버스를 타고 달렸다.       


나의 버스맨으로 말하자면, 명문고 교복을 간지 나게 빼입고 나이키 망치 가방을 힙하게 걸쳤으며 한 손을 주머니에 무심하게 툭 찌른 스웩이 서울(?) 남자처럼 영롱하고 고급졌다. 


다만 시대 불문 보는 눈은 매한가지고 훈남은 희소가치 높은 재원인지라 그는 만인의 버스맨이었다. 사방에 경쟁자들이 우글거렸다. 음흉했으나 소심했던 난 그의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채 전전긍긍했다.


상황이 이 지경이었는데 우연히 하교하는 버스맨 뒤통수를 우리 동네에서 갑자기 '발견'하고야 말았다. 순간 사방에서 벚꽃 잎이 흩날리고 여의도 불꽃놀이 축포가 터지는 듯했다.


버스맨과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은 그와 이른 시일 내에 눈 맞춤이 가능한 교집합의 범주에 속해 있다는 수학적으로 완벽한 계산이었다. 인싸 훈남을 선점할 인프라를 구축했다는 체계적인 전략의 성공이었다.


공손하게 낮은 대문을 열고나서면 '동네 주민'인 버스맨과 마주치면서, 청량미 뿜뿜 매력 발산하면서, 운명의 데스티니 불타는 사랑에 빠지면서...로 시작하는 청춘드라마 여주인공 데뷔 무대가 펼쳐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래 봬도 사실 버스맨이 첫 번째 사랑은 아니다. 사람도 아닌 것과의 지독한 첫사랑은 정작 따로 있다. 

 


사람도 아닌 집을 향한 짝사랑


'국민학교'가 건재하던 시절 동네 집들은 고만고만했다. 주택 개조 사업으로 시멘트를 때려 박아 깍두기처럼 찍어냈다. 누런 베이지색 페인트로 마감한 모양새까지 전쟁 통에 헤어진 형제, 자매인 양 한결같았다. 한 집만 빼고.


그 집은 시장으로 향하는 모퉁이 몇 번째에 우뚝 솟아 있었다. 섹시한 빨간 벽돌에 콧대 높은 박공 지붕을 올린 이층집이었다. 농구 선수라도 당당하게 입장 가능한 대문은 웅장했고 낯선 주차장 셔터는 포스를 뿜어댔다. 마당에는 푸른 잔디가 푹신하게 자랐다. 그 집을 지날 때는 클래식 BGM이 깔리는 착각이 들곤 했다.


무엇보다 사람 기죽이는 포인트는 집 외부에 계단과 화장실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어마어마한 저 집에 오직 1가구가 거주한다는 친절한 설명이다. 쪽방 총각, 상하방 아가씨, 뒷방 학생 없어도 먹고 사는 데 지장 없는 도도함. 기성품이 아닌 오더 메이드가 확실한 독창적이고 자극적인 디테일. 훔쳐보고, 안 본 척 보고, 일부러 가서 보고, 대놓고 보고 또 봤다.


훗날 누군가 내게 '영혼을 은행에 저당 잡히고 남편을 공갈 협박하면서까지 집짓기를 감행한 이유가 뭡니까' 따져 묻는다면 '빨간 벽돌집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답할 것이다. 단언컨대 내 첫사랑은 성처럼 거대했던 그 빨간 집 '레드 캐슬'이었다. 허나 인생은 첫사랑이 집이든 사람이든 청춘드라마고 나발이고 뭘 호락호락 주는 법이 없다.

   


버스맨과 캐슬의 김치 싸대기


모든 게 적당했던 어느 날 시장 떡볶이 가게로 가는 길이었다. 오가는 참에 슬쩍 레드 캐슬도 구경하고 동네 사람 버스맨까지 만나는 운수 좋은 날을 기대하며 모퉁이를 도는데, 대박. 늘 굳게 닫혀 있던 캐슬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대체, 누가,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 저 집에 사는지 항상 궁금했던 차였다. 오감을 바짝 세우고 발걸음을 늦췄다.


레드 캐슬의 주차장 셔터 사이로 까만색 고급 차가 엉덩이를 반쯤 내놓고 있었다. 세차를 하는 누군가의 싱그러운 웃음소리가 호스 물줄기를 따라 쏟아졌다. 햇살에 반짝이는 무지개에 깜빡 눈이 부셨지만,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바로 인싸 훈남, 나의 버스맨이었다.


저 성이 버스맨 집이라니. 버스맨이 무려 캐슬에 사는 금수저 왕...왕자님이라니. 집을 나선 목적은 잊은 지 오래다. 냅다 발을 돌려 집으로 뛰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쩌면 집은 형편이고 꼬락서니며 신분이었다. 도저히 손끝이 닿지 않는 거리였다. 캐슬과 시멘트 깍두기는 너무 멀었다.


먼 거리만큼 시간은 우주를 거슬러 신분제 사회로 여행을 시작했다. '신데렐라는 왕자와 행복하게 살았대'가 잔인한 판타지임을 아는 중2였다. 성에 사는 왕자님은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존재였다. 너무나 쫄렸다.


꽁지 빠지게 집으로 달려오느라 그놈의 낮은 대문에 대차게 정수리를 박았다. 만신창이 된 몸과 마음으로 침대에 기어올랐다. 친척이 이사 가면서 버리고 간 이층침대가 삐걱삐걱 울어 댔다. 야속한 정수리 혹이 퍼렇게 욱신거렸다.


분했다. 저기요, 대문을 20센티 아니 10센티 더 높게 만드는 일이 막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억울했다. 저기요, 청춘 드라마 여주인공 얼굴에 막 김치 싸대기 날리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죽일 놈의 첫사랑이 불 지핀 욕망


그래도 보기 드문 효녀여서 다행이었다. "어머니! 왜 제 처지는 시멘트 깍두기입니꽈!" 속없는 마음을 품진 않았다. 초라한 대문짝에 달린 피땀 눈물을 모른다 해도, 모른 척해선 안 되는 법이다. 야무지게 캘빈 클라인 티셔츠(feat. 학원비 삥땅) 챙겨서 대문 여기저기 골고루 찍어대며 씩씩하게 사춘기의 터널을 건넜다.


금수저 버스맨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은 베스트셀러의 가르침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다' 프레임으로 포장해 정신 승리하면서. 기필코 언젠가 드디어 반드시 멋진 집을 짓고 살으리랏다 욕망의 불씨를 지피면서. 물론 그땐 몰랐다. 무생물을 향한 이 죽일 놈의 사랑 때문에 집짓기 나락으로 굴러서 전 재산 '탕진잼'에 빠질 미래의 현재를 말이다. 첫사랑이 이렇게나 무섭다.


이제 와 생각하니 새삼 어이가 없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본질은 어쩌자고 몰랐을까. 시멘트 깍두기 집 '꼴'을 논하기 전에 핵심적인 맥락을 먼저 따져 봤어야 할 일이다.


예컨대 도수 높은 돌돌이 안경과 숏커트와 깻잎 머리의 조합에는 진심 문제가 없었는지? 뿜뿜할 청량미는 대체 어디서 구입할 작정이었는지? 수학은 재빨리 포기했지만 국어는 곧잘 했는데 주제 파악에 얼추 30년 걸렸다. 역시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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