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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리타올 Dec 15. 2022

효리네 말고 효녀네, 시작은 그 집이었다

그놈의 집 때문에 벌어진 공포 누아르 참회록

반팅, 미팅을 챕터별로 뛰느라 분주했던 고딩 시절. 불토를 보내고 오는 날이면 어김없었다. '오늘도 무사히'를 기원하며 어둑한 그곳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단층 주택인 우리 집에서 뒷집으로 이어진 좁은 골목이 범행 장소였다.


책가방 구석에 문제집 대신 처박혀 있던 교복을 주섬주섬 꺼냈다. 누가 볼까 봐 행인1, 행인2를 경계하는 서글픈 모가지가 들락날락 분주했다. 몇 달 치 학원비를 삥땅쳐 득템한 캘빈 클라인 티셔츠를 고이 벗어 넣고, 멋대로 구겨진 교복을 털어 입었다.


무엇보다 '수학의 정석 1장 집합을 씹어 먹느라 오늘도 불태웠다' 정도의 표정을 장착하면 완전 범죄 완성이다. 완전 범죄는 주말에도 열공하고 왔으리라 믿는 부모님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였다. 참, 효녀였다.



무화과가 열리는 옥상 


초록색 방수 페인트가 겹겹이 쌓인 '효녀네 집' 옥상에는 옆집 할머니네 무화과나무 가지가 치렁치렁 넘어왔다. 옥상에 무화과가 잔뜩 걸리면 이윽고 가을이었다. 옆집 할머니는 '느그집 옥상에 열렸응께 그 무화과는 느그 꺼!'라고 말하는 쿨녀였다. 주둥이가 아릴 때까지 무화과를 먹었다.          


늙고 낡아가는 효녀네 집은 찬바람에 코가 시렸다. 장대비라도 내리면 코앞까지 물난리 나기 일쑤였지만 무화과가 열리는 옥상을 가진 신기한 집이었다. 사춘기 효녀의 일탈을 추억으로 눈감아준 넓은 집이었다. 그 집의 공기, 온도, 습도에 관해 묻는다면 '라떼 꼰대'로 등극할 자신 있다. 끝도 없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종종 대책, 생각, 계획 같이 근사한 것은 1도 없는 주제에 세상 물정 모르는 태평함이 그 집 때문은 아닐까, 합리적 의심을 품기도 했다. 그 집에서 보낸 나의 10대는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성적은 보잘 것 없고, 짧은 다리를 비롯한 외모에 어느 것도 볼품 없었지만 꽤 괜찮았다.


효녀와 불효녀 사이 질풍노도 줄타기가 쓸쓸해지면 도망칠 구석 골목과 옥상 다섯 번째 계단이 있었다. '공부 잘하냐?'는 세상 불편한 질문으로 서툴게 관심 주는 동네 사람들도 함께였다. 숱한 궂은날이라도 그 집의 낮은 하늘엔 굵은 별들이 반짝였다.


이 모양 이 꼴인 현실 다큐도 '그 집'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면 별거 아닌 해프닝쯤으로 둔갑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우당탕탕 달리고 넘어졌다. 땅을 밟고 망나니마냥 뛰어다니며 보낸 시간은 각가지 이야기를 만들고, 그 시시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줬다. 


덕분에 첫 월급 80만 원에 가치를 평가 받았을 때도, 시험에 떨어져 피시방에서 무기력한 세월을 보낸 시절에도, 관계에서 받은 상처로 숨고만 싶던 순간도 그럭저럭 견뎌졌다. 때때로 나라는 인간이 썩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뭐 그렇게 형편없는 놈은 아니지 않나. 무언가가 날 일으켜 세웠다.



이야기 꾸러미의 값 


그래서 우리 부부는 집을 짓기로 했다.


몇 년을 찾다 만난 맘에 쏙 드는 시골 땅을 사느라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었다. 집 짓는다고 있는 빚 없는 빚 옴팡 당겼다. 남편은 빚쟁이가 됐다며 투덜댔지만 난 변함없이 생각이 없기에, 대책 없이 용기가 솟았다.


두 아들에게 빵빵한 뒷배가 될 이야기 꾸러미를 선물한 값이라 치면 되지. 즐거운 마음으로 묵묵히 갚아 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지 않았다면. 직장을 박차고 나오는 무모한 용기는 뒷주머니 깊숙이 넣어뒀어야 했다.  


오래전 '효녀네 집'에서 시작된 이상한 알고리즘의 폐해는 대략 이렇다.


평생 꿈이라며 남편을 협박해 소박한 재산을 때려 박고 은행에 영혼을 잡힌 밑천으로 집을 지었는데, 잃어버린 또 다른 꿈 찾아 직장을 집어 치우고 방랑하는 마흔 몇 살.


다 그놈의 집 때문에 벌어진 공포 누아르 장르의 진부한 참회록이다. 임산부나 노약자, 수험생 여러분은 부디 이딴 글로 고단함 나눠 갖지 마시고 세상 굴레와 속박을 벗어나 행복 찾아가시길 당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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