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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슬 Jan 21. 2019

끓이다 말고 간도 못 맞춘 육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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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와 밥을 먹으러 호텔 뷔페에 갔을 때의 일이다,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수프 같은 것을 떠오게 되었다, 나는 아직까지 그 음식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 소고기 스튜에 물을 흥건하게 풀어놓은 것 같은데, 약간 매콤한 듯한 기운도 있으면서 토마토 페이스트의 맛이 난다, 나는 그 붉고 멀건 국을 한 입 떠먹고는 '무슨 이렇게 끓이다가 그만 둔 육개장 같은 맛이 다 있지'라고 생각하고 한 번 찡그리고는 손도 대지 않았다, 이 때에만 해도 개별적인 재료의 맛을 모두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말로 뭔가 잘못 만들어진 육개장 같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여자친구가 그 수프를 떠와서 내 눈 앞에서 무척 맛있다며 계속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좀 이상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러운 맛의 소고기 수프라며 평화로운 표정을 음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수프를 떠먹어봤는데, 그제서야 조금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 입맛에는 안 맞았지만 같은 음식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내 인식 체계는 딱 한 입 먹어 본 후에 가장 비슷한 기준점인 육개장을 기억 속에서 검색해서 찾았고, 그 육개장을 기준으로 그 음식을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육개장을 기준으로 보면, 끓이다 말고 간도 못 맞춘 맛이다, 하지만 그건 나의 휴리스틱(불충분한 정보에 의한 직관적 판단)에 불과하다, 사실 그 수프는 나에게 자신 육개장 비슷한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에도, 나는 '넌 실패한 육개장이야' 라고 덮어두려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에게 익숙한 경험을 토대로 기준점을 잡고, 너무 불필요하게 빨리 무언가 낙인 찍으려 할 때가 있다, 반성의 마음이 들었다, 그런 판단 방식은 늘 비슷한 것들을 접하고 사는 상황에서는 별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 전혀 새로운 것을 만날 때에는 오류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원천에는 열린 마음뿐 아니라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기준점이 중요한 것이겠지, 늘 나와는 다른 생각을 지닌 (하지만 인간적 애정을 갖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옆에 두는 것도 중요하고,



2018년 3월 씀,




이 글은 에세이집 『연소일기: 삽십 대 편』에 실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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