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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슬 Oct 05. 2019

영화 <벌새> 리뷰. 한 여자 아이의 삶 속에 빠져들다


*여러분은 지금 서기슬씨의 '과장법 쾌락주의 리뷰'를 읽고 계십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exaggerated



사진=콘텐츠판다/(주)엣나인필름



벌새라는 영화가 난리였다, 사실 고작 수만 명이 본 영화가 트위터의 특정 네트워크 내에서 회자되는 것을 '난리'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그 온라인의 소음이 약간은 유난하게 다가왔다, 맥락을 알 수 없는 말이면서도 어쩐지 특별하지는 않은 것 같은 몇 마디 말이 명대사인 것처럼 언급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몇 개의 상을 수상했다거나, 그 영화를 네 번, 여덜 번 본 사람도 여럿이라거나 이런 얘기들 때문에 굳이 극장으로 향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이 영화를 봐야겠다, 라고 생각한 계기는 감독이 관람객들에게 보낸 감사의 손편지, 였나, 그것 때문이었다, 나는 어떤 작품이든, 인생의 한 장면이거나 그 어떤 일이든, 오래 고민하고 준비한 것에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감독이 아주 오랫동안 오래 그려 온 얘기를 담았다는 것, 아마도 자신이 소녀였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던 고민과 감상을 담으려했다는 것을 조금 알게 되었고, 몇 개 안 되는 상영관 중에 어렵게 시간을 맞춰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를 보기 시작한 첫 15분 정도의 감상은 이런 것이었다, 왜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는지, 정도는 알겠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런 지루한 호흡으로 이 긴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을까, 처럼, 자세를 한껏 뒤로하고 고객를 약간 기울게 팔짱을 끼고 쳐다보는 자세로, 음, 좋은 영화네, 어떤 면이 좋다는 건지는 알겠어, 하는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감독이 걸어 온 최면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과장하자면, 그러니까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의 목록은 과장법 쾌락주의 리뷰니까, 그 본색에 맞게 적극적 언어를 써보자면, 나는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그 은희네 집의 90년대스러운 가정집 냄새라거나, 그 바닥 장판의 감촉 같은 것까지 어쩐지 생생할 정도로 몰입하게 되었다, 역시나 감독이 시간과 고민을 응축하고 만들어낸 연출의 매듭들이, 단단하고 팽팽하게 밀고 당기며 내 감상으로 침투해온 것이라 생각하지만, 또한 우리는 90년대를 살았고, 이제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그 시절에 대해 우리 모두가 특별함을 부여하게 되는 그 감정에 대해, 함께 겪고 잃어버렸던 것들이 장치가 되어 몰입을 가속화하기도 했던 것 같다, 누구나 자신이 10대를 보낸 시대, 그 불안함과 시간적 울렁거림을 각별하게 기억하겠지만, 정말로 90년대는 좀 이상하지 않았던가, 그 와중에 성장기에 있으면서, 정말이지 세상이 좀 이상했다는 감상을 나만 가진 것은 아니었군, 하는 생각에 대해,


나는 은희처럼 막내 여자아이도 아니었고, 사랑을 많이 받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세상에 가졌던 그 의구심에 대해, 그러니까 감독은 '그렇지 않았어?' 라고 묻는 일에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실은 세상이 이상한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이 조금씩 싹트고, 그래 어떤 면에서든 분명,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이상한 것이었어, 하고 좀 더 확신을 갖고 깨닫게 되는 지점에 대해, 어떤 부조리라거나 불일치에 대해, 하지만 그것이 갈등하고 흩어지고 혹은 그 갈등이 해소되지도 않고 묻히는 듯 사라져서 오랜 시간 사람들 마음 속에 익어서 전혀 다른 부패 혹은 발효로 나타나는 것까지 포함해서, 부조리나 불일치마저 '자연스럽다'는 표현이 어색하면서도 당연하게도, 세상에 녹아드는 일에 대해,

결과적으로 나는 영화 속 은희의 삶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선명하게 기억에 남은 장면이 훨씬 많지만, 나는 딱 두 장면만 꼽아보고 싶다,


첫 째는, 은희가 영지 선생님에게 이렇게 묻는 장면이다, 선생님도 제가 불쌍해서 잘해주는 건 아니죠? 이것은 관람객으로 나의 생각, 영화가 명확히는 암시하지 않는, 나의 소위 '캐해석'에 대한 얘기이다, 은희의 그 순진하고 솔직한 질문, 그저 '아니다'라고 확인받고 싶었던 질문이었겠지만, 어쩌면 엘리트였던, 좋은 학교를 나오고, 아마도 사회운동 혹은 노동운동에 투신한 적도 있었을 것 같은, 그리고 좋은 집에 살았던 영지에게, 실은 여러 번 찾아왔던, 자기를 더 큰 고민에 밀어넣기도 했던, 오랜 질문이었을 수도 있다, '선생님도 제가 불쌍해서 잘해주는 건 아니죠?'는 '내가 연민으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내적 고민으로 그대로 치환될 수 있다, 그리고 태연하게 직면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바보 같은 질문에는 대답 안 해도 되지? 라고 대답하는 영지는, 감정으로 살아가기보다 정의로 살아온 선생님으로서 답한 부분도 있었겠지만, 은희가 귀엽다는 듯 웃음으로써 그것을 애착과 애정 같은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스스로 소화하여 전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이, 이 세상의 어려운 부분에 대해 잘 모르겠으면서도 또한 얘기해주고 싶은 것이 많이 있는, 마지막 편지의 내용, 영지 선생님의 마음과 잘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둘째는, 은희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여러분'에 맞춰서, 춤도 아니고 분풀이도 아닌 거친 몸짓으로 자신의 감정을 풀어내는 장면이다, 전체적으로 박지후 배우의 연기력이 출중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연기로서 훌륭했던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해당 장면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을 수도 있지만, 은희가 유리와 걷다가 전남자친구가 갑자기 나타나서 둘이 다시 애정행각을 하게 되는 장면에서, 극장에서 터져나왔던 웃음과 탄식, 한숨이 기억난다, 무척 재미있는, 언니들의 탄식이었을텐데, 나는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이지만, 남자는 멍청한 동물이고 또 여자는 그런 멍청한 동물에게 또 자신을 허락하고 마는 바보같은 동물이기 때문에, 청춘을 통과할 때까지 여자들은 쌓아야하는 흑역사의 총량과 바보짓의 총량이 어느 정도는 정해져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무엇보다도 은희의 몸짓이 그 바보같으면서도 '성장 과정'이라는 식상한 말로 표현되기엔 까끌한, 하지만 또 그런 식상한 표현으로 언급되고 마는, 그런 시간을 통과해서 어른이 되는 과정을 잘 나타나는 과장된 몸짓 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소리 지르거나 화내는 장면 외에 늘 다소곳한 정자세로 걷던 은희가, 혼자 있을 때에 말 없이 발돋움을 하며 감정을 풀어내는 장면, 


마지막으로, 바로 전에 영화 기생충 리뷰에서도 비슷하게 썼듯이, 나는 그리 영화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떤 하나의 이야기가, 글도 아니고 연극도 아니고 다른 장르가 아닌 오직 영화로 그려져야야만 그 장르적 특성을 통해 살아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영화를 영화로서의 끝까지 밀어가고 꼭대기까지 끌어올리는 '연출의 힘' 자체게 감탄하며 즐기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벌새를 보면서도, 영화의 장르적 서사적 특성, 독립 영화의 성격 모든 것을 배제하고, 그저 김보라 감독의 연출의 기예에 감탄하며 보게 되는 부분이 많이 있었다, 영화의 씬은 뿌옇거나 포근하거나 차갑더라도, 연출과 편집에서는 늘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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