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길러내는 일
자연을 좋아하는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집에선 화분 하나, 물고기 한마리도 키우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무리 손이 많이 안가는 생물이라도 내 손에서 살아 남은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뭔가 기르는 일에는 젬병이다. 원래 생물을 잘 키우는 손은 따로 있다고 합리화시키긴 했지만, 속상한 건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한 이유.
생물을 키우며 정이 들었는데, 내 눈 앞에서 아프고 병들어 죽어버리면 어쩌나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그 서글픈 마무리는 차마 내가 할 용기가 나지않았다.
이런 내가 아이둘을 키우고 있다.
첫 아이 신생아 시절에 목욕시키다가 처음으로 물에 빠트렸던 때의 충격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 하나 건사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내가 무슨 생각으로 작고 미숙한 아이를 낳아 키우려고 마음을 먹은 것인지, 이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내 손에 커도 진짜 괜찮은 것인지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를 키운지 몇 해가 지나니, 이제 그런 두려움과 무력감은 많이 옅어졌다.
생명을 길러내는데는 그 생명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되는 일 이었다. 그 사랑은 나로하여금 아이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불편한 곳은 없는지, 세세한 표정의 변화와 말 한마디 등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게 만들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형태의 사랑을 바라는지, 그것을 충족시키기위해 오로지 그 아이에게 집중하고 몰입하게 만들었다. 그 힘이 우리 아이를 길러낸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그 힘은 내 아이를 길러내기도 했지만, 내 안의 두려움을 견딜 용기도 길러냈다. 우리 아이와 함께라면 어떤 시련도(아프거나 병들거나 죽거나) 견뎌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때문이다. 그렇게보면 내가 아이를 길러내기도 하지만, 아이도 나를 길러낸다.
오늘 집 베란다 창문에 초대하지도 않은 나팔꽃 넝쿨이 철장을 힘껏 껴안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문득, 나도 이제 식물 하나 정돈 키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용기를 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