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수업 끝나면 친구들과 피시방으로 달려가 정액권 끊어놓고 밤새 게임하는 재미에 중독되어 살았었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까지 게임하고 집에서 잠깐 씻고 다시 학교에 나와 과방에서 자고, 강의실에서 졸다가 밤이 되면 다시 정신이 말똥말똥해져서 피시방으로 향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돌이켜보면 게임말고도 해볼 수 있는게 참 많은 시기였는데, 소중한 시간을 게임으로만 낭비한 것 같아 아쉽다. 한 1년 정도 바싹 즐기다가 끊었어야 했는데, 거의 3년을 폐인처럼 살다가 군대에 입대하면서 겨우 피시방 죽돌이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왜 그토록 게임에 몰두했을까.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게임에 리셋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게임을 하다가 바보 같은 실수를 해서 죽더라도 다시 기회를 얻어 원점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플레이하기보다는 조금씩 다르게 바꿔가면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걸 좋아했는데 그러다 보니 다른 친구들에 비해 유독 실수가 잦고 먼저 죽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게임은 매일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였고, 그러다 한 번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 친구들로부터 "나이스!" 소리라도 듣게 되면 엄청난 쾌감이 몰려오는 경험을 하곤했다.
아마 한국 사람들이 유독 게임을 좋아하고, 또 한국에 크래프톤, NC소프트, 넥슨 같은 우수한 게임 기업들이 많은 이유 중 하나도 게임에 리셋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는 실수를 하면 기록에 남고 또 앞으로의 진로나 커리어에 있어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과감한 시도를 해보기 힘들지만, 게임에서는 아무리 많은 실수를 해도 잠깐 "아씨" 하고 넘긴 다음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시도해볼 수 있으니 말이다. 한 치의 실수와 정해진 선을 넘는 데에 유독 엄격한 사회에서 하나의 탈출구로서,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잠재적 가능성의 실험장으로서 게임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정신의세 단계 변화
어려서부터 우리는 가족과 사회, 그리고 교육기관을 통해 사회의 통념과 규범, 지켜야하고 따라야 할 질서를 학습받고 체화시킨다. 이 질서는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고 배우면서 만들어온 과거의 유산이기에, 이 질서를 잘 따라 사는 게 질서를 무시하고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사는 삶보다 더 유익하고 도움이 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나를 대신해서 인생의 선배들이 먼저 시행착오를 겪은 후 괜찮거나 좋다고 판단한 내용만 추려서 정리한 게 바로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질서가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잡고, 숨통을 조이는 순간이 온다. 선배들이 살았던 환경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 때 필요한 액션은 기존의 질서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일이다.
니체는 새로운 질서의 창조를 위해 어떠한 순서로 정신의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지 이해하기 쉽게 비유적으로 설명해준다. 니체의 사상은 허무주의인 동시에 창조의 철학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맞다고 배워온 모든 것들이 맞는 지 알 수 없고, 옳다고 믿어온 모든 것들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세상은 허무해진다. 하지만 반대로 그 어떤 것도 정답이 아니기에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기존에는 시도해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무언가를 실험해보고 창조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정신이 겪는 변화, 즉 순응에서 저항과 자유, 그리고 창조로 이어지는 세 단계 과정을 낙타와 사자, 어린아이의 비유를 통해 이야기한다.
"나 이제 너희들에게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 아이가 되는가를."
낙타는 기존 규범과 당위성에 순응하는 정신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한다", "국가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등 어린 시절부터 주위에서 끊임없이 듣고 주입받은 가치들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른다. 또한 이에 따라오는 의무도 "네 알겠습니다!" 외치며 충실히 따르고, 규범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무거운 짐도 기꺼이 짊어진다. 국가경제에 이바지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국영수 공부도 하고, 시험문제도 치열하게 풀고, 높은 점수를 받는 모범생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를 위협하는 외적에 맞서 싸우기 위해 운동도 꾸준하게 하고, 군대도 다녀오고, 강하게 정신무장을 한 채 경계의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기존 규범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이를 지키기 위해 수반되는 어떠한 시련과 어려움도 참고 견뎌내야 한다.
그러다 정신은 낙타에서 사자로 변모하는 과정을 겪는다. 이제까지 열심히 따라왔으며 정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기존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더 이상 그에 따라 살지 않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하는 단계이다. "너는 00 해야 돼" "이런저런 사람이 되어야 해" "이러저러한 삶이 좋은 삶이야"와 같은 조언들과 사회의 압박들을 다 걷어치우고, 이제 내 안에서 울리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앞으로는 나 자신이 스스로 설정한 가치와 세계관에 따라 살 각오를 함으로써, 내가 가진 자연성을 회복하기 위한 창조의 단계에 들어설 준비를 마치게 된다.
"사자는 여기에서 그가 섬겨온 마지막 주인을 찾아나선다. 그는 그 주인에게 그리고 그가 믿어온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그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 또는 신이라고 부르기를 마다하는 그 거대한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 그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에 맞서 "나는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기존 질서의 제약과 억압에서 자유로워진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발전한다. 어린아이는 이제까지 배워왔던 세상의 고정관념과 정해진 틀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켜야 할 것도, 못할 것도 없는 상태에서 순진무구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이다. 실수를 해도 꺄르륵 웃고, 오히려 실수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무언가를 배우고 깨우치며, 기존 질서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시도하지 않는 무언가에 거침없이 발을 내딛고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나간다.
"어린아이는 순진 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원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인생은 실전이야
우리는 대부분 낙타의 삶을 살지 사자나 어린아이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기존의 질서가 꽤 오랜 시기 비교적 잘 작동했기 때문에 굳이 힘들게 자신만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졌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워졌으며, 전쟁 이후 폐허에서 기적이라고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루어냈다. 두 번째는 기존 질서를 벗어나려는 그 어떤 시도, 즉 누군가가 사자가 되려고 하는 낌새가 조금만 보이면 사회 전체가 강하게 찍어눌렀기 때문이다. 기존 정답에서 벗어난 무언가를 시도하는 사람에게 "인생은 실전이야" 비아냥 거리면서 말이다.
인생은 실전이라고 말할 때의 실전이란 곧 우리 사회에서 정답으로 인정받는 단 하나의 게임을 말한다. 말하자면 '엄친아 게임'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데 게임 방법은 이러하다. 어린 시절 영어 유치원에 들어가서, 사립초등학교를 나오고, 특목고에 입학한 뒤, 명문대에 진학한다. 그리고 대기업에 입사해 고액연봉을 받고(최근에는 의대에 들어가 의사가 되는 것으로 트렌드가 조금 바뀌긴 했다), 강남이나 판교의 브랜드 아파트에 살면서, 외제차를 몰고 명품을 두르며 자녀를 낳아 내가 걸어왔던 길과 똑같은 길을 다시 걷게 만들면 된다. 부모의 재산이 풍족할 경우 현질도 가능하고, 외모가 뛰어나거나 영어를 잘하면 가산점이 붙는다. 각 단계, 또는 과정마다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에 따라 점수가 매겨지고 이에 따라 전체 플레이어들은 골드, 플래티넘, 실버 계급 등으로 나뉜다. 그리고 철저하게 이 하나의 게임으로 모든 사람들이 분류되고 서로를 식별하며,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사람에게는 우월감을, 그리고 높은 사람에게는 열등감을 느끼도록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엄친아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절대 한눈 팔거나 실수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정해진 길을 따라서 가야하고,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가장 앞서야 하며, 시험문제를 풀고 또 풀어서 하나의 실수라도 줄이는 데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집중 투자해야 한다. 만약 어느 한 단계에서 미끄러진다면 게임에서 회복하기 힘들만큼 큰 포인트를 잃게 되고, 계급이 강등될 수 있다는 공포와 직면하게 된다. 기회는 거의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 정해진 진로를 크게 벗어나면 이마에 '사회 부적응자' '이상한 사람' 딱지가 붙는다.
이 게임에 환멸감을 느낀 나머지 참여를 포기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는 사람에게 사회는 다시 경고한다. "인생은 실전이야". 그럼에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기존 질서를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땐 이렇게 말한다. "얼마나 잘 되나 보자" "거봐 그렇게 될 줄 알았어" "누가 칼 들고 협박했나. 네 선택이니 네가 책임져". 새로운 도전을 격려하고 응원하기보다 시기하고 질투하며 안 되길 바라는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이고 결국 다시 엄친아 게임으로 돌아와 어떻게든 점수를 올려보려 발버둥친다.
니체는 모든 동물은 자신의 자연성을 이루려고 노력하는데, 인간은 이런 자연성을 억압하면서 스스로를 옥죄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을 '병든 동물'이라고 한다. 급속하게 경제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국가와 집단을 중시하면서 개인의 자연성을 억압하는 질서가 형성되었고, 한 때는 그 질서가 자연성을 억압하는 대가로 더 큰 안전과 풍요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의 경제 수준이 일정 단계 이상 올라서자 이제는 기존의 질서가 개인의 자연성을 더 크게 억누를 뿐만 아니라, 창조가 중요해진 경제에서 성장을 저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때문에 변화된 환경에 맞지 않는 구질서에 충실히 따라 살아왔던 많은 사람들, 특히 청년들은 좌절하면서 병들어간다.
탈출구는 이민 아니면 게임
저성장, 청년실업, 자살율 최대, 빈부격차 확대, 부채 증가 등 온갖 경고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는데, 사회 전체가 이제 엄친아 게임에서 벗어나 좀 더 다양하게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는 없는걸까.학교는 학점제로 해서 2년을 다니건 5년을 다니건 알아서 하고, 같은 수업에 나이가 다른 사람들끼리도 듣게 하고, 계획서를 제출하면 1년 간 직업탐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대학입시도 객관식 문제풀이 말고 논술형으로 바꾸고, 군대는 모병제로 전환해서 진짜 정예만 키우고 부족한 인력은 기계장비로 바꾸는 식으로 말이다. 군대 문화, 산업화 시대의 환경에서나 적합했던 과거의 질서를 이제 변화된 환경에 맞추어 개인의 자연성과 개성을 좀 더 존중하는 방향으로 바꿔가야 하지 않을까. 예전에는 국가가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제 무려 소득 3만불의 자랑스러운 선진국이라는데,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BTS가 기어코 군대에 들어가는 걸 보니 어려워보인다. 낙타가 사자가 되기에 대륙과 해양세력의 최전선에 위치한 분단 국가의 거대한 용은 너무 막강하다. "적이 코 앞에 총을 겨누고 있는데 무슨 소리야" "자꾸 까먹는데 한국은 지금 전시상황이라고" 이제까지 국가를 안전하고 부유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시스템을 왜 굳이 바꾸어야 하느냐. 안이하게 새로운 시도를 했다가 전쟁이라도 터지면 어떻게 하냐. 설사 일부 청년들이 좌절하고 희망을 잃고 사회를 외면한 채 집 안에 틀어박혀 있어도 바로 전쟁 투입가능한 개성 따위 필요없는 예비군 한 사람이라도 더 만들어내는 지금의 질서가 더 낫다고 하시니 할말이 없다.
거대한 용을 이기기는 어렵고, 그렇다고 이대로 병들어갈 수는 없기에 다른 길이 없나 찾아보면 두 가지 정도의 선택지가 있긴 하다. 이민이나 가상세계로의 도피.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다양한 시도를 권장하며, 재기의 기회를 주는 다른 선진국들, 특히 영어권 국가들로 이민을 가거나 언젠가 가게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말도 안통하고, 가족과 친구들을 모두 떠나서 새로운 국가에 정착하는 일이 쉽지는 않기에 아무리 자유가 좋아도 막상 먼 나라로 떠나려면 망설여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선택지는 가상세계, 게임으로의 도피다. 게임 속에서는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뭐라하는 사람 없으니까. 여기서는 실수해도 다시 만회할 기회가 얼마든지 주어지고, 내가 노력하는만큼 쑥쑥 레벨업도 되고 보상도 바로바로 따라오기에 현실의 팍팍함을 잊고 머무르기에 딱 좋다. 현실에서는 "네 알겠습니다" 외치며 낙타의 삶을 충실히 살고, 게임에서 방구석 여포마냥 사자도 되었다가 어린아이도 되면서 억눌린 자연성을 분출시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방식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개인의 자연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꿈꾸며
물론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더 이상 기존의 질서와 엄친아 게임에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한 우물만 열심히 파서 전문성을 쌓고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유튜버나 블로거도 증가하고 있고,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온라인 수업으로만 실력을 쌓아 고액의 연봉을 받는 개발자들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설사 돈을 좀 못 벌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맘 편하게 살고 있다는 분들의 이야기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사회 분위기도 이제 더 이상 사명감이나 애국심 대신 개인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달라지고 있음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의 주류는 기존의 질서를 옹호하고 완강하게 지키는 쪽이다. 거의 평생을 기존 질서 덕택에 국가가 부강해지는 모습만 보아왔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를 조금 보완하고 다듬으면 될 일이지, 시스템 전체를 혁신적으로 바꿔야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갸우뚱할 뿐이다. 마치 파괴적 기술의 등장이라는 환경 변화에 위기감을 느꼈음에도 파괴적 혁신보다는 존속적 기술 향상만 도모하다 경쟁력을 잃어가는 선두기업처럼 말이다. 결국 파괴적 혁신을 주도하는 새로운 스타트업에게 시장의 주도권을 내주고 나서야 노키아처럼 "우리가 잘못한 건 없다. 하지만 졌다"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변화된 IT 시대에 맞게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자연성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희망한다. 그리고 새로운 시도를 권장하고, 실수하거나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이 바람직했다면 다시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게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리셋의 즐거움을 실제 현실에서도 조금이나마 누릴 수 있게 되길, 하나의 정답이 아닌 다양한 삶의 방식이 인정받게 되길,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내고 그로 인한 행복감과 경제적 보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