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인도 Sep 03. 2023

위버스와 다신교

한국의 주요 IT 플랫폼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부류가 있다. 위버스와 디어유 같은 팬덤 플랫폼이다.


벌써 4세대까지 진화했을 정도로 한국의 아이돌 팬덤 문화, 덕질 전통은 유구하다. 이 정도 했으면 질릴만도 하고, 새로 데뷔할 연습생 풀이 바닥 않았나 싶은데도 끊임없이 아이돌이 탄생하팬을 끌어모은다.


팬들은 팬덤 플랫폼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일상을 구경하고, 영상 채팅으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굿즈도 사고, 티켓도 예매한다. 누적 다운로드 수 1억 건을 달성하고 월간 활성화 이용자 수가 천만 명이 넘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팬덤 플랫폼을 찾는 것일까.



모계적 다신교와 부계적 일신교


에리히 프롬은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모든 문명은 발전 순서 상, 대자연을 어머니로 상상하고 만물에서 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모계적 종교가 우선 발달하며, 그 이후 고등종교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법과 논리, 질서 등을 상징하는 부계적 종교가 들어서게 된다고 말한다. 부계적 종교는 모계적 종교를 최고 지위에서 퇴출시키고 사회의 지배적 신념 체계로 자리잡게 되는데, 이는 마치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과도 유사하다. 아이는 어렸을 때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구하지만, 나이가 들면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과 질서를 충실히 따라야만 보상처럼 주어지는 아버지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어린아이는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린아이는 무력하다고 느끼고, 모든 것을 감싸주는 어머니의 사랑을 요구한다. 다음에 어린아이는 사랑의 새로운 중심으로서 아버지, 곧 사고와 행동의 지도 원리인 아버지를 찾게 된다."


실제로 대부분 인류 문명의 초기 단계(특히 수렵채집 단계)에는 애니미즘, 토테미즘, 토속신앙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무한정 영양을 공급해주는 자애로움에 영감을 받아 사람들이 온갖 동식물과 사물에 신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모계적인 다신교가 우세하다. 하지만 농경생활 이후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살게 되면서, 자연적인 요소보다는 인간의 인위적인 요소에 따른 영향이 더 커지고 사람들 간에 질서와 위계를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어떤 형이상학적인 보편적 믿음이 중요해진다. 이 때 부계적인 일신교가 등장하여 과거 주류였던 모계적 다신교를 사회에서 점차 밀어낸다.


그렇다고 다신교의 전통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구 문명을 끌어온 두 축은 다신교 그리스로마 문화일신교 기독교 문화이다. 정치, 철학, 예술, 사상 모든 분야에서 양극을 왔다갔다하며 발전을 이루었다. 사치와 향락으로 로마 제국이 부패했을 때 기독교의 검소와 절제로 사회를 정화했고, 중세 기독교의 억압이 숨통을 죄여오자 르네상스로 활기를 찾았다. 그러다 또 다시 사치와 과도한 아름다움의 추구로 사회가 방탕해지종교 혁명을 통해 엄격한 기독교 본래 삶의 방식을 추구했다. 고등종교인 일신교를 받아들인 이후에도 다신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며 일신교의 부작용을 해독하는 데 활용한 것이다.


서구 외에도 많은 국가들이 오늘날까지 다신교의 전통을 가꿔나가고 있다. 인도, 일본 등이 대표적인 다신교 국가이다. 한국 역시 오랜 역사 속에 전통적인 다신교 신들을 가지고 있었다. 자청비, 바리공주, 마고할미, 당금애기 등. 그러나 급작스런 현대화 과정에서 과학지상주의의 명분 아래 토속신앙미신으로 폄하되었고, 이러한 다신교 신들은 이름만 언뜻 어디선가(거의 점집) 들어봤지 대다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왠지 21세기에 다시 한국에 새로운 다신교의 신들이 탄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일신교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목 말랐던 부분을 채워주면서. 과거 다신교의 신이 생겨났던 방식과 상당히 유사한 과정을 통해 말이다.



신이 된 프시케 이야기


토머스 불핀치의 <그리스로마 신화>에 인간에서 신이 된 프시케의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 어느 왕국에 세 명의 공주가 있었는데, 그 중 막내 딸인 프시케가 아주 아름다워 사람들의 찬양을 받았다. 이에 질투를 느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아들 에로스를 불러 프시케가 아주 미천하고 못생긴 남자와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프시케를 처음 본 에로스가 그 아름다움에 깜짝 놀라 본인이 사랑의 화살에 실수로 찔렸고, 프시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아프로디테의 미움을 받는 프시케에게 아무도 청혼하지 않자, 걱정이 된 부모는 아폴론 신전을 찾아가 신탁을 구하는데 프시케는 인간이 아닌 괴물에게 시집갈 운명이니 그녀를 바위 산 위에 데려가 혼자 내버려두고 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신탁을 거스를 수 없었던 부모는 그 지시를 따랐고, 프시케는 바위 산 위에 혼자 남겨진다. 그런데 우려와 달리 서풍의 신 제피로스의 안내를 받아 에로스의 아름다운 궁전으로 가게 된다.


프시케는 궁전에서 편안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며 밤에는 신랑을 만났으나, 에로스는 신이었기에 그를 보지는 못하고 어둠 속에서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언니들이 신랑이 괴물이며 나중에 프시케를 죽일 수도 있다고 바람을 넣자 어느 날 밤 에로스가 자고 있을 때 단검과 등불을 들고 몰래 그에게 다가간다. 그런데 그는 괴물이 아닌 아주 잘생긴 미소년 에로스였고, 이에 깜짝 놀란 프시케는 실수로 등잔기름을 떨어뜨리게 된다. 잠에서 깬 에로스는 본인을 의심한 프시케에게 분노와 실망을 표출하며 그녀를 떠나버린다.


금기를 어겨 내쳐진 프시케는 아프로디테를 직접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에로스와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청하는데, 이에 아프로디테는 세 가지 불가능한 과제를 조건으로 제시한다. 각각 곡물 분류작업, 황금양의 양털 모으기, 저승의 여왕 페르세포네에게서 아름다움을 얻어오는 미션으로, 프시케를 불쌍히 여긴 동물들과 신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모든 과제를 완수한다. 그리고 에로스와 다시 만나 신들의 모임에 초대받고 신의 자리에 오른다.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보내 프시케를 천상의 회의에 참석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녀가 도착하자 제우스는 불로 불사의 음식이라고 하는 암브로시아를 한 잔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프시케야, 이걸 마시고 불사의 신이 되어라. 에로스는 맺어진 이 인연을 끊지 못할 것이며, 이 결혼은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




아이돌 데뷔 프로그램


최근 종영한 한 차세대 글로벌 걸그룹 데뷔 프로그램. 총 10화에 걸쳐 방영되었으며, 같은 소속사 22명의 연습생들이 총 7차례의 라운드를 거쳐 차기 걸그룹의 데뷔 멤버를 결정하는 경쟁의 무대에 선다. 각 라운드마다 새로운 콘셉트와 스타일을 보여주어야 하는 미션이 주어지고, 이 미션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연습생은 탈락한다. 또한 미션과 함께 팬덤 플랫폼에서 진행되는 팬들의 인기투표 역시 연습생들의 탈락과 데뷔에 영향을 미친다.


22명의 연습생들은 나이와 출신, 성격, 장기 모든 면에서 저마다 다른 색깔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데,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각 연습생들이 경쟁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과 반응이 팬들에게 노출된다. 그리고 각 팬들은 자신이 가장 공감하고 호감을 느끼는 연습생에게 애정을 갖게 되고, 그들과 같이 경쟁의 무대에 서서 희노애락을 경험한다. 미션에서 상대팀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의 기쁨도 느끼고, 같이 연습하던 연습생이 탈락했을 때의 아픔도 함께 겪는다.


평범한 일반인이었던 연습생들은 점차 늘어나는 팬들의 지지와 먼저 아이돌이 된 선배들의 도움 아래 점차 아이돌로 성장한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7라운드 데뷔 무대. 마치 제우스의 목소리와 같이 최종 데뷔 멤버인 6명의 이름이 차례로 불리고 그들은 신으로 등극한다. 최근 방영하는 대부분의 아이돌 데뷔 프로그램이 이와 대동소이한 형식으로 수많은 다신교의 신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마치 프시케가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찬양 받고, 시련 극복과 과제 완수과정을 거쳐 신이 것과 유사하게 21세기 한국의 아이돌 역시 대중지지를 받고 일련의 미션을 성공시키며 데뷔한다. 다신교의 많은 신이 저마다의 스토리와 관장하는 영역이 있는 것처럼, 한국의 아이돌 역시 각자의 스토리와 담당하는 콘셉트 혹은 개성을 가지고 있다.



21세기의 올림푸, 팬덤 플랫폼


그동안 한국 종교 시장(?)에는 너무 엄격한 일신교 상품만 과잉공급 되었던 것 같다. 근엄한 아버지 같은, 질서를 잡아주는 'T형' 일신교도 필요하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는 'F형' 다신교 신들도 필요하다. 이제껏 충족되지 못했던 수요가 폭발함과 동시에 엄청난 공급이 이루어지는 순환 현재의 아이돌 전성시대를 지속시키는 근원적인 힘 아닐까.


아이돌은 우리 중에 선택되어 신이 된 존재이기에 신이지만 우리를 닮았다. 예쁘고 잘생겼으며, 돈도 많고, 인기도 많고, 개성도 강하다. 하지만 동시에 실수도 하고, 시련도 겪으며, 희노애락 감정을 느끼고 표현한다. 그래서 더 친밀하게 느껴지고, 쓸데없는 고민을 털어놔도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워 잘 들어줄 것만 같다. 맛있는 음식 먹으면 행복해하고,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망가지도록 춤을 추는 친구 같은 신. 계속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다.


과거 그리스에서 신들을 경배하고 신탁을 듣기 위해 신전을 찾았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은 아이돌을 만나고 소통하기 위해 팬덤 플랫폼을 방문한다. 아이돌 중에 여신, 남신이 하도 많아 우스갯소리로 '신전이 미어 터진다'고 하는데, 팬덤 플랫폼의 공간은 아주 넉넉하다. 훨씬 더 다양하고 풍성한 스토리와 매력을 가진 신들로 가득 채워지길 바란다.

이전 11화 당근마켓과 자유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