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이 생존 확률을 높이고 안정적으로 지속적인 번영을 누리기 위해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개인들이 모여사는 각 지역의 특색도 역시 보존하고 가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민주사회는 지방자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치정부와 의회를 설치해 지역의 문제는 그곳의 주민들이 스스로 해결하도록 만든다. 각 지방은 저마다의 고유한 역사와 전통, 문화, 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주체는 지역민들이다. 따라서 지역민들에게 권한을 넘겨주어야 지역의 고유함을 지키면서 동시에 여러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최적의 답안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방의 자치정부는 중앙정부에 비해 규모도 작고 행정능력이나 자금력, 경험과 노하우 등 여러 측면에서 전문성이 떨어진다. 중앙정부는 우수한 관료들과 거대한 조직, 방대한 데이터와 사업 경험을 쌓아놓고 있기에 같은 문제를 해결해도 훨씬 더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간혹 지방정부의 비효율적 행정 및 자원의 낭비와 관련된 기사가 나오면 "지방자치를 폐지해야 한다"는 댓글이 달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진짜로 지방정부의 일을 모두 중앙정부에 맡겨버린다면 새롭고 참신한 해결책이 나오기보다는 다른 모든 지역에 적용된 천편일률적인 방식이 도입되고, 결국 지역의 다양성을 해치는 결과를 불러온다. 그래서 지방정부와 중앙정부 간에 어떤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데, 이에 <자유론>은 아래와 같이 답한다.
이 문장에 중앙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지방자치를 도울 수 있는가에 대한 핵심적인 지침이 담겨 있다. 중앙정부는 지방정부가 설사 비효율적으로 일하면서 어려움을 겪더라도 일단은 놔두고 지켜보되, 이미 다른 지역에서 일어났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려고 할 때만 개입하여 막으면 된다는 것이다. 즉, 중앙정부의 우수한 능력을 내세워 지시를 내리거나 구체적인 해답을 주지말고, 지방이 알아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믿고 맡기라는 의미이다. 그럴 경우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험을 거치며 지방정부는 나름대로 개별적인 경험과 노하우를 쌓게 되고, 결국 독창적인 색깔의 지역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글로벌 시대에 지방자치는 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으며, 특히 메가시티권을 중심으로 발달하고 있는 도시 문화에서 특히 더 중요하다. 전세계의 도시들은 국가경쟁력과는 별개로 자체적인 도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다. 도시경쟁력이란 곧 어떤 도시가 얼마나 특색 있고 매력이 있는지, 또 전세계의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이 계속 머무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각 도시의 특성이 가져오는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도시에서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도시 이름을 말하면 딱 떠오르는 고유의 이미지를 생성함으로써 전세계 인재들에게 매력을 어필해야 한다. 한 국가는 이런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도시를 여러 개 육성함으로써 국가경쟁력도 덩달아 올라가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은 <자유론>의 가르침대로 잘 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삼국시대 이후 통일국가를 유지했던 한국은 지방분권의 전통이 약하다. 대륙에서, 해양에서 지속적으로 외적의 침략을 받았기에 이를 방어하기 위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문화가 발달했다. 게다가 한국전쟁 이후 상시 전시체제 분위기 속에서 오랜 기간 군사 독재가 이어졌고, 전 국토가 안보 차원에서 중요한 중심지와 나머지 지역으로 나눠져 차별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 물론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장 효율성이 높은 지역에 자원을 몰빵할 수밖에 없었다는 당위성이 있기도 하지만.
그 결과 우리는 개인도, 지역도 독창적이기보다 획일화된 경향이 강하다. 군대에 들어가보면 사람을 획일화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몸으로 배우게 된다. 똑같은 옷에, 머리는 빡빡 밀고, 군번과 계급으로 불리며 같은 도구를 쓰고, 동일한 행동과 언어를 사용할 것을 강요받는다.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다. 이런 군대문화가 사회 곳곳에 퍼져 있고, 이제는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획일화의 압력은 강하다. 그래서 밖에 나가보면 옷도, 자동차도 비슷한 무채색 계열이 많고 외모나 스타일도 튀지 않고 다들 무난무난하다. 지역의 도시들도 대동소이하게 생겨서 어디가 어디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삶의 양식이 획일화 되어 있다는 말은 곧 표준이 되는 정답이 있고, 그 정답에 가까울 수록 높은 신분으로 분류되는 계급체계가 존재한다는 의미도 된다. 전국민의 반이 군대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우리는 수평적 다양성보다는 수직적 계급화를 참 좋아한다. 지역 중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건 서울이고, 그 다음이 경기도, 그 다음은 광역시 하는 식이다. 심지어 서울 내에서도 다시 동네 간 계급을 나누어 놓았다. 강남은 왕족이고, 잠실은 영의정이며, 목동은 양반이란다. 한국은 강남을 위시한 서울을 중심으로 모든 게 발전했고, 나머지 지역은 그저 서울의 아류에 불과하다. 지방에 있는 건 서울에 다 있고, 반대로 서울에는 있지만 지방에 없는 것들이 많다. 기업도 없고, 대학도 없고,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시설도 부족하다.
지역의 도시들, 특히 새로 생기는 신도시들은 한국 사회의 '정답'인 서울, 그 중에서도 강남을 따라하기 바쁘다. 아파트 숲과 쇼핑몰, 호수공원. 어디선가 본듯한 비슷비슷한 풍경들. 눈을 가린 채 데려가서 여기가 서울이라고 말해도 믿을만큼 유사한 번화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새롭고 독창적인 풍경을 실험하기 보다는 이미 검증된, 누구에게나 최고 선망의 대상인 서울과 강남의 모습을 흉내내려고 한다. 물론 최근에는 지역별로 특색있는 거리나 유적지, 건축물 등을 조성함으로써 나름대로 지역의 독창적인 풍경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지만, 도시 별로 완전히 휙휙 달라지는 이탈리아 같은 국가와 비교해보면 여전히 획일화의 경향이 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로컬 플랫폼을 이용해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주민들과 만나 물품 거래도 하고, 알바도 구하며, 모임이나 행사에 참석해 지역 환경에 맞는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는 언뜻 보았을 때 획일화된 삶의 방식보다는 지역별 특성에 맞는 다양성이 자라나는 실험의 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의 부동산이 그러했듯이 자칫 로컬 플랫폼을 통해 라이프 스타일에서조차 획일화와 계급화가 진행될 위험 역시 존재한다.
당근마켓에서는 현재 위치를 어떤 동네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올라오는 콘텐츠가 달라지는데, 가끔 내가 사는 지역이 아닌 '상위 계급' 동네로 위치를 바꿔볼 때가 있다. 그럼 그 동네 사람들은 지금 뭐하면서 살고 있나, 어떤 대화들을 주고 받고 어떤 물건을 사고 팔고 있나 눈팅이 가능해진다. 쓸데 없는 걱정이지만, 혹시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눈팅을 해서 왕족 동네의 라이프 스타일을 모방하려고 애쓰게 되는 건 아닐까. 자칫 로컬 플랫폼이 강남스타일의 전도사가 되어 전국 각 지역 사람들이 강남 사람들을 모방하여 살도록 만들수도 있다. 정답을 좋아하고, 국룰을 찾으려고 하는 한국 사람들의 특성상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지역 다양성의 실험장'과 '강남스타일의 전도사' 이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서 과연 로컬 플랫폼이 어떻게 균형을 잡아갈 지 궁금하다. <자유론>이 제시한대로 각 지역의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 실험을 도와주면서, 진짜 필요할 때만 개입해서 살짝살짝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플랫폼의 효율성과 로컬의 다양성을 최적의 비율로 섞어서 우리 사회가 더 풍요롭게 되는 데 공헌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느 한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면서 플랫폼으로서의 경쟁력을 상실하거나 아니면 지역의 색채를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흑화하게 될까.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기에 앞으로의 행보가 어떨지 흥미롭다.
플랫폼의 기세는 무시무시하다. 제국주의 군대는 그래도 밤에는 자고 지치면 쉬기라도 했지. 플랫폼은 1년 365일 24시간 밤새도록 쉬지 않고 데이터를 수집하며 힘을 키워나간다. 거대하고 힘이 센데 부지런하고 빠르기까지 하다. 이렇게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의사결정 과정이 복잡하지 않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객관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판단이 이루어지고, 수집된 데이터가 가리키는 방향이 명확하다면 거침없이 결정하고 나아간다. 물론 그 중에 격렬한 토론 과정도 진행되지만 소수만 참석할 뿐이고, 객관적인 지표가 근거가 되어야지 개인적 감정이나 주관적 판단이 반영될 여지는 별로 없다. 사실 이는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개별적 의견을 가진 다수에 의한 토론과 합의'라는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다양성을 파괴하고 사회를 획일화한다는 점에서도, 오직 데이터를 기반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플랫폼은 민주주의와 조화를 이루기 쉽지 않아 보인다. 과연 플랫폼이 제국주의적 본성을 제어하고, 다양성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가져보는 이유는 로컬 플랫폼과 같은 실험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때 글로벌 기업들이 지역 사회 및 자연 환경을 해치면서 영리적인 이익만 추구하다 최근 ESG의 강조로 일정 부분 조화를 이룬 것처럼, 플랫폼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착한' 면모를 조금씩 키워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변화의 선두에 로컬 플랫폼이 서 있기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